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1화 (301/604)

난 차분히 내가 통로 안에서 겪었던 일들을 말해 주었다.

“귀신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거였나요?”

“와… 소름 끼친다. 나라면 비명을 질렀을 거야. 그런 일을 겪고도 돌을 찾아내다니… 언니, 담력 진짜 세다.”

이쯤 되니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왜 나만…?

내가 들어간 통로가 하필 하드 난이도였던 걸까?

아니면 나만 골라서 작정하고 장난을 친 걸까?

“차라리… 파훼법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던 제가 걸려서 다행이에요.”

의심스럽긴 한데 시련들은 전래 동화의 내용과 꽤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공략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전래 동화인 걸까?

여긴… 판타지 게임 속 세계 아냐?

물론 테라리움 어드벤처가 한국 게임사에서 만들어진 게임이긴 하지만… 조금 배경이 안 맞지 않나?

“저라면 의심도 못 하고 바로 뒤를 돌아봤을 거예요.”

“제퍼는 이리스가 부르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건디…. 그것보다 온갖 태양의 보석이 나오던 웅덩이라… 욕심나는디.”

“난 무서워서 뒤는 못 돌아보고 질문엔 답했을 거 같아.”

이리스와 제퍼는 소금상 구간에서 리타이어…. 헤르마는 웅덩이에서, 로웰라는 질문 구간에서 각각 리타이어였다.

그렇다면 시들링은 과연 어디서 탈락했을까?

“어? 그러고 보니 주위가 상당히 밝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이리스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 정말 그렇네.”

그녀의 말처럼 조명등의 범위가 미치지 않는 곳도 어느 정도 윤곽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밝기가 올라갔다.

한 치 앞도 모를 정도로 어두웠던 통로에 비하면 그냥 대낮인 수준이었다.

가까운 곳에 광원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런 동굴 속에 있는 광원이라 하면 대체 무엇일까?

우린 통로 바로 밖에 존재하고 있는 거대한 수정 바위를 깨끗하게 닦은 후 앞으로 나아갔다.

“제이 님이 겪었다는 이상한 현상이 다시 우릴 노리지 않을까요?”

“뭐… 그렇다면 무슨 소리가 들려도 뒤를 돌아보지 말고 질문이라면 답하지 마세요.”

“근데 마스터님도 방금 이리스의 질문에 바로 답하셨잖아요. 속임수면 어쩔 뻔하셨어요?”

제퍼는 그렇게 말하며 낄낄 웃었다.

으휴, 직접 당해 봐야 그 무서움을 알지. 그래도 지금은 이리스의 입이 움직이고 있잖아.

“어휴, 내가 바로 옆에서 말하고 있잖아. 멍청아.”

“앗, 이리스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나 봐요. 제게 멍청이라니.”

“널 멍청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이리스가 분명하다.”

길드원들의 수다가 주변을 채우니 마음이 한껏 평온해진다.

다들 통로를 해치고 나왔다는 뿌듯함 때문인지 막 동굴에 진입했을 때와 달리 긴장을 어느 정도 푼 상태였다.

반짝.

그때 시야가 간신히 닿는 곳에서 무언가 깜박이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워낙 순식간이라 고개를 돌려 확인했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반짝. 조명등의 빛은 저렇게 강렬하게 일순간 훅 타오를 수 없었다.

벽면에 유리나 거울 같은 것이 박혀 있다가 빛을 받아 반사되는 것과 같은 반짝임이 틈틈이 날 거슬리게 만들었다.

길드원들에게 이를 말해 보려는데 갑자기 앞에 희뿌연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안개라고?”

혹시 무언가 공격의 조짐인 걸까?

우린 다시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을 경계하며 아주 천천히 안개 속으로 이동했다.

감이 예민한 드라이어드들이 앞장서 한참을 안개를 뚫다가 멈춰 섰다.

“앞에 굉장히 넓은 공간이 있습니다.”

