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뒤에서 날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단번에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아들었을 때와 달리,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릴 뻔했다.
지금 멈춰 버린 다리와 더불어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괜히 다른 곳을 봤다가 그 목소리의 정체가 귀신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 봐였다.
“제이,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제게도 설명해 줄래요?”
메스키트는 내가 듣는 소리가 단순한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 듯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만 괴롭히는 기이한 이 목소리들.
“내 이름을 부르고 있어. 내가 아는 목소리들로. 그들이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부모님 목소리도 들리고 친구 목소리도 들리고….”
말하다 보니 소리를 흉내 내어 먹잇감 꼬시는 장산범이 떠올라 섬뜩해졌다.
“그 목소리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나요?”
“다양한데… 여기를 보라는 말도 있고 카페를 가자거나 집에 가자고….”
“어디서 들려온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걸어왔던 방향… 그러니까 뒤쪽에서.”
메스키트는 내 말을 듣고 그대로 내 뒤에 서서 양손으로 가볍게 내 귀를 막았다.
그러나 소리는 내 머리에 직접적으로 때려 넣는 메시지나 다름없는지 귀를 막아도 변화 없이 잘만 들렸다.
오히려 메스키트의 행동은 내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지 않게 앞만 보도록 붙잡고 있는 걸로 느껴졌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이의 말을 듣고 보면 그 목소리들은 제이가 뒤를 돌아보길 바라는 것 같네요. 어쩌면 저와 제이를 따로 떼어 놓으려는 속셈일 수도 있고요. 그러니 우린 그 목소리가 바라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될 거예요. 괜찮아요, 제이. 내가 있는 한 절대 당신이 잘못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요.”
“왜 하필 뒤를….”
문득 떠오르는 옛날이야기가 있었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이 동화책 대여 서비스를 신청해서,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대신 책 읽기에 푹 빠져 있었던 때가 있었다. 우리나라 전래 동화부터 이솝 우화까지. 날 거쳐 간 세계 각지의 동화들 중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을 무시한 벌을 받게 된 사람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전래 동화 책에서 봤던 <소금상이 된 모자(母子)>였다.
큰 가뭄이 찾아와 식량이 떨어지니 인심이 팍팍 해지고 범죄가 들끓던 마을에 비루한 차림의 스님이 시주를 받기 위해 찾아왔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문전 박대를 당하고 어떠한 심술궂은 사람들은 말똥을 퍼다가 시주랍시고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그런 스님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남편을 여의고 홀로 젖먹이 아기를 업어 키우고 있는 새댁의 집이었는데, 그녀는 딱한 마음에 쌀독을 긁어 마지막까지 남은 쌀 한 톨까지 모아 죽을 끓여 스님에게 대접했다.
알고 보니 앞날을 볼 줄 알았던 스님은 죽을 대접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인심이 사라지고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만 남게 된 마을에 머잖아 커다란 재앙이 닥칠 거라고 일러 주었다.
또한 마을 중앙에 있는 돌부처상에 피눈물이 흐른다면 당장 짐을 꾸려 마을을 떠나되 절대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고 홀연히 떠나 버렸다.
그 후 새댁은 마을 사람들에게 이를 알리고 매일 돌부처상에 찾아가 공양을 드렸으나 사람들은 모두 그런 거짓말에 속냐며 미쳤다고 욕하고 믿지 않았다.
그러다 누군가 장난삼아 닭 피를 돌부처상에 발랐고 이를 본 새댁은 화들짝 놀라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짐을 싸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물론 사람들은 장난임을 알고 있기에 떠나지 않았다.
새댁이 완전히 마을 밖으로 빠져나갔을 때 하늘에서 커다란 굉음이 울렸고 깜짝 놀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등에 업은 아기와 함께 소금상이 되었고 마을이 있던 곳은 거대한 호수가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다.
착한 일을 했는데도 결국 잠깐 뒤를 돌아본 바람에 돌이 된 결말이 어이없어서 유독 뇌리에 깊이 박혔던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에도 소금상이 등장했다.
공동에서 본 한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 형태의 소금상들, 그리고 등 뒤에서 날 부르는 이상한 목소리들….
