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으로 되돌아가는 길, 다시금 날 괴롭혔던 의문의 목소리가 슬슬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제희야, 어디 가?”
“제희야, 왜 이제야 왔어?”
여전히 내 지인들의 목소리를 흉내 낸 점은 같았다.
그러나 목소리들이 주절대는 내용이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제희야, 내가 길을 알려 줄까?”
한사코 내가 뒤를 돌아보도록 만들기 위해 현혹했던 내용들과 달리, 물음표 살인마가 죽어 귀신으로 떠도는지 쉴 새 없이 내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바라보길 원했던 방향을 똑바로 보며 걷고 있으니 패턴이 바뀐 걸까?
이번엔 대체 날 어떤 함정에 빠뜨리려는 걸까?
“제희야, 뭘 찾고 있는 거야?”
처음엔 무서웠지만 갈수록 내게 질문 세례를 퍼부으니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묵묵히 무시하려 노력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상한 돌을 얻었으니 괜찮을 거야. 이게 무슨 부적 같은 역할을 해 주겠지, 뭐.
“제이 님, 어디쯤이에요?”
“어, 이리스? 통로를 빠져나온 거예요?”
갑자기 들려온 이리스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답하고 말았다.
혹시 벌써 통로를 클리어하고 날 찾으러 온 건가?
하지만 이리스 대신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메스키트만 보였다. 설마….
꺄르륵.
뒤이어 갑자기 울려 퍼지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에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대답했다, 대답했어. 이제 하나.”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헙!”
황급히 두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아 비명을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제이?”
시발…. 패턴을 바꿔?
두피가 서늘해지고 쿵쾅대는 심장은 도무지 진정할 줄을 몰랐다.
방금 내가 자신들의 목소리에 대답하니까 좋아한 거 맞지? ‘이제 하나’라고? 일단 한 번은 봐주는 건가? 그럼 몇 번까지 괜찮은 거지?
“제이, 괜찮아요?”
나의 이상 행동을 알아차린 메스키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난 입을 막은 손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전엔 일부러 내 쪽에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꺼내 고비를 넘길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입을 나불대다가 나도 모르게 또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말을 하면 안 돼.’
영혼이 연결된 그녀에게 내 뜻이 전해지도록 집중하니 메스키트가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상한 방식으로 제이를 괴롭히네요.”
맞아, 아주 갈수록 도가 트는 느낌이다.
내가 살던 세계의 지인들의 목소리로 통하지 않으니 이리스까지 끌고 와?
더구나 날 ‘제희’가 아닌 ‘제이’로 부르며 방심하게 만들었다.
“제이 언니, 어디야?”
이젠 로웰라의 흉내까지 내시겠다? 한 번은 속았지, 두 번은 못 속인다.
“마스터,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
목소리는 흉내를 꽤 잘 냈다.
똑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도 있지만 각자가 날 부르는 호칭과 말투를 그대로 사용해 정말 내 주위에 그들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처음엔 뒤를 돌아보면 안 되더니 이젠 질문에 대답을 하면 안 된다라….
또 떠오르는 전래 동화가 하나 있긴 했다.
늦은 밤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를 위해 나무꾼은 의원이 살고 있는 마을로 약을 받으러 가야 했다.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으나 그곳은 도깨비와 귀신이 자주 출몰해 모두가 기피하고 특히나 밤늦게는 아무도 얼씬하지 않는 장소였다.
하지만 다른 길로 빙 돌아서 가기엔 너무 늦어 아이가 죽을 수도 있기에 나무꾼은 반드시 지름길로 가야만 했다.
어느덧 지름길에 다다랐을 때 그는 길 어귀에서 주저앉아 있는 한 노파를 발견했다.
노파는 출산이 임박한 딸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다리가 아파 움직일 수 없다며, 나무꾼에게 자신을 업고 길을 건너 줄 수 있는지 물었고, 나무꾼은 노파가 귀신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서웠지만 홀로 계신 제 어미가 떠올라 결국 노파의 청을 들어주었다.
