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5화 (305/604)

설마… 단순히 내가 이 도끼를 들 수 있는 사람이니 도와 달라고 하진 않았을 테고….

“홍동들이 어디까지 이야기해 주었지?”

“먼 옛날 세계가 멸망했고….”

아이들이 내게 해 줬던 이야기를 요약해 전달해 주었다.

“형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거기까지였나 보군. 내 이어서 설명해 줌세. 시간이 뒤틀린 곳이었으나 지금처럼 산 자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칠 정도로 위태로웠던 것은 아니라네. 세계엔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거대한 흐름이 있고 한낱 세계에 속해 있을 뿐인 이곳 역시 강제로 떠밀리고는 있었지. 하지만 겉만 그렇게 보인 거라네. 흐르는 냇물에 비유하자면 윗물은 흐르되 그 아랫물은 정체되어 썩어 있는 거지. 하지만 밖에서 보면 아무런 이상 없이 물이 흐르는 것으로만 보일 것이야.”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는 노파의 얼굴엔 그리움이 가득해 보였다.

“아주 먼 옛날부터 이곳엔 우리의 군락지가 있었다네.”

“어? 정말 군락지였어요? 혹시 회양목?”

“그런 이름은 아니었다네. 너무 오래된 탓에 우리가 정작 어떤 선조에게서 내려왔는지도 잊어버렸군.”

“어떻게 그걸 잊을 수가 있어요? 자신이 무슨 드라이어드인지도 모른다고요?”

“본래 존재해야 하지 않을 자가 존재하고 있으니 근본이 있겠는가?”

난 황급히 노파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드라이어드라면 누구나 자신들의 모체의 꽃이 어딘가에 장식되어 있었다.

또한 바곳처럼 꽃이나 열매, 잎사귀의 모양을 본뜬 바크를 입고 있기도 했다.

그걸 통해 드라이어드의 종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노파에겐 그 어떤 곳에도 꽃이 달려 있지 않을뿐더러 입고 있는 옷도 단순한 한복이었다.

하긴 진작에 그런 점이 눈에 띄었다면, 노파가 귀신인지 아닌지 의심할 필요 없이 단번에 드라이어드라고 알아봤을 것이다.

하, 이 자리에 메스키트가 있었다면 바로 알아봐 줬을 텐데…. 드라이어드들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

한옥에 한복이라… 그렇다면 혹시 우리나라의 토착 식물과 관련이 있는 드라이어드가 아닐까?

아니… 그런데 왜 하필 한국적인 배경이냐, 이거지.

언젠가 찾아올 ‘그분’을 위해 세계가 친숙한 모습으로 단장했다는데 그게 어째서 조선 시대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냔 말이다.

그리고 현재는 완전히 탈바꿈해서 완벽한 서양 판타지 세계가 되어 버렸고….

대체 무슨 격변을 겪으면 이렇게 장르가 바뀌어 버릴 수 있는 건가요?

혹시 <테라리움 어드벤처>가 개발 단계에서 동양 판타지였다가 기획이 엎어지기라도 한 거 아냐?

애초에 드루이드가 아니라 무당이 요괴들과 함께 모험을 하는 거지.

음… 제법 그럴싸한 생각이야.

딴생각으로 흘러가 버린 날 바라보던 노파가 이내 입을 열었다.

“어느 날 한 드라이어드가 동굴을 찾아왔다네.”

주인 없이 떠도는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였다.

이미 터전을 잡고 있는 군락지가 있었지만 드라이어드는 어쩐지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의 왕은 기꺼이 오래 머물다 가도 좋다고 허락했지.”

시간이 멈춘 탓에 군락지에 갇혀 버린 드라이어드들은 밖에서 찾아온 그 드라이어드가 몹시 반가웠다.

“어느 날부턴가 그 드라이어드가 군락지 밖에서 사람의 아이들을 데려오더군.”

인적이 드문 곳이라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런데 보살펴야 할 묘목처럼 작은 아이들이 하나둘 나타나니 조용했던 군락지엔 금방 활기가 가득 찼다.

