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3화 (303/604)

말을 듣다 보니 문득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멸망한 세상이 어떻게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있는 걸까?

내가 봐 온 이 세계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삶을 살아가고 푸른 초목과 꽃들의 군락지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비록 불의 침입으로 인해 곳곳에 재앙이 일어나고 있긴 했지만….

내가 상상하는 멸망의 이미지와 많이 다르긴 했다.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나 은둔자의 정원의 벽화에 남겨진 내용이 아니었다면 멸망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을 정도였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잘 굴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서 대체 멸망의 여파는 어디에 있는 건가?

그 질문의 답 중 하나가 이곳에 있었다.

자연의 이치가 깨진 결과로 인해 시간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장소.

아주 오래전의 시간이 고여 있던 와중 무언가의 개입으로 완전히 뒤틀려 버린 곳.

“잘못된 원념은 뭐야?”

“그것은…. 그것은….”

여태 잘 말해 왔던 아이가 갑자기 고장 난 스피커처럼 굴기 시작했다.

쩌적.

“너…! 팔이 왜 그래?”

다소곳이 앉아 무릎에 올려 두었던 아이의 두 손이 유리처럼 금이 가 깨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저히 살아 있는 생명에게서 나타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이는 제 팔이 깨져서 파편이 떨어져도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반발 작용입니다. 저희가 알아선 안 될 부분을 입에 담았기 때문에 뒤틀리는 중입니다.”

그러다 얼굴에도 금이 가기 시작하자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아이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드라이어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드라이어드가 아닙니다. 지금 저희의 모습은 다른 이의 모습이 뭉쳐서 빚어진 결과입니다. 즉, 사실 저희도 존재해선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아이가 없다고 했던 말의 뜻은… 설마….”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이곳에 진실로 존재하는 아이는 없는 것은 물론… 정상적인 것 역시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대체… 내가 해야 할 일이 뭐야?”

아이들은 반발을 참아 내면서까지 내게 설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몸에 균열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세요. 뒤틀리고 꼬인 흐름이 정상적으로 흘러가게 풀어 주세요. 이대로 계속 놓아둔다면 이곳을 방문한 죄 없는 사람들이 휘말려 함께 뒤틀릴 뿐입니다. 그건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그 누구도 특정 지을 수 없는 불확실한 상태입니다. 어찌 생명의 삶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가 생사 여부도 알 수 없게 행방불명된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 역시 기이하게 변해 버린 동굴에 휩쓸렸던 것이다.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

“작금의 상태를 쉽게 규정하자면 꼬인 실타래나 잘못 맞춘 그림 조각판으로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꼬인 실타래를 푸는 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가장 처음의 실을 찾으면 됩니다. 그림 조각 역시 올바른 틀을 먼저….”

투두둑.

그때 아이의 팔 한쪽이 뚝 떨어져 내리더니 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너희…!”

“…….”

“…….”

아이들은 갑자기 건전지가 떨어진 인형처럼 뚝 멈춰 버렸다.

그러곤 차례차례 온몸이 조각나 떨어져 가루가 될 동안… 더 이상 어떠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렇게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초롱의 불빛만 일렁이는 어두운 방 안에 다시 나만 덩그러니 남겨지게 되었다.

아이들이 사라지던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라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뚜벅뚜벅.

하지만 오랫동안 멍을 때릴 순 없었다.

문 너머로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쩌면 아이들 이전에 이곳을 방문했던 기이한 남성일 수도 있었다.

아이들은 내게 호의적이었지만, 이곳은 뒤틀리고 꼬인 곳이라고 했었다.

정상적인 곳이 아니기에 마냥 그에게도 같은 호의를 기대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롱을 챙겨 황급히 병풍 뒤에 숨으려는데 주머니가 없어 옷고름에 대충 끼워 두었던 붉은 실타래가 툭 떨어졌다.

하지만 다시 줍기엔 발소리가 너무 가까워서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초롱만 치마 속에 숨긴 채로 자리를 피했다.

창호지를 바른 문이 활짝 열리고 등장한 자의 정체는 예상했던 대로 그 관복을 입은 남자였다.

난 떨어뜨린 실타래가 신경 쓰여 혹시라도 들킬까 봐 입을 틀어막고 조용히 숨을 죽였다.

이전엔 방을 잠시 머물다 떠났던 그 남자가 이번엔 꽤 오래 방에 머물고 있었다.

언제 나갈까? 나가자마자 실타래를 챙겨야지. 빨리 나갔으면 좋겠는데.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을 좋게 만드는구나….”

소름이 돋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병풍 뒤에 숨어 있어도 귀신같이 알아차렸던 아이들처럼, 그 역시 내 기척을 알아차리고 말을 건 줄 알았는데 다행히 혼잣말이었다.

스르륵… 텁.

가벼운 천 같은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옷을 벗은 거야? 이어서 그가 바닥에 눕는 기척 역시 느껴졌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기색이었다.

덕분에 병풍 뒤에 쭈그려 앉은 내 상태만 애매해졌다.

금방 방을 나갈 줄 알았는데… 여기서 잠을 잔다고? 그럼 난 어떡해?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잠에 들어 내뱉는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완전히 이곳에 오도 가도 못하고 갇혀 버렸다.

