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6화 (296/604)

수많은 빛을 한데 집약시킬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수정 바위를 발견했을 때였다.

우린 달라진 이정표에 기뻐하기도 잠시, 갑작스레 5개로 갈라진 통로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쪽에 수정 바위가 있는 것 같은데…. 어라, 뭔가에 가려져 있네? 저쪽 바위도 가려진 것처럼 보이고.”

“통로가 갈라졌다는 건 나눠서 움직여야 한다는 걸까요?”

“굳이 따로 떨어지지 말고 하나의 통로를 선택해 다 같이 들어가는 게 어때요?”

“하지만 저 수정 바위의 크기로 보면 작은 바위 5개 모두 빛을 받아야 하는 것 같은디….”

다들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갈림길을 보며 고민했다.

“어차피 동굴 전체를 밝히는 것이 저희의 본래 목적이 아니니 다 같이 움직이도록 해요.”

어쩌면 5개의 통로 중 하나만 정답인 함정일 수도 있었다.

헤르마의 말처럼 5개의 빛을 받아야 작동할 것 같은 거대한 수정 바위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은 우리들이 따로 나뉘어 행동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제가 앞장설게요.”

그래서 어떤 통로를 고를 것이냐가 문제인데, 단서도 없을뿐더러 통로 앞에서 돌을 던져 보거나 소리를 쳐 보는 정도론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남은 것은 찍기뿐이라 기다란 나무 막대를 중앙에 가만히 세워 두고 쓰러지는 방향을 택해 가기로 했다.

이리스가 그녀의 방어형 드라이어드인 유칼립투스 디글럽타를 앞세워 가장 오른쪽에 있는 통로에 들어섰을 때였다.

우르릉!

갑자기 동굴 아주 깊숙한 곳부터 울려오는 굉음과 함께 주변이 크게 흔들리더니, 바위 하나가 떨어져 순식간에 이리스가 들어간 통로의 입구를 가로막았다.

“이리스!”

제퍼와 노토스가 쏜살같이 튀어나가 길을 가로막은 바위에 달라붙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난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바위틈으로 작게 흘러나온 이리스의 목소리가 모두를 안심시켰다.

“곧 꺼내줄게.”

통로를 막은 거대한 바위는 인간의 힘으론 버거워 보여도, 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데이지2가 건물의 잔해를 번쩍번쩍 들어 올렸듯 드라이어드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있을 듯했다.

제퍼의 아네모네 드라이어드가 바위를 들어 올리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지진이 오는 것처럼 또 한 번 동굴이 크게 진동하더니 좀 전과 달리 정말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어…! 건들지 말아 봐!”

통로 안의 이리스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아네모네는 황급하게 바위에서 손을 떼고 멀어졌다.

“이거 섣불리 바위를 건드렸다간 통로 안의 이리스가 다칠 것 같은데?”

제퍼는 불안한 표정으로 바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돼. 운이 좋다면 이 5개의 통로는 끝에 하나로 이어져 통과하기만 한다면 이리스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만약 개미굴이나 토끼 굴처럼 여러 갈래로 나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간 동굴이라면….”

후자의 경우라면 정말 최악이었다. 단순한 미로라면 하나의 입구와 출구만 존재하지만 토끼 굴이라면 출구가 여러 곳이었다. 물론 개미굴이라면 그 끝에 출구가 없을 확률이 컸다.

“이곳은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동굴이에요. 이렇게 큰 통로가 여러 갈래로 난 동굴이라면 금방 절벽 위의 지반이 무너졌을 거예요.”

메스키트가 벽을 두드려 보다가 나를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5개의 통로는 이곳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을 확률이 좀 더 높은 편이겠네?”

희망적인 결론을 찾아 추리하고 있을 때 다시금 동굴이 크게 흔들렸다.

“이리스!”

제퍼는 숫제 바위와 하나가 될 생각인지 철썩 달라붙어 그 틈으로 이리스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 댔다.

“난 괜찮아. 혹시 안에선 바위를 치울 수 있을까 실험을 해 봤어. 보시다시피 실패지만.”

