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곳에서 태초의 군락지를 발견할 줄은 전혀 예상도 못 했다.
태초의 군락지는 포르타에게 그 정보를 들은 이후부터 쭉 꿈꿔 왔던 장소였다.
어떤 식물이 최초로 군락을 이룬 곳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장비 강화를 통해 내 스펙을 올릴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정체 모를 드라이어드의 군락지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드넓은 들판을 노랗게 수놓았던 민들레 군락지에 비하면 이곳은 땅속에 파묻힌 좁디좁은 초라한 군락지였다.
으리으리한 신전도 없었고, 반짝이는 보석들로 잔뜩 장식되어 있지도 않았다.
태초의 군락지는 어떤 식물의 최초 모체가 이룩해 낸 신화의 근원지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도 모르게 거창하고 화려한 무언가를 기대했나 보다.
그렇다고 실망이 컸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발견 자체에 큰 의의를 둬야 했다.
식물의 군락지를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최초로 생겨났다는 태초의 군락지라니.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발견해 두 눈으로 담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행운이었다.
스스슥.
장갑에 박힌 흑요석의 색이 완전히 바뀌면서 석판의 빛도 옅어졌다.
꼭 보석이 석판의 힘을 빨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또한 석판이 들려주던 내 목소리도 점차 작아졌다.
그렇다면 강화가 모두 끝났다는 거겠지?
처음 시도해 보는 일이라 가늠이 어려웠지만 오래 손을 대고 있어도 더 이상의 변화가 없는 듯해 손을 뗐다.
쩌적.
“앗, 부서져 버렸어.”
“깨졌어….”
석판은 내가 손을 떼는 것과 동시에 금이 가더니 네 갈래로 조각나 버렸다.
설마 나 때문인가? 내가 힘을 흡수해 버려서?
하지만 위대한 힘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곳이라며?
그런데 내가 단순히 장비 강화 한 번 시도했다고 이렇게 끝나 버리는 거야?
사고를 친 기분이 들어 뜨끔했다.
아이들이 앞다투어 석판에 손을 대다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소리가 더 이상 안 들려.”
“따뜻하지도 않아….”
그 말에 더욱 죄지은 기분이 들었다.
이 이상한 장소에서 유일한 놀이터가 되어 줬을 텐데….
“그것참… 미안하게 됐다….”
아니 난… 일회성인 줄 몰랐지.
포르타나 시들링도 그런 설명은 해 주지 않았단 말이야.
그때,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던 아이들이 갑자기 눈을 빛내며 내 장갑을 가리켰다.
“저기 있다!”
“응?”
아이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강화가 끝난 장갑의 금빛 보석이었다.
만지고 싶어 하는 것처럼 손을 뻗고 폴짝폴짝 뛰길래 손을 내려 주었다.
지척에 있던 아이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보석에 손을 댔고, 놀랄 만한 변화가 나와 아이에게 동시에 일어났다.
한 아이가 석판에 손을 대고 모습이 변했던 것처럼 그 변화가 이 아이에게도 동시에 일어났고….
내겐 보석이 달린 손등에서부터 몸 안까지 생경한 기운이 퍼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우웅.
벌레의 날갯짓 소리와 닮았으나 그보다 무겁고 오래 울리는 기이한 소리가 보석에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나와 아이 사이로 둥근 문양이 금빛의 홀로그램처럼 붕 떠올랐다.
12개의 선 배열과 길고 짧은 직선 2개, 시판과 똑같은 문양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분침과 시침으로 보이는 선이 거꾸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태초의 군락지에서 장비를 강화할 때 식물에 따라 특수한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했었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식물의 특성을 고려해 강화를 고르는 경우도 있는 듯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지금 군락지를 이루는 식물의 정체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
내게 도움이 될 능력을 얻은 것인지, 아니면 완전 불필요한 능력을 얻은 것인지 전혀 파악을 할 수 없단 말씀.
어쨌든 지금 벌어지는 상황이 혹시 그 특수 능력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대체 난 어떤 능력을 얻게 된 걸까? 부디… 내 모험에 도움이 되는 능력이었으면 좋겠는데….
“아….”
아이는 당황과 기쁨이 섞인 듯한 탄성을 내질렀다.
아이를 변화시키는 정체불명의 힘은 석판이 발휘할 때보다 어딘가 아주 집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한 나쁜 힘이 아니라 긍정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힘이라고 느껴졌다.
떠오른 시계 문양은 자꾸만 거꾸로 돌아갔고, 아이는 드라이어드의 모습을 띠던 것에서 더 나아가 황홀한 금빛에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작은 몸체가 허공을 향해 점점 높이높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난 갑자기 이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보석에 닿아 있는 아이의 손이 떨어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손으로 아이의 손등을 붙들었다.
쩌적.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깨진 유리창과 같은 균열이 생겼다.
균열은 자꾸만 영역을 넓혀 금빛으로 휩싸인 아이의 몸체까지 침범했다.
그 순간, 단단한 껍질을 깨고 속살을 드러내는 열매처럼, 아이를 감싸고 있던 무언가가 완전히 박살 나 조각조각 떨어져 내렸다.
“세상에….”
이 변화는 모두에게 보이는 것인지 다른 아이들도 넋을 놓고 바라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아이들의 맑은 두 눈에도 금빛의 잔영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떨어져 내린 금빛 조각은 다시 한데 뭉쳐 사람의 형태를 빚고, 허공에 떠올랐던 아이는 키와 팔다리가 자라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곳에는 아이가 아닌 어엿한 성인의 모습을 한 드라이어드가 있었다.
