소설리스트

308화 (308/604)

테라리움 어드벤처의 게임 속 세상이 오랫동안 날 기다려 왔다?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계기는 아주 우연이었다.

아니 어쩌면 기적일까? 그도 아니면 지금 인삼 드라이어드들이 걸린 것과 같은 저주일까?

어쨌든 상식적으로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인 것은 분명했다.

단지 스마트폰으로 흔해 빠진 방치형 게임인 <무한 다이아>를 즐기다 최종 업적을 깨자마자 끌려온 곳이 이 세계였다.

차라리 내가 <무한 다이아>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면 이해라도 하지.

공통점이라곤 같은 개발사일 뿐인, 장르도 완전히 다른 게임 속에 내던져졌단 말이지.

그런데 이것이 모두 예정된 일이라고 드라이어드는 말하고 있었다.

“왜… 하필 전데요?”

“위대한 세계수의 뜻을 저희는 감히 알지 못합니다. 그저 기다려야 한다는 것만 알 뿐…. 죄송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억겁의 시간이 담긴 뿌리 속에 그에 대한 해답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뿌리는 이제 온데간데없지요. 저조차도 드라이어드였다는 영혼만 남아 있을 뿐 스스로 모체를 틔울 수 없는 상태입니다.”

드라이어드는 땅을 바라보았다.

수없이 많은 고엽들이 쌓이고 쌓여 퇴비처럼 변해 버린 땅이었다.

그러고 보니 군락지라고 부르기엔 이곳에는 살아 있는 식물이 하나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한 가지 확실한 건… 저희는 주어진 사명을 마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작은 세계수님께 전해 드릴 보물은 모두 썩어 없어져 버렸고 이미 작은 세계수님께서 이곳에 도달하신 후이기에 다시 준비하기엔 늦어 버렸습니다.”

인삼 드라이어드는 내가 이 세상에 오게 된 아주 중요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대로 겨우 알게 된 힌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다른 인삼 드라이어드는 어떨까요? 꼭 태초의 군락지에서 자란 드라이어드들만 사명을 가지고 있나요?”

드라이어드는 아주 슬픈 얼굴을 지었다.

그리고 비참한 목소리로 그들의 미래에 닥친 참담한 현실을 토로했다.

이곳의 시간이 기이하게 뒤틀려 버린 이후로… 세상 밖에서 태어난 인삼 드라이어드는 물론, 아예 식물 자체가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드라이어드는 죽어서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간다.

동굴 안의 시간이 정상적으로 흘러갔다면 끝내 전생의 내가 이곳에 당도하지 못했을 때, 다음을 기약하며 그중 일부는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 다른 시간의 다른 장소에서 나를 기다렸어야 한다고 했다.

“드라이어드가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는 순리는 단순히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것에 끝나지 않습니다. 탄생의 배분입니다.”

드라이어드는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작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식물은 더 다양하고 넓은 지역에 후대를 퍼뜨려 나갑니다. 어떤 식물은 바다에 씨앗을 띄우고 어떤 식물은 바람의 흐름에 씨앗을 맡기죠. 어쩌면 아주 먼 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될 수도 있고 바로 옆자리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계속 한 자리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식물은 생태계의 가장 밑바닥에서 단단한 지반이 되어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우리가 움직여야 생명들도 더 다양한 세상을 탐방할 수 있어요.”

어쩐지 그 설명에 산불이 나 모든 동물들이 떠나 버린 곳에 새로이 식물들이 자라기 시작하자 동물들이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또한 평생 한 가지 열매만 먹고 사는 새들이 옆 산에 그 열매를 맺는 나무가 번성하자 서식지를 그곳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도.

혹은 그런 이야기도 있었다.

천적들이 싫어하는 향을 풍기는 꽃이 있어서 그 꽃이 자라는 장소에서만 서식한다는 동물들의 이야기.

메스키트도 내게 많은 지식을 심어 주긴 했지만, 이 드라이어드는 어쩌면 더욱 원초적인 이야기를 내게 전해 주고 있었다.

“이를 위해 세상의 모든 필드가 자연이 순환할 수 있도록 규율을 지키고 있습니다. 필드의 규율을 담당하는 것은 단순히 가디언들뿐만 아닙니다. 모든 드라이어드가 규율의 협약자입니다. 드라이어드는 필드의 한 자리를 빌린 만큼 그 필드의 자연이 정상적으로 순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임무가 있습니다.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야죠.”

그 임무는 단순히 불을 퇴치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처럼 들렸다.

“가장 우수한 그릇을 가진 식물에서 드라이어드가 태어난다…. 그건 그곳의 종을 대표하여 그곳에 태어난 드라이어드가 뿌리박힌 것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외진 곳에서 태어난 식물일지라도 드라이어드가 태어날 수 있다는 약속이 반드시 전제됩니다. 반대로 태어날 드라이어드가 있기에 그 자리에 그 식물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이 세상 밖에 다른 인삼은 존재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태어날 수 있는 드라이어드가 모두 이곳에 갇혀 있기 때문이죠.”

단순히 퍼져 나간 세계수의 축복이 우연히 닿아 운 좋게 드라이어드가 자연 발생한다는 것보다 한층 더 심오한 이야기였다. 이 역시 모두 예정된 탄생이었다?

어쨌든 이곳을 제외한 그 어떤 곳에서도 인삼이 자라고 있지 않을 거란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럼… 인삼은 이대로 멸종…인가요?”

그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끝을 맺기가 망설여졌다.

인위적으로 농사를 지어 재배한 인삼을 제외하고 자연에서 자란 산삼도, 적어도 내가 있던 세상에선 발견하기 무척 힘들지언정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내 세계에서 알던 식물 중 하나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니.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저희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 줄 분이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이곳에 묶인 저희의 영혼을 모두 해방해 주신다면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 다시 탄생의 배분을 기다리면 됩니다.”