그 아이들이 드루이드건 아니건 상관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대신 아이들에게 드라이어드의 방식을 가르쳤고, 아이들은 그들에게 묘목처럼 길러졌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곳이지만 아이들은 성장했고, 그 모습을 보는 것이 군락지 드라이어드들의 큰 즐거움이었다.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이 그 장소에서 유일하게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군락지의 드라이어드들은 그 모습에서 희망을 갖게 되었다.

어쩌면 시간이 멈춰 버린 곳에서 지금처럼 이변을 일으키다 보면 뒤틀린 기운이 모두 풀려 자유가 될 것이라고.

“우린 혹시나 그 드라이어드가 민가에 내려가 멋대로 아이들을 데려오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었다네. 그건 아주 크나큰 문제가 될 수 있거든. 하지만 아무리 연유를 물어도 그 드라이어드는 미소만 지을 뿐 답을 알려 주지 않았지.”

하지만 오래지 않아 아이들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군락지의 드라이어드들이 기억하는 것과 달리, 바깥세상은 아주 피폐해졌다.

예전처럼 평화롭고 풍족한 세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먹고살기 힘들게 되자 아이를 버리는 부모가 늘어났다.

특히나 어려서부터 드루이드의 기운을 보이지 않는 아이들은 더욱 쉽게 버려졌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다시 집에 찾아올 수 없도록 일부러 마을에서 멀리 떨어지고 외진 동굴에 버렸다.

유일하게 동굴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던 그 드라이어드가 동굴 입구에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온 것이다.

동굴 근처에서 회양목으로 만들어진 이름표가 발견되었던 것을 보면… 어쩌면 외부에서 찾아온 그 드라이어드의 정체는 회양목 드라이어드가 분명했다.

“더 이상 동굴 입구에 버려지는 아이들이 없어졌을 때, 그 드라이어드는 이젠 자신이 떠날 때라고 했지. 그는 이곳처럼 세상 어딘가에 여전히 부모에게 버려지는 아이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네. 그 아이들을 찾아 거두고 보살펴 주기 위해 떠나야 한다고 했지. 그 드라이어드는 무언가와 싸우는 것 외에도 그러한 행동들이 세상을 이롭게 만든다고 말했다네.”

그렇다면… 시들링이 회양목 드라이어드를 만난 것은 그 이후구나.

회양목 드라이어드는 떠나기 전, 군락지에 방문했을 때부터 키웠던 자신의 모체를 그대로 남겼다.

그리고 자신이 떠난 후에도 버려지는 아이들이 있다면 동굴 안으로 향하는 이정표를 만들어 둘 테니, 군락지의 드라이어드들이 기꺼이 아이들을 거둬 자신의 모체를 이용해 이름표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군락지의 왕은 자신들에게 희망을 선사해 준 회양목 드라이어드가 몹시 고마웠고 그의 어진 마음씨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남긴 거대한 모체를 군락지를 수호하는 신물처럼 여기며, 그의 의지를 이어 남은 고아들을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여기까지만 들어 보면 더없이 아름다운 동화의 내용이었다.

“다 자란 후 사회에 나가 활동하던 아이들은 가끔 우리의 군락지를 고향이라 생각해 자주 방문했었다네. 그런데 좋지 않은 의도를 품은 자들에게 뒤를 밟혔지.”

거기까지였다.

난데없이 돌담이 큰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이야기가 뚝 끊겨 버렸다.

“여기 숨어 있었군. 네 이놈! 그 도끼는…!”

망령이 숨어 있던 우릴 찾아낸 것이다.

노파의 말처럼 사연이 있는 도끼가 맞는지, 내가 들고 있는 낡은 도끼를 알아본 남자는 크게 분노했다.

뻥 뚫린 검은 두 눈은 쳐다보기만 해도 무서워서 난 이미 진 거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도끼를 습득한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억울하긴 한데, 설명해 봤자 들어줄 것 같은 분위기도 아니었다.