“뒤를 돌아보면 나도 저런 소금상이 되어 버릴지도 몰라…. 메스키트, 내가 아는 옛날이야기 중 이런 게 있는데….”
목소리들을 무시하기 위해 일부러 소금상이 된 모자 이야기를 각색해 메스키트에게 들려주며 굳은 다리를 재촉해 힘겹게 걸어 나갔다.
메스키트는 틈틈이 내 이야기에 호응해 주고 계속 날 주시하며 실수로 뒤를 돌아보지 않게 신경 써 주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순간은 좀 더 빨랐다.
내가 메스키트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 뮤지컬이라도 하듯 이야기를 주절대는 동안, 목소리가 들려오던 빈도가 줄어들었고 점차 크기가 작아졌으며 한참 동안이나 통로엔 내가 떠드는 소리만 가득해졌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멈출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입을 다물자마자 다시금 날 유혹하려는 목소리가 들려올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도 연상되는 전래 동화가 있었다.
한 선비가 도깨비가 나온다는 고개를 무사히 넘어가기 위해 쉴 새 없이 노래를 부르거나 이야기를 해서 도깨비가 장난칠 생각도 잊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하하, 꼭 내가 동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잖아….”
또 하나의 수정 바위를 발견할 때쯤 멈춰 서니 입을 다물어도 더 이상 의문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또한 통로 중간중간 자리하던 소금상도 이젠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뒤를 돌아볼 용기는 차마 나지 않았다.
소금상이 없는 걸로 보아 여기까지 무사히 당도한 것이 어쩌면 나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 소금상들은 정말… 사람들이 변한 걸까? 동굴에 들어간 사람들이 하나같이 행방불명이 된 원인과 관련이 있을까?
“후… 이제 끝난 거겠지? 정말 여긴 이상한 곳이야.”
“제이, 앞을 조심해요.”
메스키트가 붙잡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벽에 부딪힐 뻔했다.
“뭐야? 설마 막힌 길이야?”
소금상 구간을 무사히 넘겼더니 다른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길이 끊겼다. 옆길로 새는 샛길도 없이 유일하게 남은 통로 하나가 완전히 틀어막혀 있었다.
이건 솔직히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5개의 통로를 각자가 클리어해서 빠져나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꽝이 있었다고?
“아냐, 이 길이 꽝일 리가 없어. 그러면 수정 바위도 없었을 거야. 결국 빛을 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거 아냐?”
수정 바위의 빛 반사 경로는 가늠할 수 없는 동굴 아주 깊숙한 곳부터 시작되도록 만들어졌다.
동굴 입구부터 시작된다면 우리가 수정 바위에 횃불로 빛을 보냈을 때 안쪽을 향해 나아갔어야 했는데, 빛은 안쪽에서 입구 쪽을 향해 나아갔다.
메스키트와 함께 막힌 벽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제이, 여길 봐요.”
벽의 제일 상단의 중앙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메스키트가 말했다.
키가 닿지 않아 까치발을 딛고 있으니 메스키트가 훌쩍 허리를 안아 위로 올려 주었다.
민망하기도 잠시, 그녀가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자 여태까지의 두려움과 불안이 모두 사라지고 머리가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
●○○○●
그곳엔 윗줄 5개, 아랫줄 5개로 총 10개의 기이한 홈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왼쪽에서 두 번째와 오른쪽 끝 두 개의 홈은 이미 검은 돌로 채워져 있었다.
이번엔 설마 퍼즐인가? 퍼즐 푸는 건 공포 게임 다음으로 극혐하는데….
메스키트는 날 땅에 내려 주고 이번엔 또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지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주웠다.
“수상한 검은 돌이죠? 마치 저 위에 박혀 있는 것과 같아요.”
메스키트의 손바닥엔 조명등의 빛을 받아 반질반질하게 빛을 내는 검은색 조약돌 하나가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벽의 상단에 박혀 있는 4개의 돌과 같은 종류였다.
5개의 통로 그리고 10개지만 배열은 5칸…. 내가 가진 한 개의 돌.
