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이 세계에서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지낸 시간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지만, 곁에 없으니 큰 상실감과 허전함만이 나를 가득 채웠다.
일말의 용기도 남지 않은 상태라 꼼짝도 할 수 없었고, 머릿속은 아무 생각 없이 텅 비어 버려 고장 난 인형이 된 기분이다.
무서워서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애써 난 어른이니 참아야 된다는 의지 하나로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긴 대체 어딜까? 동굴 속은 맞는 걸까? 아니 <테라리움 어드벤처> 게임 속은 맞을까?
그래도 방금 전 드라이어드를 만났으니 게임 속은 맞겠지….
꿀꺽, 침 넘기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주변이 너무 고요했다.
그렇다면… 어쩌면 특별한 이벤트가 진행 중인 건 아닐까?
게임엔 가끔 장비와 스킬이 고정되거나 바뀐 채 강제로 스토리를 진행해야 하는 요소들이 있으니까.
그래, 맞아. 롤플레잉 게임이니까 그런 요소들이 있을 수도 있지.
게임에 빗대어 내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다 보니 점차 두려움이 사라지고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난 지금 인스턴스 존(instance zone) 안일지도 몰라.
다른 길드원들이 보이지 않는 건 각기 다른 존으로 끌려 들어가서 그런 걸 수도 있어.
같은 필드라 하더라도 파티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건 게임 속에서 여러 번 경험해 봤잖아?
“어차피 게임 속이니까.”
그 한마디는 내게 다시금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빨리 클리어하고 나가지 뭐.
드디어 바뀐 룩과 주변을 신기해하며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나 참 한복이라니…. 명절 때도 안 입어 봤는데.”
긴 치마 아래로 삐죽 나온 버선을 이리저리 구경해 보고 옷고름도 한 번 만져 보다가, 손에 든 청사초롱으로 앞을 밝히며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대부분 사람들이 살았던 것처럼 보이는 민가였지만 딱 하나 다른 건물이 있었다.
크기도 다른 건물에 비해 배는 크고 외관도 다른 곳.
현판이 걸려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순 없으나 각종 매체에서 접해 봤던 관아, 특히 포도청이 연상되는 건물이었다.
왠지 문을 열면 관복을 입은 사또가 있을 것 같은 그런 곳 말이다.
그나마 단서를 얻는다면 그곳에서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다른 곳을 제쳐 두고 우선 탐방해 보기로 했다.
굳게 닫힌 거대한 나무 문을 밀자 의외로 쉽게 열렸다.
까맣게 흙먼지가 내려앉은 넓은 마당엔 스산함이 가득했다.
“계세요?”
기대했던 것과 달리 마루 정중앙에 위엄 있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또는 없었다.
오히려 귀신이나 안 나오면 다행이었다.
대체 어디로 죄다 숨어 버린 건지 색동 한복을 입은 아이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끼익.
“아씨, 놀라라.”
몸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문을 더욱 밀다가 기분 나쁜 마찰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직까지 건물 안에 들어갈 용기까진 나지 않아서 넓은 마당만 빙 둘러보며 이리저리 구경했다.
하지만 딱히 소득도 없고 하릴없이 시간만 흐르자 급한 성미가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에잇, 차라리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언제까지 뭐가 나올지 전전긍긍하며 애만 태울 거야!
솔직히 날 지켜 줄 드라이어드들도 없는 상태에서 이 이상 내가 뭘 더 할 수 있겠어.
한시바삐 여기서 벗어나려면 발로 뛰고 머리라도 굴려야지.
뭐가 튀어나온다면 들고 있던 초롱으로라도 후려칠 마음으로 손잡이를 꾹 쥔 채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사이드의 다른 건물들은 미뤄 두고 우선 중앙의 거대한 건물을 목표 삼았다.
낮은 계단을 오르고 마루 위에 발을 딛자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로운 소리를 내며 발을 디딘 곳이 움푹 팼다.
하지만 다행히 체중을 실어도 무너지진 않았다.
송송 구멍이 뚫린 창호지 문을 열자 날 따라온 초롱의 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넓은 방 안이 한눈에 담기면서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병풍과 먼지가 쌓인 낮은 탁상이 보였다.