드라이어드는 내 장갑에 박힌 보석을 가리켰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곳은 우리 인삼의 신화가 시작된 곳. 그 어떤 장소보다도 우리의 힘이 가장 강하게 응축된 곳입니다. 그것은 인내와 인고의 힘. 어쩌면 이곳의 저희들이 이런 형태의 저주를 받게 된 것은 그 힘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이 멸망했을 때 깨져 버린 이치가 멈춰 버린 시간으로 나타난 것 역시 어쩌면 예정된 결과였을지도 모릅니다. 참고 견뎌내야 한다는 속성은 시간의 흐름상 미래가 아닌 현재에 충실한 것과 관련이 깊습니다.”

나는 조심히 손등을 쓰다듬었다.

“이곳의 태양의 가호가 빚어낸 특별한 힘은 ‘인내의 시간’, 즉 ‘시간 정지’입니다.”

내가 강화로 얻은 특수한 힘이 시간 정지라고?

뭔가 시들링과 포르타에게 들었던 것과는 조금 결이 다른 느낌이었다.

방어형 특성을 강화에 실으면 장비의 내구도가 튼튼해진다는 그런 단순한 작용 방식을 가진 힘이 아니라니.

“저희에게 걸린 저주 역시 정지된 시간입니다. 오래전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선 들으셨지요?”

어떤 걸 묻는 걸까? 홍동들에게 들은 이야기? 아니면 노파에게 들은 이야기?

“이곳에 살던 아이들은 모두 참혹한 변을 당했습니다.”

노파가 하다 끊겼던 이야기의 뒷내용이었다.

좋지 않은 의도를 품은 자들의 방문.

결국 고아들이….

“어쩌면 그대로 비극으로 끝났을 이야기가 되는 것이 나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결말을 원치 않는 드라이어드가 있었습니다.”

잘못된 원념, 그것의 정체는 아이들이 모두 죽지 않는… 죽기 직전의 시간을 간절히 염원해 버린 것이었다.

“하필이면 우리의 신화가 이룩해 낸 위대한 힘을… 위대한 왕이 염원해 버리니…. 아뇨, 정정하겠습니다. 어쩌면 그건 우리의 왕뿐만 아니라 모두가 원하는 바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뒤틀린 시간, 빠져 버린 그림 조각, 그것을 메꾼 것은 그 자리에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하고 있던 뒤틀린 힘이었다.

그것도 그 장소에서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온 드라이어드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간절히 바람에 따라 뒤틀려 버린 힘.

“그래서 시간이 멈춘 건가요?”

“아뇨, 그러기 위해선 시간을 멈춘다기보단 뒤로 돌려야 하지요. 그건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데 어찌 죽은 생명이 다시 살아나겠습니까? 그건 세계수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염원을 이루기 위해 최대한 실현 가능한 방향으로의 흐름이 일어났다.

뒤틀린 힘이 죽음으로써 떠났어야 할… 그곳에서 살았던 아이들의 영혼과 시간을 붙잡고, 오갈 데 없는 빈 껍데기를 드라이어드들의 영혼에 덧씌워 버린 것이다.

드라이어드들 역시 이미 세상이 멸망함에 따라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존재들이나 불안정하게 남은 것들이고, 아이들의 시간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불안정한 것들인데, 서로 다른 그림 조각들끼리 어설프게 끼워 맞춰진 격으로 융합되어 버렸다.

그것이 홍동들이 말한 ‘처음과 완전히 다른 그림’이었다.

“말만 들으면 도저히 제 힘으론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데요….”

특수한 힘이 시간 정지라고 들었지만 활용도에 대해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뇨, 생각하시는 것보다 쉽습니다. 제게 했던 것처럼 절 옭아매고 있는 힘을 흡수하면 됩니다. 본질이 변해 뒤틀린 힘이지만 작은 세계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힘은 본질 그 자체인 가장 순수한 힘입니다. 또한 작은 세계수님께선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가지신 분입니다. 다시 말해 세계의 가장 큰 흐름과 다를 바 없는 분이시지요. 이곳은 겨우 세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니 힘의 주도권은 결국 당신에게 있습니다.”

드라이어드는 내게 고여 있던 물에 수로를 터 새로운 물을 공급하는 것과 같다 말했다.

노파가 말했던 것처럼 겨우 윗물만 걷어 가는 작은 흐름이 아니라, 물속 깊은 곳을 뚫어 안까지 정화시키는 거대한 물의 흐름이 되라고.

아직 드라이어드의 말이 완전히 이해 가지 않았지만 시도 자체는 쉬우니 망설일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이어드는 단순히 내 손등의 보석에 손을 대자 저주가 풀렸다.

그러니 다른 아이의 모습을 한 드라이어드들에게도 똑같이 하면 될 것이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하나하나 오랜 시간을 들여 같은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다들 아이의 모습은 벗어던지고 어엿한 드라이어드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내게 감사 인사와 동시에 작별을 고했다.

다시 찾게 된 자신들의 본모습을 보며 회한에 잠겨 있을 순간도 갖지 않았다.

그렇게 지체되는 시간 역시 잘못된 것이라며, 각자 자신들의 모습에 덧씌워졌던 아이들의 시간을 소중히 보듬어 안은 채 환한 빛 무리에 감싸였다.

그들은 최후에 열매의 모습도 남기지 못했다.

드라이어드가 죽어 사라질 때의 과정이 순식간에 스킵되어 버린 것처럼, 그렇게 일련의 정상적인 과정을 따르지 못하고 빛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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