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6화 (306/604)

“하나… 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빠져나갈 길이 떠오르지 않아 절망만 가득할 때였다.

뒤편에서 속삭이며 수를 세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내게 장난을 치려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확 밀려올 무렵.

“셋!”

“악!”

난 아주 강하게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훅 끌려갔다.

여러 개의 손이 단번에 내 옷을 잡아채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놀랍게도 난 땅속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거칠게 끌려가는 바람에 여기저기 부딪혀 아프긴 했지만 생각보다 수월하게 끌려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속엔 거대한 구멍이 뚫려 길게 통로가 나 있었다.

오래지 않아 건초나 낙엽이 가득 깔려 푹신한 바닥 위로 풀썩 떨어졌다.

그 덕분에 충격은 완화됐어도 온몸이 징, 하고 울리는 것처럼, 느리고 오랫동안 둔탁한 통증이 찾아왔다.

“미친… 아픈 걸 보니 지옥으로 끌려온 건 아니라 다행이네.”

저 위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바깥의 빛이 떨어진 깊이를 대강 가늠하게 해 주었다.

내 키의 다섯 배쯤?

내가 있던 자리에서 사라진 날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망령의 모습이 보였다.

단순히 고개만 숙이면 발견할 수 있는데 아예 다른 세상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날 발견하지 못했다.

죽을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동자, 동녀들이 보였다.

괴롭힘을 당한 전적이 있으니 영 꺼림칙했지만 이번만큼은 내 목숨을 구해 줬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내 말에 아이들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다 헙, 하며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망령이 그 웃음소리에 반응이라도 한 것인지 휙 고개를 숙였다.

난 아이들에게 끌려 반사적으로 벽에 찰싹 등을 붙였다.

다행히 굴곡진 부근 아래 몸을 피한 것인지 빛은 아슬아슬하게 날 피해 그림자를 남겼다.

망령은 오랫동안 아래를 바라보다 사라졌다. 들키진 않았다.

“휴우….”

떨어진 구멍 아래에는, 천장은 낮지만 어느 정도 넓은 공간이 존재했다.

손으로 벽을 짚으니 마감 처리를 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흙벽이 만져졌다.

꼭 누군가 땅을 파고 들어가 그 아래에 넓은 구덩이를 파 놓은 느낌이었다.

눅눅한 흙냄새에 낙엽이 썩어 가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발밑엔 바싹 마른 건초가 한 가득 묻혀 있어서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긴 어디니?”

“우리의 은신처야.”

“그럼 이 넓은 공간도 너희가 판 거야?”

“아닐걸?”

“맞아, 아닐걸? 처음부터 있었어.”

처음부터 이런 곳이 있었을 리가.

그러나 아이들은 정말 모른다는 눈치였다.

아이들은 내가 떨어진 경로 외에도 이곳으로 올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더 존재한다며 알려 주었다.

그들이 가리킨 곳을 보니 확실히 대강 가려진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하지만 내가 통과하기엔 너무 비좁아 보였다.

일단 빠져나가는 건 조금 뒤로 미루고….

혹시 순식간에 사라지던 연유도 비밀 통로를 통해 이곳으로 숨어 버렸기 때문인가?

“여기 있으면 편안한 마음이 들어.”

“맞아, 여기 있으면 기분이 좋아.”

재잘재잘 즐거운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표정엔 평온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내겐 단순히 더러운 흙구덩이일 뿐이었다.

“신기한 거 보여 줄까?”

“재밌는 거 보여 줄까?”

“이거 비밀인데 너만 보여 줄까?”

하나도 아닌 여럿이 먹이를 바라는 새끼 제비처럼 삐약삐약 말하니 정신이 사나웠다.

[주인님, 다이아를 가져가세요!]

[가져가세요!]

그 모양새가 꼭 난쟁이들이랑 똑 닮았다.

“또 장난을 치려고?”