지게에 노파를 지고 한참을 길을 건너는데 소문이 무성했던 귀신이나 도깨비는 보이지 않고 어느덧 샛길이 나타났다.
노파와 나무꾼은 가는 길이 달라 갈림길에 노파를 내려 주었고, 그녀는 감사의 표시로 나무꾼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 준다.
‘무슨 소리가 들리든 절대로 세 번 이상 답하지 말라.’
노파와 헤어지고 나무꾼이 겪게 된 상황이 지금의 나와 똑같았다.
나무꾼을 홀리기 위해 귀신과 도깨비들이 수도 없이 그에게 질문했다.
이야기에 따르면 실패 조건은 총 세 번,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두 번 남았으니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 테다.
“제이 님, 제가 재밌는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목소리는 정말 끈질기게 날 괴롭혔다.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은 그저 빨리 공동에서 나머지 돌 한 개를 찾아내 돌아가는 것뿐이란 생각이 들어, 걸음을 재촉했다.
뛸 듯이 걷는 내 속도에 맞춰 메스키트가 바짝 붙어 날 보호하듯 따라왔다.
그리고 마침내 소금상이 잔뜩 있던 공동에 도착했다.
내게 질문을 퍼붓던 목소리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간간이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래도 난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허리를 숙이고 공동의 가장자리부터 열심히 돌을 찾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이 또 어떤 패턴을 들고 올지 몰라…. 조심하자, 조심.
공동은 꽤 넓었기에 다른 드라이어드들도 아티팩트 밖으로 불러와 수색에 동참시켰다.
“정말 끔찍한 곳이야. 축축하고 햇빛 한 점 들지 않잖아? 풀 한 포기 못 자랄 정도로 꼴불견인 땅이란… 쯧.”
“내 진리, 내겐 진리가 햇빛이나 다름없어. 나도 진리의 햇빛이 될게. 혹시 추워? 그럼 내가 꼭 안아 줄까?”
엘더와 마거리트는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쉴 새 없이 쫑알대며 오디오를 채웠다.
그러자 분위기가 어쩐지 따뜻하게 풀려서 이제야 살 것만 같다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만 둘은 떠들어 대는 만큼의 작업 능력은 보여 주지 못했다.
엘더는 투덜대기 바빴고 마거리트는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내 주변을 돌며 치근덕거리기 바빴다.
둘 다 묵묵히 땅을 스캔하며 뛰어다니는 데이지와, 비록 수색 영역이 데이지보단 넓지 못하지만 사뿐사뿐 걸음을 내디디며 땅을 훑고 있는 바곳을 보고 배웠으면 좋겠다.
한참을 드라이어드들까지 동원해서 수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돌 한 개를 발견하지 못했다.
“환장하겠네. 작은 데다 까맣기까지 해서 더욱 찾기 힘든데. 대체 어딨는 거야? 설마 이곳이 아니라 더 되돌아가야 하는 건가?”
“네가 딴짓을 하니까 못 찾는 거잖아.”
“그러는 너야말로 찾는 시늉만 한 거 아냐? 저 돌들이 꺼림칙하다며 닿기 싫다고 근처에도 안 가잖아.”
엘더와 마거리트가 말다툼을 시작하자 피로감이 몰려왔다.
둘이 도긴개긴이지만 그들이 농땡이를 피워서 돌 수색이 늦어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둘을 제외하고 나와 메스키트, 데이지, 바곳은 벌써 공동을 열 바퀴는 돌았을 정도로 철저하게 수색했으니까.
“하… 돌겠네. 대체 어디 있담? 분명 꼼꼼하게 찾아봤는데.”
“제이 님.”
하도 제이 님 타령을 들어서일까? 옷깃을 잡는 데이지의 손길과 부름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 틈에 목소리가 내 드라이어드들을 흉내 냈다면 금방 넘어갔을 것 같기도 하다….