내 손등에 손을 댔을 때와는 완전히 뒤바뀐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한 아이에게서 떨어져 나와 뭉쳐진 조각이 빚어낸 것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사라진 아이의 얼굴과 옷차림을, 그 잠에 빠진 아이의 모습이 하고 있었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두 개의 동떨어진 형체를 보고 있자니 꼭 드라이어드에게 아이의 환영이 덧입혀졌다가 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아, 드디어….”
변화가 끝나자 드라이어드는 이윽고 보석에서 손을 뗐다.
그러곤 놀란 눈으로 자신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머리에 소복하게 달린 꽃을 섬세한 손길로 쓰다듬더니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날 바라보았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어요.”
훨씬 더 성숙해진 목소리엔 벅찬 감격이 담겨 있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가요?”
“작은 세계수님께서 제게 걸린 저주를 풀어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주요?”
드라이어드는 나비처럼 허공에서 사뿐히 땅에 내려섰다.
사박거리며 부딪히는 비단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오랫동안 제가 누구인지 잊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알 것 같습니다. 위대한 작은 세계수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산이 품은 보물, 인삼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인삼들의 태초의 군락지입니다.”
“헉….”
달짝지근한 약초 냄새가 묘하게 익숙하다 했더니….
“인삼이요? 세상에… 인삼은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더구나 너무나도 잘 알려진 식물이다 보니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자신의 소개를 끝낸 드라이어드는 아직까지 잠든 모습 그대로 허공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아이의 환영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곤 아주 소중하게 보듬어 안았다.
그 주위로 다른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저는 아직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요.”
나는 얼떨떨한 정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장갑의 금빛 보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대체 무슨 힘이 담겨 있는 거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요…. 이곳은 최초로 저희 수많은 인삼들이 터전을 삼은 곳이자 오랜 세월 태양의 한결같은 빛 아래 뿌리를 내린 곳, 그 어느 곳보다 우리들의 힘이 진하게 농축된 땅입니다. 만약 땅이 정상적으로 자연의 순리를 따랐다면 이 힘은 곳곳의 토양으로 흘러 나가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데에 이바지했겠지요. 그러나 자연의 이치가 깨지며 그 힘이 순환되지 못하고 썩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힘인데요?”
드라이어드는 아이를 안은 채로 뚜벅뚜벅 걸어와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손끝은 내가 수없이 문지르고 있던 보석에 아주 정중하게 닿았다.
“놀랍게도… 농축된 힘을 전부 흡수했군요. 마치 꽉 막혀 있던 지맥의 숨통을 트여 준 것처럼 말입니다. 그 힘은 저희의 탄생 신화이자 꽃말의 힘이 되기도 합니다. 세계수가 이곳에 저희를 안배할 적 저희에게 맡긴 사명은 이곳에 처음으로 당도한 그분을 위한 환영 선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분….”
세계가 애타게 기다려 왔다는 정체 모를 ‘그분’이 또 등장했다.
“저희는 자연 속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천천히 성장합니다. 최초의 모체는 세계수가 가장 먼저 세상 밖으로 내보낸 식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자라나며 세계가 만드는 역사와 지식, 지혜와 이치를 전부 빠짐없이 뿌리로 흡수하여 간직하도록 말이지요. 이는 갑자기 이 세계에 찾아올 그분이 무리 없이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오랫동안 준비해 왔습니다. 참고 견뎌 내는 ‘인내와 인고’라는 꽃말이 이런 연유로 생기게 된 것이죠.”
“인내와 인고….”
“범인들은 흙 속에 파묻힌 뿌리의 진가를 알지 못하나, 단 한 명 이를 알아볼 이가 찾아올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뿌리가 평범한 식물의 밑동이 아닌 자연이 간직한 보물임을 알아볼 것이다.”
산에서 자란 인삼은 산삼이라고 불리고, 오래 묵은 것일수록 그걸 복용한 사람의 수명도 늘리는 영약이라 여겨질 만큼 부르는 것이 곧 값이었다.
그 정도로 귀한 식물인 것이 이 세상에선 통용되는 상식이 아니란 것처럼 들려왔다.
말을 잠시 멈춘 드라이어드는 오랫동안 눈을 감았다.
크게 오르내리는 가슴이 마치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뜨인 두 눈엔 이상하게도 물기가 가득했다.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곳의 태양의 가호는 이미 예정된 주인이 있는 힘이라 다른 이들이 흡수하려 했다면 거부 반응이 일어나 스스로 소멸했을 겁니다. 하지만 보란 듯이 당신은 힘을 모두 취하셨죠. 최초의 모체는 세계가 태동할 적부터 인고의 시간을 견뎌 왔는데, 겨우 이 정도 시련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를 의심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저희는… 전생의 당신을 기다려 왔습니다. 이제라도 이곳에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발언은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전생의 나를 기다려 왔다니?
“같은 종의 식물들도 꽃잎의 크기와 잎의 개수가 저마다 다르지만 하나의 모체 신화를 이어 본질을 잊지 않는 것처럼… 오랜 시간 겉모습이 변모를 거듭해도 변하지 않는… 당신의 영혼을 기다려 왔습니다.”
“설마 기다려 왔다던 그분이 저라는 거예요?”
“네, 저희는 애타게 당신을 기다려 왔습니다. 이 세상이 본래 당신의 영혼이 있어야 할 곳입니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