내 물음에 아이들은 억울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절로 두려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방금 전 내 목숨을 구해 줬던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이쪽으로 와.”

“이리 와, 이리 와.”

아이들은 넓은 공간의 중앙으로 쪼르르 뛰어갔다.

“가는 길에 함정이 있어서 다리가 쑥 빠지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닌데… 그것도 재밌겠다. 그치?”

“맞아, 재밌겠다.”

말을 말지. 괜스레 아이들에게 장난거리를 던져 준 것 같아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으로 가니 식물의 바싹 마른 고엽들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설마 무덤은 아니지?”

아니 생긴 게 꼭….

아이들은 내 말이 헛소리라도 되는 것처럼 무시하곤 죽은 식물들의 잔해를 치워 나갔다.

이제 보니 잎의 형태가 꽤 일관됐다.

여러 식물이 섞인 것이 아닌 한 종의 식물의 고엽들이 몰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거 봐.”

두텁게 땅을 덮고 있던 것들을 치우자 놀랍게도 평평한 석판이 드러났다.

인위적으로 깎은 것처럼 반듯하게 각이 져 있었다.

“이게 뭐야?”

“이거 만져 봐. 따뜻해. 그리고 만지면 재밌어.”

“뭔지도 모르고 만지라고?”

“정말. 넌 우릴 너무 못 믿는구나.”

내가 주저하자 아이들 중 하나가 대뜸 석판 위에 손을 댔다.

그러자 갑자기….

“오….”

땅의 한기를 흡수해 얼음처럼 차가울 것 같았던 석판이 따스한 금빛을 뿜어냈다.

매끈한 판 위의 중앙에 맺힌 금빛이, 점에서 시작되어 선을 만들고 곡선이 되어 휘어졌다.

꾸물꾸물 석판에 기이한 문양이 새겨질 동안 석판을 만진 아이는 환하게 빛이 났다.

아이의 모습이 천천히 바뀌고 있었다.

고사리 손으로 빚은 작은 눈뭉치 같은 꽃이 머리에 생기고 푸른 한복은 곱디고운 붉은 빛으로 물들어 갔다.

익숙하나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 달짝지근한 향기가 한데 섞였으나 그보다 더 무겁고 진한 약초 향이 풍겨 왔다.

아이는 어느새 드라이어드다운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역시나 드라이어드였구나.

하지만 드라이어드였으나 지금은 드라이어드가 아닌 존재들….

“너, 모습이 바뀌었어.”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변화를 알아챈 것은 나뿐이라는 것처럼 누구도 내 말에 동의해 주지 않았다.

“여기에 손을 대면 재밌는 이야기를 해 줘.”

“맞아, 그리고 따뜻해.”

아이는 내게 차례를 양보하려는 듯 석판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드라이어드의 모습을 갖췄던 아이의 모습도 환상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이는 순식간에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후였고 석판은 어느새 빛을 잃었다.

석판이 만들던 문양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확인하기 전이었다.

“재밌는 이야기를 해 준다고?”

“응, 그리고 따뜻해.”

대체 따뜻하다는 것에 왜 그리 집착하니?

다른 아이를 시켜 석판을 다시 만져 보게 할 수도 있었지만 이번엔 내가 직접 손을 대 보고 싶었다.

석판이 뿜어 내던 그 금빛의 따스한 기운, 너무나도 익숙한 기운이었다.

그것은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가 없는 기운이었다.

세계수의 기운!

이런 이질적인 공간에서 세계수의 흔적을 발견하니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아이가 했던 것처럼 석판에 조심히 손을 대었다.

정말로 석판은 난로처럼 아주 따뜻했다.

이런 차가운 흙구덩이 안에 봄의 햇빛으로 인해 잔뜩 달궈진 것처럼 따스한 기운을 풍기는 돌이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옛날 옛날에 효심이 지극한 나무꾼이 살았어요. 또 효자에 나무꾼이야?”