조용한 동굴이 바위를 치우려고 할 때마다 반응을 보인다?

“이리스가 통로에 들어가자마자 바위가 떨어져 막힌 것이 우연일까?”

내 말에 다들 날 바라보았다.

“우리가 요란하게 난리를 피우며 동굴을 돌아다닌 것도 아니고, 타이밍이 너무 잘 맞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더구나 동굴 벽을 부수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저 바위를 치우려는 것만으로 동굴에 큰 지진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게 모두 함정이라는 건가요?”

“아뇨…. 장치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던전 공략에 필수적인 기믹 숙지, 어쩐지 여기까지 온 동안 너무 평화롭다 했어.

“함정은 모두를 다치게 하거나 죽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 만약 그 의도였다면 통로에 들어간 순간 변을 당했어야 했어요.”

이미 통로에 갇힌 이리스를 두고 이런 가정을 낸 나 자신도 섬뜩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단순히 입구를 막는 것이 아니라 통로를 아예 무너뜨리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직접 들어가 봅시다.”

이리스를 주축으로 하는 그들의 파티 내에서 제퍼는 그다지 선봉에 서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활을 사용하는 원거리 딜러라 그런 면도 있지만, 굳이 전투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주도적으로 앞서 달려 나가는 것은 언제나 이리스였고 제퍼는 항상 마지못해 뒤따라가는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이리스에게 닥친 위험이 그를 자극했는지 굳은 결심을 한 듯한 제퍼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아무 통로로 앞장서 뛰어들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도 순식간에 입구가 막힐 수 있으니 바짝 붙어서 가는 것이 어떤가 하는디….”

헤르마의 말에 노토스가 고개를 끄덕이곤 제퍼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래요, 저희도 무너질 기미가 보이면 함께 뛰어 들어갈게요.”

“이리스! 통로 끝에서 만나!”

제퍼가 성급하게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이리스가 들어간 바로 옆의 통로를 향해 뛰어들자 노토스가 그를 놓칠세라 황급히 따라갔다.

그 순간….

우르릉! 또다시 동굴이 크게 진동했다.

난 제퍼를 놓치지 않게 뛰어가려고 했지만 강한 악력이 어깨를 붙잡았다.

시들링이었다.

쾅!

어찌해 볼 수도 없이 제퍼와 노토스가 들어간 통로가 순식간에 바위로 막혀 버렸다.

이번에는 전과 달리 땅에서 바위가 솟아났다. 워낙 빠른 속도여서 따라 뛰어 들어가려 했어도 바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바위를 기점으로 주인과 갈라진 드라이어드들이 황급히 아티팩트로 돌아가기 위해 빛으로 화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티팩트가 정상 작동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낭패란 표정으로 헤르마가 바위를 주먹으로 톡톡 두드렸다.

헤르마는 노토스의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바위의 작동 반응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함께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칼같았다.

“둘….”

앞장선 유칼립투스 드라이어드와 이리스, 그리고 제퍼와 노토스.

“최대 둘이 들어가면 통로가 막히는 것 같아. 그게 드라이어드가 됐든 사람이 됐든. 그렇다면 남은 통로는 셋인데….”

나와 로웰라, 시들링과 헤르마. 총 4명이 남게 되었다.

결국 우리도 통로로 들어가 다른 이들과 합류할 수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원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공교롭게도 앞서 통로로 들어간 사람들은 균형이 잘 맞았다.

공격, 지원, 방어 그리고 28번째 테라리움에서 발레리안 아이들을 영입함으로써 회복까지 챙겨 균형을 맞춘 이리스 드라이어드 팀.

지원형인 소나무 드라이어드만 데리고 있는 노토스, 그를 보완해 줄 수 있는 드라이어드 셋을 데리고 있는 제퍼.

남은 것은 지원형과 회복형으로 턴 오버 할 수 있는 월계수와 공격형 드라이어드를 한 그루 데리고 있는 헤르마, 엉겅퀴와 레몬밤뿐인 로웰라 그리고 이들 중 드라이어드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와 시들링이었다.