어쩌면 우리보다 앞서 통로에 들어간 이리스 그리고 로웰라와 헤르마가 이미 관문을 통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렇게 표시가 나타난 것이고. 물론 희망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러했다. 어쩌면 통과 여부와 전혀 상관없는 퍼즐일 수도 있지만.
“메스키트, 그 돌 좀 저 위의 홈에 끼워 줄 수 있어?”
키가 닿지 않는 나 대신 메스키트가 비어 있는 두 번째 칸에 돌을 끼워 넣었다.
그러자 시도가 무색하게 돌은 툭 떨어져 나왔다. 그 돌을 메스키트가 순발력 있게 바로 받아 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닌 걸까요?”
“아니 어쩌면 자리가 맞지 않을 수도 있어. 이번엔 세 번째, 그러니까 중앙 제일 위에 꽂아 볼래? 우리가 5개의 통로 중 제일 중앙으로 들어왔으니까 혹시나 해서.”
메스키트는 이번엔 세 번째 홈에 돌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딸깍, 하는 장치 아귀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돌이 떨어지지 않고 잘 붙어 있었다.
“제자리가 맞나 보군요.”
“와… 다행이다. 우리 말고 이미 여기까지 무사히 당도한 팀이 있나 봐.”
다른 길드원들은 아직 여기까지 도착하지 못한 거겠지? 설마… 소금상이 되어 버린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생각을 하니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괜히 동굴로 오자고 한 걸까?
“여긴 각 통로에서 맡아서 찾아 넣어야 할 돌이 두 개로 보이는군요. 그렇죠? 그러니 어서 우리도 무사히 도착했다는 걸 다른 이들에게 알려 주는 게 어때요?”
“소금상이 되어 버린 사람이 있는 건 아니겠지….”
“제이, 걸음이 느릴 수도 있어요. 어쩌면 아주 신중하게 이동하고 있겠죠. 그런 불안한 생각은 하지 말아요. 다들 제이의 동료잖아요? 제이가 우리 드라이어드를 믿는 만큼 그들을 신뢰하고 기다려 봐요. 물론 그렇다고 우리도 마냥 기다릴 순 없겠죠? 나머지 돌을 더 찾아봐요.”
메스키트의 격려에 힘을 얻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불길한 생각을 애써 지우고 땅바닥을 열심히 훑고 다녔다.
하지만 오랜 시간 땅바닥에 네 발로 개처럼 기다시피 세심하게 찾아도 먼저 발견한 돌 외에 다른 한 개는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여기가 아니라 아까 우리가 지나쳐 왔던 공동에 나머지 한 개가 있는 건 아니겠지…?”
“남은 곳이 그곳뿐이긴 하지만….”
소금상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환장할 노릇이었다.
겨우 헤쳐 나왔는데!
차라리 그곳을 좀 더 수색하고 이동할걸! 괜히 무서워서….
그때, 벽 위에 잘 자리하고 있던 돌이 뚝 떨어졌다.
“역시 두 개가 필요한가 봐.”
떨어진 돌을 다시 붙이는 시도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일단 손에 쥐었다.
“되돌아가려면 뒤를 돌아봐야 하는데….”
“제가 다녀올게요. 제이는 여기 있어요.”
“메스키트가 소금이 되면 어떡해?”
“내 주인, 제이가 소금이 되는 것보다 나아요.”
텅! 말릴 새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려던 메스키트가 무형의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튕겨 나왔다.
앞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메스키트가 다시 한번 손을 대자 통, 하고 튕겨 나왔다.
그녀가 튕겨 나온 지점에 내가 손을 댔을 땐 달랐다.
알 수 없는 힘은 메스키트가 지나가는 걸 거부했지만 내가 지나가는 것은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가 쥐고 있던 검은 돌이 조명등처럼 미세하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밝은 곳에선 확인하기 어려운 변화였지만 워낙 주변이 어두워서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돌을 가지고 있으면 되돌아가도 문제가 없다는 건가…?”
내 가설은 돌을 쥔 채로 걸어가자 메스키트 역시 함께 통과할 수 있게 되면서 진실로 확인되었다.
어쩌면 소금상이 되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