“와… 민속촌 세트장 체험하는 기분이야.”
왠지 관복을 입은 마네킹을 탁상 앞에 두면 풍경이 완성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휘적휘적 걸어가 뭐라도 건질 것이 없나 도둑처럼 이리저리 뒤져 보았다.
하지만 방 안에선 서책은커녕 살림살이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위기 시 무기로 쓸 뾰족한 물건이라도 건졌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를 발견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장소일 거라는 예상을 빗나가자 허탈해졌다.
결국 있는 건물들을 죄다 뒤져 봐야 하는 걸까?
막막한 심정으로 털썩 주저앉으니 엉덩이에 차가운 한기가 스며들었다.
다들 뭘 하고 있을까? 나처럼 건물 안을 뒤져 보고 있을까?
드라이어드들은 잘 있겠지?
아티팩트와 핸드폰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거람.
내게 청사초롱과 실타래를 쥐여 준 드라이어드는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이건 대체 어떤 드라이어드의 능력인 걸까?
“에휴….”
한숨을 쉬고 다른 건물들이라도 뒤져 볼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렸다.
너무 놀라서 대뜸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정체불명의 누군가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다 황급히 병풍 뒤로 몸을 숨기고 청사초롱을 치마 안에 넣어 불빛을 가렸다.
귀신? 드라이어드? 사람? 나 말고 이곳에 누가 있는 거지?
병풍 옆으로 슬쩍 눈만 내밀고 상황을 살폈다.
들어오면서 닫았던 창호지 문이 활짝 열리고 누군가 스산한 바람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엥? 사또?
내가 너무 상황에 심취했던 탓일까?
정말로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 관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다만 아직까지 사람인지 귀신인지, 그것도 아니면 드라이어드인지 정확한 정체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곳의 주인처럼 보이는 남자는 자연스럽게 방 안에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내가 이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들키면 어떻게 될까? 나가서 도와 달라고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걸까? 혹시 멋대로 침입했다고 공격하는 건 아닐까?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고민하며 숨도 조심히 쉬고 있는데, 잠깐 눈을 뗀 사이 그는 홀연히 사라져 버린 후였다.
시발… 진짜 귀신이었나?
다시금 애써 이곳은 게임 안일 뿐이라며 다스려 놨던 공포가 스멀스멀 날 잠식해 오고 있었다.
남자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병풍 뒤에서 끙끙 앓고만 있는데, 사박사박 기이한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남자가 사라지고 나서 나가는 발소리를 들었나?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시 들어오는 발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었지.
그럼 이 소리의 정체는 대체 뭔데?
나무아미타불… 하늘에 계신 아버지…. 천지신명 어쩌고…. 아니, 이 세계의 신은 세계수니까 세계수에게 빌어야 하나?
온갖 신을 다 찾으며 덜덜 떨고 있는데 기이한 소리가 딱 멈췄다.
“거기 계신 것 압니다.”
그리고 앳된 목소리가 병풍 너머로 들려왔다.
없는 척… 아무도 없는 척….
확실히 남성의 목소리는 아니었고 더구나 한 명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어질고 선량하신 분이시여… 부디 저흴 도와주세요.”
“…….”
“그 뒤에 숨어 계신 거 알아요.”
“…….”
“저흰 이야기를 들어줄 때까지 여기서 꼼짝도 하지 않을 거예요.”
들켰네.
슬쩍 병풍 옆으로 눈만 내밀었다가 방 안에 앉아 있는 누군가와 딱 눈이 마주쳤다.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건가요?”
“아씨….”
날 부른 목소리의 정체는 색동 한복을 입은 여자아이 둘이었다.
이미 들킨 마당에 꼴사납게 계속 숨어 있을 순 없어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쌍둥이라고 해도 될 만큼 서로 똑같이 닮은 아이들이었다.
“너희 대체 내게 왜 그러는 거야? 계속 주변을 맴돌며 웃음소리를 내지 않나, 목소리를 흉내 내서 날 속여 먹으려고 했던 것도 너희들이지?”