“응, 데이지. 왜?”
“하나 남은 곳이 있긴 해요.”
데이지가 가리키는 곳은 공동 중앙의 물웅덩이였다.
“아… 설마 물속에 있나?”
데이지의 말처럼 우린 아직 아무도 물웅덩이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
조심히 다가간 웅덩이는 반지름이 내 키 정도로 좁은 편이었고 주변이 어두운 탓도 있지만 조명등을 가져다 대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깊이가 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만 섣불리 손을 집어넣어 밑을 헤집기엔 고여 있는 물의 정체도 모르고 안에 뭐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꺼려졌다.
망설이는 나와 달리 대뜸 데이지가 물 아래로 손을 뻗었다.
텅.
그런데 표면에 얼음판이라도 있는 것처럼 데이지의 손이 가로막혔다.
“어라?”
“물이 얼어 있지는 않은데….”
엘더가 스태프 끝으로 웅덩이 표면을 콕콕 찌르자 그때마다 퉁퉁 튕겨 나왔다.
반면 내가 살짝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까다롭게 굴긴….
메스키트가 가로막혔던 상황처럼 이 역시 돌을 가지고 있는 내가 직접 물웅덩이를 뒤져 봐야 하는 것이 분명했다.
난 소매를 걷어붙인 채, 검은 돌을 쥐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을 천천히 웅덩이에 집어넣었다.
혹시나 빠질 것을 염려했는지 데이지가 내 허리에 줄기를 감아 지탱해 주었다.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걱정스레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어깨까지 집어넣을 정도로 팔을 뻗어 휘젓는데 손끝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잘 잡아 줘.”
“네, 제가 꽉 잡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손을 쭉 뻗어 잡히는 것을 쥐고 팔을 뺐다.
“어라?’
내가 웅덩이 속에서 찾은 것은 돌이 아니라 놀랍게도 투명한 보석이었다.
그것도 무려….
“오, 4월의 태양을 담은 보석인데? 이런 곳에 이게 왜 있지?”
내 손을 바라보는 엘더의 눈빛이 보석보다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우와… 담겨 있는 태양의 힘이 무척이나 강해 보여! 진리, 내게 줘!”
“넌 4월도 아니잖아. 쟬 줄 거면 차라리 날 줘.”
“제이, 불멸의 다이아몬드의 품질이 굉장히 좋아 보여요. 데이지의 손에 있는 보석과 비슷한 수준처럼 보이는데요?”
4월의 태양을 담은 불멸의 다이아몬드, 더구나 데이지가 끼고 있는 다이아 반지와 같은 등급의 보석이라면 최상급 아닌가?
“헐, 땡잡았다!”
이런 누추한 곳에서 이런 귀한 것을 찾다니!
그동안 목소리들이 날 괴롭혔던 일들이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여길 나가면 액세서리로 세공해야겠어. 이번엔 메스키트에게 줄게!”
“메스키트는 이미 강하잖아! 날 줘!”
“넌 이미 반지 하나 가지고 있잖아! 내 진리, 날 줄 거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만 한 사발씩은 들이켠 엘더와 마거리트가 내게 붙어 쫑알대기 시작했다.
“보석을 얻은 건 의외의 수확이지만 여길 나가려면 이것 말고 다른 돌이 필요해.”
솔직히 기분이 째질 것 같아서 호들갑을 떨고 싶지만 애써 참았다.
그리고 다시금 돌을 찾기 위해 웅덩이에 손을 넣으려고 할 때였다.
텅!
갑자기 웅덩이가 날 거절하고 튕겨 냈다.
분명 다른 손에 검은 돌을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왜… 물속에 손을 집어넣을 수 없는 거지?”
어안이 벙벙해져 두드릴 때마다 얼음판이라도 깔린 것처럼 퉁퉁 소리를 내는 웅덩이 표면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