속으로 천천히 수를 세다가 슬쩍 병풍 옆으로 고개를 빼고 상황을 살폈다.

정체불명의 남자는 어느덧 생긴 이부자리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고, 애타게 찾던 실타래는 의복 아래로 묻혀 버린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조심히 빠져나가면 괜찮을까 싶어서 굳은 몸을 달래 움직이는데….

“으음….”

난데없는 잠꼬대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멈췄다.

왜 잠을 자는데…. 이곳엔 정상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놈이 하나 없다면서 왜 잠을 자는데!

잠깐, 그렇다면 혹시 저 남자도 아이들과 같은 존재일까?

드라이어드였으나 지금은 드라이어드가 아닌 존재.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어떤 드라이어드였는지 묻지 못했네.

혹시 저 남자도 아이들과 같은 종의 드라이어드인 걸까?

그런데 분명 좀 전에 혼잣말로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고 했었지?

“이곳에 아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쌍둥이 같던 아이들은 자신들도 아이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확고하게 이곳에는 아이가 없다 말했다.

마치 아이들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저 남자와는 인식의 차이가 있었다.

꼬인 실타래에서 가장 처음의 실을 찾으라고 했지.

혹시… 어쩌면 저 남자가 그 ‘처음의 실’이 아닐까? 아니면 내게 초롱과 실타래를 주었던 그 노파일 수도… 내가 술래라며 뛰어가 버렸던 아이일 수도 있었다.

온통 수수께끼였다.

지혜를 빌릴 메스키트도, 경험을 빌릴 이리스와 시들링도 곁에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모두들 정말 보고 싶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남자가 깨기만을 기다리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린 것이 분명했다.

차디찬 벽에 등을 기댄 채 불편하게 잠을 잔 탓인지 온몸이 찌뿌둥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뜬 눈으로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혹시 내가 코를 골거나 잠꼬대를 한 건 아니겠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슬쩍 눈만 내밀어 방 안을 살폈다.

“어? 어디 갔어?”

잠을 자고 있던 남자가 또다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체 언제부터 없었던 걸까?

당장 눈앞에 놓인 단서가 의문의 남자라서 몰래 뒤라도 밟아 볼까 생각했었는데 이미 떠나 버렸다니.

그것도 내가 깜박 잠드는 바람에!

설마 이대로 다시 그가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또 병풍 뒤에 쭈그려 앉아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 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까만 바닥을 가로지른 이질적인 것이 눈에 띄었다.

노파가 내게 건넸던 붉은 실타래였다.

아니, 정확히는 실타래에서 둘둘 풀려나와 문밖으로 길게 흔적처럼 이어진 붉은 실이었다.

주운 실타래엔 구멍에 실이 꿰인 채로 함께 꽂혀 있던 바늘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옷이 실타래 위를 덮었었는데 그때 빠진 건가?

그렇다면 길게 풀린 이 실이….

바닥에 놓인 실을 주워 감으며 그 행적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붉은 실은 남자가 지나쳤을 법한 모든 경로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자신의 옷에 바늘이 꽂혀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가?

아니 그것보다… 실의 길이가 대체 어느 정도길래 관아 같은 건물을 나와 한참을 걷는데도 끝이 없어?

실을 따라 걷다 보니 문득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이 역시 동화에서 본 적이 있던 소재였다.

밤마다 몰래 찾아오는 동자의 정체를 밝히고자 소매에 실을 꿴 바늘을 꽂아 놨더니 지금처럼 실이 풀려 길게 꼬리를 늘어뜨려 놨다고 했었지.

마침내 찾아낸 실 끝엔 잎사귀에 바늘이 꽂힌 산삼이 있었다고 했던가? 아니 무덤이었던가?

그렇다면 내가 따라가는 실 끝엔 대체 뭐가 있을까?

무덤이면… 많이 무서울 것 같은데.

남자는 옷 어딘가에 바늘을 꽂고도 어찌나 잘 돌아다녔는지… 마을 구석구석에 맵에 표시라도 해 둔 것처럼 길게 줄이 남아 있었다.

청사초롱 안의 불은 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는데, 이 신비한 초롱처럼 붉은 실도 뭔가 특별한 힘이 담겨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정도는 도무지 한 개의 실타래로 커버 가능한 수준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실만 쫓아 걸었을까.

드디어 그 끝을 발견했다.

“어…? 설마 나무?”

건물과 사람의 형태를 띤 무언가를 제외하고 식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동굴 벽 한쪽에 등을 대고 가지가 빼곡할 정도로 거대하게 자란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생기를 잃은 것처럼 거무죽죽한 기둥과 줄기, 단 한 장도 붙어 있지 않은 나뭇잎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붉은 실은 그 나무의 뿌리에서 끊겼다.

남자를 찾아 쫓아왔는데 나무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런데 이 나무….

“꼭 앨리스가 동굴에서 발견했다던 거대한 나무 같네?”

놀랍게도 동굴 안엔 거대한 나무도 자라고 있었어요. 나무는 앨리스가 살아온 시간의 몇 배나 되는 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자란 것처럼 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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