우린 한참이나 동굴 안으로 들어갔었다. 지금쯤이라면 뭔가 나올 때가 됐긴 하지.

장막처럼 우릴 가로막던 안개가 천천히 걷히고…. 눈앞에 나타난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하늘에서 무대 조명처럼 여러 갈래로 떨어지는 햇빛이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놀랍게도 천장은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동굴 안까지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덕분에 넓은 공간 안이 한눈에 훤히 보였다.

“세상에… 여긴 대체….”

길드원들도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이런 곳에… 마을이 있는 거죠?”

“동굴 안에 집이 있어…. 뭔가 은둔자의 정원에서 봤던 것보다 더 신비한 느낌이 들어.”

다들 빛에 모습을 드러낸 동굴 속 건물들에 대해 놀라워했다.

물론 놀랄 만했다.

하지만 난 좀 더 다른 포인트에서 경악에 가까운 비명을 속으로만 삼켜야 했다.

기와집이… 왜 여기 있어?

여태 이 세계에서 봤던, 나무판자를 지붕으로 올리거나 아예 지붕 없이 직사각형이었던 건물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역사책이나 사극 등 다양한 매체에서 접했고 한옥 마을을 방문했을 때나 볼 수 있었던 기와집이 동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검은 기와, 나무 기둥, 흙을 펴 발라 만든 벽, 유리 대신 창호지가 자리한 문, 나무 마루와 돌담까지.

건물을 지은 후 상당히 세월이 많이 흘렀는지 지붕과 마루가 다 무너지고 기둥은 썩어 문드러졌으며 벽이 허물어졌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폐가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비록 뼈대만 남아 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고유의 형식으로 지어진 집을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단순히 동양 테마의 건물이 아닌 진짜 한옥이었다.

가끔 게임들이 세계관 확장을 위한 업데이트로 무리하게 동양풍 세계관을 끌어오긴 하는데… <테라리움 어드벤처>엔 너무 뜬금없는 설정 아닌가?

길드원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이리저리 구경 삼매경이었다.

다만 나는 머릿속에 충돌하는 아이러니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니… 이런 곳에서 내 세계의 흔적을 발견하니 너무 반갑고 기쁘긴 한데…. 이게 왜 여기 있냐고요….

“대체 어떤 사람들이 살던 곳일까요? 제이 님이 다녀왔다던 그 섬에도 이런 건물들이 있었나요?”

“아니야. 은둔자의 정원엔 토굴 같은 집이 있었어.”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날 대신해 로웰라가 이리스에게 설명해 주었다.

끼리릭.

어디선가 녹슨 철이 맞물려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지에서 노토스가 수정 바위를 건들고 있었는데 여태 봤던 바위들의 형태와 달라 보였다.

땅에 붙박여 바위의 형태를 취하던 것과 달리 노토스가 조작하고 있는 것은 위아래, 좌우로 움직일 수 있도록 기둥과 둥근 손잡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천장과 수정 바위를 번갈아 바라보며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마침내 어느 부분에서 조작을 멈추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빛이 노토스가 조작하고 있는 수정 바위를 정확히 비추기 시작했다.

그가 하려는 행동의 의미를 파악한 길드원들이 일제히 흩어져 비슷한 수정 바위를 찾았다.

다들 빛의 반사 경로를 잇기 위해 수정 바위를 조작하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빛은 막힘없이 쭉 뻗어 나가 우리가 지나쳐 왔던 곳의 모든 수정 바위에 도달했고 삽시간에 조명을 수백, 수천 개는 켠 것처럼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날 혼란스럽게 만든 한옥의 형태들도 더욱 자세히 모습을 드러냈다.

중앙에 ‘ㄷ’ 자 형태에 두 개의 나무 문을 가진 거대한 한옥을 중심으로 둥글게 집들이 자리를 잡아 골목을 형성하고 있었다.

솔직히… 한옥 마을에 놀러 온 기분이 들었다.

꺄르륵.