망령은 날 공격할 셈인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쥐었다.

“도끼만 봐도 기억에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못 한다고 안 했어요?”

도끼를 겁내기는커녕 화만 더 키운 거 같은데요!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저 도끼만 갖다 두면 되겠지.”

그렇다면 도끼로 공격하라는 거겠지….

부웅!

어차피 장기전으로 가면 내 밑천이 드러나니 지는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이럴 땐 선빵이다.

있는 힘껏 도끼를 휘둘렀으나 내 회심의 일격은 아주 쉽게 막혔다.

민첩이 떨어져서 날렵함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대로 반격이 들어오면 위험했지만 도끼에 확실히 뭔가 있긴 한 건지, 망령이 멈칫했다.

드드드득.

갑자기 딛고 선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놀랍게도 거무죽죽한 나무뿌리들이 뱀처럼 흐물거리며 기어 오고 있었다.

내가 봤던 거대한 나무의 뿌리가 분명했다.

이미 죽어 버린 나무가 어떻게 한참을 떨어진 곳에서 여기까지 뿌리를 뻗을 수 있나 의문이 들었지만, 애초에 그것은 나무의 형태를 한 괴물이었다.

그렇다면 이 괴현상도 저 망령의 짓인 건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뿌리는 내 발목을 잡아챌 것처럼 꾸물거렸다.

기겁하며 도끼로 하나하나 내리 끊었다.

그때마다 찢어질 듯한 소리가 머릿속을 징징 울렸다.

“혹시 저 드라이어드가 과거에 특성이 뭐였는지도 기억 안 나요? 공격형? 아니면 지원형? 그것도 기억 안 나요? 만약 공격형이면 저 답 없어요!”

드라이어드 흉내를 낸다면 특성까지 따라갈 것이 분명한데, 데이지처럼 줄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공격형이라면 난 정말 승산이 없었다.

도끼로 내려찍는 것은 온몸을 전부 이용해야 해서 죽을 맛이었다.

달려드는 뿌리를 열심히 도끼로 찍어 내며 질문했으나 노파에게선 답이 없었다.

“뭐야? 혼자 도망간 거야? 나를 사지에 던져 놓고 혼자 도망가면 어떡해!”

뿌리는 아무리 찍어도 끝이 없었다.

단단하기는 또 오죽 단단해서 잘 끊어지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도끼날이 그렇게 날카롭지 않았다.

“사기꾼! 도끼로 공격하면 통한다며! 안 통하잖아요!”

믿었는데! 아이들과 한패였던 거 아냐?

결국 뿌리의 기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다리 한쪽이 붙잡혔다.

“악!”

뿌리는 인형 뽑기 기계처럼 내 다리를 붙잡은 채로 허공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와중에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도끼를 휘둘렀다.

쾅!

아… 어깨 나간 거 아니겠지? 등이 박살 난 거 같은데….

난 허공에 들린 상태로 공처럼 멀리 던져졌다.

온몸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고 통증에 손가락도 까딱할 수 없었다.

만화처럼 뿌연 흙먼지 사이에서 옷을 털며 일어나기엔 난 벌써 HP가 90%는 깎인 기분이라 불가능했다.

하필이면 신체를 보호해 줄 장비도 하나 챙겨 입지 못한 채 직격타를 맞았다.

근육이 놀라서 온몸이 덜덜 떨렸다.

머리부터 떨어졌으면 뇌진탕이 일어날 수도 있을 충격이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뼈가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시발… 공격형인가?”

정체도 모르는 망령 드라이어드를 상태로 대체 어떻게 싸우란 말이야….

현기증이 이는지 시야가 조금 가물거렸다.

부디 다음 공격은 제발 늦게 오기를 빌고 또 빌었다.

이대로 방금과 같은 공격을 한 번 더 당하면 기절할 텐데….

저벅저벅.

스스슥.

하지만 애석하게도 땅을 걷고 기는 소리는 내가 처박힌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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