내 말에 아이들은 서로를 한 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을 겪으셨는지 대강 예상은 가나 저희가 벌인 일은 아닙니다.”
“그럼 너희 말고 다른 애들이란 거야?”
아이들은 다소곳이 탁상 반대편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기에 나도 탁상 앞으로 가서 앉았다.
꼭 원님이 되어 밤늦게 찾아온 원령들을 맞이하는 모양새다.
눈앞의 아이들은 그나마 날 보며 꺄르르 웃어 재끼기만 하던 아이들과 달리 말이 통할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아니요, 아이는 아닙니다. 이곳에 아이는 없습니다.”
뭐? 그럼 내가 봤던 아이들은 뭔데?
“그럼… 너희들은 뭔데?”
“궁금하신 것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대신 저희를 도와주세요.”
처음 만났을 때의 바곳과 같은 또래처럼 보이는 아이들은 생긴 것과 달리 의젓하고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갔다.
“나도 당장 도움이 필요한 입장인 마당에 너희를 어떻게 도울 수 있는데?”
“외부에서 온 자들 중 이곳에서 정신을 잃지 않고 자연스럽게 활동할 수 있었던 자는 당신뿐입니다.”
정신을 잃어? 설마 길드원들이 어딘가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는 걸까?
“당신이야말로 저희가 오랫동안 기다려 오던…. 저희를 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날 기다렸다고…?
“여기까지 분명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왔었는데 다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
“행방은 저희들도 모르지만 이곳에 걸린 기이한 저주가 풀린다면 만날 수 있으실 겁니다.”
“저주가 걸렸다고?”
이곳에 저주가 걸려 있단 말에 섬뜩해졌다.
“내가 귀신 쫓고 악령 퇴치하는… 그런 일은 못 하는데….”
내가 무당도 아니고 말이지.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께 무언가 특별한 힘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본래 이곳은 더 이상 존재해선 안 되는 곳입니다.”
“알아듣게 설명해 줄래? 그리고 너희는 대체 정체가 뭐야?”
“저흰 본래 드라이어드였습니다.”
과거형?
“먼 옛날… 세계는 한 번 멸망했습니다.”
그 말에 필드의 가디언을 모두 모았던 드루이드의 전설이 떠올랐다.
은둔자의 정원에 있던 벽화를 통해 확인했던 먼 옛날의 이야기.
자신의 드루이드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 고대의 힘을 사용했고 균형을 이루던 자연의 이치가 모두 깨져 세상에 멸망이 닥쳤다고 했었다.
“그리고 이곳은 세계가 멸망하기 전부터 존재하던 곳입니다.”
은둔자의 정원이 만들어졌을 때와 같은 시기를 공유하는 장소인 건가?
“저희는… 아니 세계는 아주 오랫동안 단 한 분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더라도 금방 적응하실 수 있도록, 세계는 그분께 친숙한 모습으로 단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분은 나타나지 않으셨고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습니다. 때를 잘못 잡았거나 인연이 끊겼던 거겠지요.”
“대체 그분이 누군데?”
“위대하신 분이란 사실만 알 뿐 저희도 모릅니다. 그저 세계가 한마음 한뜻으로 기다리니 세계에 속한 저희도 기다렸을 뿐입니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그분이 오시지 않았으므로 저희의 시간은 그때 끝났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다음 세대가 다시금 그분을 기다리고 맞이할 준비를 하며 흘러가야 했지요. 하지만 갑자기 자연의 이치가 완전히 깨져 버리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곳의 시간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의 시간이 멈췄다는 거야?”
“단순히 시간이 멈춘 것이 아니라 뒤죽박죽 섞여 버렸습니다. 이치가 깨졌으니 완전히 무(無)로 화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균형을 갖춰야만 했는데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됐습니다. 조각이 군데군데 빠져 원형을 잃은 그림 조각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 빈 곳을 잘못된 원념이 섞여 들어 메꾸게 되자, 처음과 완전히 다른 그림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곳은 세계가 멸망할 때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의 멸망을 겪으며 완전히 뒤틀리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아이의 얼굴은 원통, 슬픔, 좌절 같은 어두운 감정이 한 데 섞여 잔뜩 일그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