갑자기 들려온 어린아이의 웃음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항상 아득하게 들려오던 것과 달리 바로 옆에 아이들이 서 있듯 생생하게 들려 소름이 돋았다.

웃음은 바로 사라지지 않고 수를 늘려 어느덧 수십 명의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로 공간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번에는 다행히도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모두가 사방에서 정신없이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에 놀라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놀라 주위를 둘러보다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휙 숨어 버리는 어린아이의 형체를 발견했다.

“뭔데 대체….”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가 입었던 옷차림을 확인했던 나로서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기 시작했다.

아이는 분명… 꼬마 동자처럼 푸른색 색동한복을 입고 있었다.

“하하, 들켰다. 이제 네가 술래.”

그 순간 눈에 강한 통증이 덮쳐왔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린 것처럼 주위가 번쩍 빛에 휩싸였다 사라졌다.

그 잠깐의 장면 변화 사이 날 둘러싸고 지켜보고 있던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보였었다.

하나같이 알록달록 색동 한복 차림의 동자, 동녀들이었다.

검은 복건에 댕기 머리까지, 제대로 곱게 차려입었던 아이들은 내가 눈을 깜박이는 사이 금방 사라져 없어져 버렸다.

“방금 봤어요? 애들이….”

더불어 내 주위에 서 있던 길드원들마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더욱이 수정 바위를 제대로 조작해 대낮처럼 환했던 동굴이 어느새 칠흑처럼 어두워져 버렸다.

“뭐야… 다들 어디 갔어?”

마치 애초에 이곳에 도달한 사람은 나뿐인 것처럼 누구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장난치지 마.”

넓은 장소 안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내 목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심지어 내 드라이어드들의 모습까지 보이지 않았다.

“대체 다들 어디….”

부스럭.

몸을 움직일 때마다 뭔가 기묘한 기분이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놀랍게도 난 한복을 입고 있었다.

포르타가 만들어 준 장비는 온데간데없이 바스락거리는 붉은 한복 치마가 자리하고 있었다.

심지어 왼손에 착용하고 있던 테라리움 아티팩트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장비가 바뀐 탓에 주머니에 넣어 뒀던 폰도 없었다. 아무것도!

뭔가 잘못됐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이상한 장난 그만둬! 대체 뭐 하자는 거야!”

“화났다, 화났어!”

“야, 이 녀석들아!”

“도망가자! 도망가! 하하하.”

분명 정체모를 아이들이 장난을 치고 있단 생각에 잡아다 혼내 줄 생각에 달려가려 할 때였다.

“그만두게나. 저 아이들은 죄가 없다네.”

갑자기 훅 풍기는 쓴 약초 냄새와 함께 나이가 지긋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등이 굽은 할머니가 붉고 푸른 청사초롱을 들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초롱은 어둠을 밝히며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누구세요?”

“내가 보이는 겐가? 뭐, 당연하군. 이곳까지 당도한 데다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면 당연히 나도 볼 수 있겠지. 비틀린 시간을 뚫고 서 있는 자라…. 드디어 때가 된 것인가.”

“혹시 사람 맞아요?”

내 말에 한참을 뜸을 들이던 노파는 소름 끼치는 답을 했다.

“사람은 아니지.”

“그럼… 귀신이세요?”

“아니. 그것도 아닐세.”

“…그럼 드라이어드세요?”

그것도 아니면 그냥 기절할까?

“그렇다네.”

“아니 그럼 처음부터 드라이어드라고 말해 주면 좋았잖아요.”

무슨 드라이어드냐고, 이 기이한 현상들이 전부 드라이어드의 힘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대뜸 노파는 내게 청사초롱과 붉은 실이 둘둘 말린 채 바늘이 하나 꽂힌 실타래를 쥐여주더니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워낙 귀신처럼 증발해 버린 탓에 붙잡을 새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나 홀로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청사초롱만 허망하게 든 채 노파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만 남겨 두지 말라고…. 무섭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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