그림은 바로 그려졌다.

솔직히 드루이드 능력만 놓고 보자면 나와 로웰라가 합심해야 할 것 같았지만, 드라이어드들만 놓고 보자면 이리스보다 안정적인 팀이 바로 나였다.

“헤르마와 로웰라가 함께, 저와 시들링은 각자 통로로 향하는 게 좋겠어요.”

“언니도 둘이 함께 행동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난 5개의 통로를 바라보았다.

“굳이 통로의 수가 5개로 나뉘었다는 게 조금 의심이 들어. 어쩌면 5개의 통로 안에서 각자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그 끝이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있거든.”

어차피 이리스도 홀로 떨어졌다.

만약 우리가 둘씩 떨어져 하나의 통로가 비게 된다면… 운이 나쁠 경우 통과하기 위한 어떤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퍼즐처럼 맞아떨어지는 통로의 장치들이 그런 예감에 힘을 실어 주었다.

“둘을 붙이고 우린 각자 따로 행동하자. 드라이어드의 수와 능력들을 놓고 가른 건데 혹시 다른 의견 있어?”

만약 여기서 시들링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조금 피곤해질 것 같았다.

헤르마는 그렇다 치더라도 로웰라는 홀로 보내기엔 불안했다.

“난 합당하다고 생각해.”

로웰라는 헤르마를 향해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씨익 웃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널 위한 것이라면 따르겠다. 그날 섬에서 너의 판단이 맞았던 것처럼.”

시들링이 말하는 판단이란, 실새삼에게 맞서기 위해 우리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드라이어드들을 모두 아티팩트로 돌려보내라 지시했던 것을 뜻했다.

날 믿고 따르겠다는 내 드라이어드들과 달리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결국 그는 도박과 다름없었던 내 판단을 믿고 따라 주었다. 결과는 옳았고.

“지금으로선 내가 가장 바라는 일이 한시바삐 모두와 안전하게 합류하는 거니까. 어찌 보면 날 위한 일이 맞긴 하지.”

당장 길드원들이 통로 너머로 사라져 버렸는데 그 와중에도 나를 콕 집어 말하는 건 너무 하지 않니?

“그럼 우리 모두 안전하게 통로 끝에서 만나자.”

다들 동시에 통로에 들어가기로 약속하고 각자 입구에 섰다.

난 가장 중앙의 통로에 서서 새까만 어둠으로 뒤덮인 통로 안을 바라보며 심호흡했다.

메스키트가 염려 말라며 방패를 꺼낸 채 내 앞에 섰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간만에 길드원들과 떨어져 내 드라이어드들만이 나와 함께 이 앞의 여정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

“다들 준비됐지? 통로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드라이어드들로 하여금 통로를 살피도록 해.”

“가장 먼저 통로 끝에 도달하는 팀이 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

“이렇게 긴장된 순간에도 즐길 거리를 찾는 모습이 이리스를 닮은 것 같은디…. 겁이 없는 건지, 원.”

헤르마는 말은 그렇게 해도 로웰라와 함께하는 것이 큰 의지가 되는지 표정이 꽤 밝은 편이었다.

“먼저 가서 널 기다리고 있겠다.”

“내 드라이어드들을 얕보지 마. 단숨에 격파해서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건 내가 될걸?”

로웰라의 활기찬 패기에 다들 영향을 받아 분위기가 한층 부드럽게 풀렸다.

다들 동시에 발걸음을 떼고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여태 동굴에서 겪었던 지진이 배가 되어 사방이 흔들렸다.

금방 등 뒤의 퇴로가 거대한 바위로 견고하게 가로막혔다.

훅 좁아진 습기 차고 어두운 통로 안에 내가 손에 쥔 조명등만이 반딧불이 빛처럼 은은하게 내 발아래의 영역까지만 겨우 밝혀 주고 있었다.

여럿이 조명등을 들고 있을 때에 비해 너무 초라해진 광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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