“어?”

아이들의 말처럼 정말로 석판은 이야기를 해 주긴 했다.

하지만….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그런데 어떻게 호랑이가 담배를 피워?”

익숙한 목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이 금으로 만든 도끼가 네 것이냐? 와, 비싸겠다.”

어린 여자아이의 음성이었지만 말투가 나와 판박이었다.

나이를 먹고 그동안 숱하게 목을 혹사시킨 지금의 내가 다시 내기 힘든 목소리였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나였다.

“왜 착한 일을 하고도 소금상이 된 거야? 한 번 봐주지.”

“만약 도깨비가 한 세 번의 질문에 모두 답을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석판이 전해 주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동화책을 읽던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반들반들한 하드커버 책의 두꺼운 페이지를 넘기던 그때의 기억.

“왜… 내 목소리가 들리지?”

“응, 너랑 목소리가 똑같아.”

“아냐, 조금 달라.”

“그런데 다르긴 해도 똑같아. 그렇지?”

“맞아, 그래서 넌 우리에게 특별해.”

놀랍게도 아이들 역시 석판에서 내가 듣는 것과 같은 것을 들은 모양이다.

손이 닿은 석판의 온도는 점점 올라갔다.

딱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뜨거움이 되었을 때, 내 안에 가득 찬 서늘한 두려움을 모두 녹여 없애 버릴 것처럼 강렬한 기운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화 속에 들어가면 재밌겠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린 시절의 난 동화책이 내 세계의 전부였다.

아직 모든 가정에 PC가 보급되지 않았을 시절, 놀이터에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가득할 때가 있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난 또래보다 아주 어린 편에 속했다.

그 때문에 나이가 많은 무리는 날 껴 주지 않았고 난 밖에 나가서 놀기보단 집에서 노는 것을 선호했다.

내 정서에 해로울까 봐 부모님은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컴퓨터를 사 주지 않았고, TV는 부모님의 전유물이었기에 내가 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책뿐이었다.

다행히 매달 새로운 책이 책장을 가득 채웠기에 질릴 틈은 없었다.

동서고금 수많은 책들이 내 책장을 거쳐 갔지만 그중 전래 동화만큼 흥미로운 것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내 유일한 취미를 뽑자면 게임이었지만, 그때의 난 독서였다.

석판은 쉴 새 없이 내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절댔고 난 오랜만에 추억에 잠겨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와!”

아이들이 날 바라보며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작은 시선들은 석판에 댄 내 손을 올망졸망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그 탄성에 내 목소리도 편입했다.

“내 장갑!”

이질적인 공간에 동떨어진 이후로 장비가 사라지고 갑자기 한복을 입고 있었지.

그런데 놀랍게도 포르타가 만들어 준 장비 중 장갑이 홀연히 나타나 내 손을 감싸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장갑에 영롱하게 박혀 있던 흑요석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까만 보석 안에 은하수처럼 작은 빛의 무리가 천천히 유영하고 있었다.

또한 석판을 수놓던 기이한 문양도 점차 완전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문양의 정체는 꽃이었다.

곤봉 같은 꽃잎이 한데 모여 작은 꽃을 이루고, 그 작은 꽃들이 밤하늘의 불꽃처럼 둥글게 퍼져 나가는 모양이었다.

문양이 완성되자 장갑에 박힌 흑요석의 색깔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떠오르는 태양이 밤을 밀어내는 것처럼 새까만 흑요석이 점차 노을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러곤 광채가 무척이나 찬란해 마치 태양의 한 조각을 떼어다 붙인 것과 같은 금빛 보석으로 바뀌어 있었다.

포르타의 장비가 바뀌다니.

의심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뿐이었다.

‘태초의 군락지에 드루이드가 간다면 땅이 빚어낸 보석에 개화기 태양의 가호를 담을 수 있다.’

바크 강화!

놀랍게도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어떠한 식물의 태초의 군락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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