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5화 (295/604)

인적이 드문 곳에 있다는 사전 정보처럼 동굴로 가는 길은 갈수록 험준해졌다.

과거 산사태가 발생했던 곳인지 무너져 내린 돌 더미 때문에 지도에 표시된 직선 길 대신 빙 돌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그나마 산짐승들이 숨어 살기 좋을 법한 산세가 우거진 곳은 가시 돋친 덤불이 많아 헤쳐 나가기 제법 까다로웠다.

곳곳에 검게 탄 불의 영역 표시가 보였고 짐승이 괴롭게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가 난 쪽으로 다가가니 거대한 불이 커다란 산양을 단숨에 꿀꺽 태워 삼키고 있었다.

불은 실시간으로 꿀렁꿀렁 모습을 변모하더니 둥글게 휘어 감긴 뾰족한 뿔을 단 산양이 되어 발 딛기 어려울 정도로 솟은 바위 위를 성큼성큼 뛰어넘어 우리에게로 달려왔다

불은 불을 부른다.

가뜩이나 복잡한 지형인데 우린 사방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오는 불에 맞서 난전을 펼쳐야만 했다.

7명의 드루이드와 그들이 꺼낸 수많은 드라이어드들로 인해 일대에 참전을 위해 주둔 중인 군부대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다 함께 싸우는 일은 16번째 테라리움에서의 전투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큰 피해 없이 차근차근 불을 제압하는 모습을 보니 길드원들에게 합류를 요청한 것은 잘한 판단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리스 파티 없이 우리 셋만으론 동굴까지 도달하기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차라리 44번째 테라리움에서 동굴로 가는 경로를 선택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이쪽은 전혀 개척이 되지 않은 길로 보여요.”

이리스가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이쪽이 더 시간이 절약될 거라 생각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네요. 이리스 말처럼 차라리 빙 둘러 가는 게 나을 뻔했어요.”

적어도 그쪽은 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스크래퍼들도 오갈 수 있으니 사정이 나았을 거다.

어렵사리 동굴이 있다는 절벽까지 도달하니 먼저 와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글로리아가 그녀를 호위하는 상당수의 사람들과 함께 우릴 맞이했다.

그녀의 주변엔 막 옮긴 듯한 나무로 된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제때 맞춰 와서 다행이에요. 당신들이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왔어요.”

소식통이 대단한 여자였다.

44번째 테라리움을 주름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45번째 테라리움에도 사람을 심어 놨다니.

그녀를 오늘 만난 이리스 파티는 처음엔 경계했지만 호의적인 태도에 이내 무기를 거두었다.

“44번째 테라리움 때처럼 막무가내로 휘젓고 다니지 않은 건 칭찬할 만한 행동이었어요. 당신이 그곳 행정 관리원과 친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차라리 그쪽에 정보 수색 협조를 요청하는 편이 훨씬 낫죠. 그래서 동굴에 대한 정보는 좀 찾으셨나요?”

내 행적에 대한 소문을 얻는 건 쉬웠어도 아직 내가 행정 관리원이란 사실은 모르고 있는 듯했다.

“과거 45번째 테라리움의 전전대 행정 관리원과 동굴을 대상으로 한 관광 사업을 공동 추진하려고 했었다는 정보는 얻었어요. 그 외엔 얻은 게 없지만.”

“관광 사업이라… 그냥 넘길 수 있는 정보가 아니긴 하네요. 대체 뭐가 있길래?”

글로리아는 동굴이 있는 방향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저 역시도 어떠한 정보라도 얻어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전대 행정 관리원이 어찌나 용의주도한 자인지 자신이 통치할 시절의 자료를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말살해서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얻은 것이라곤 과수원 직원 중에 그나마 생각이 깨어 있는 사람들이 있긴 했는지, 화재 당시 몰래 일부 자료를 따로 빼돌렸다는 것뿐이지요. 현재는 빼돌린 자료의 행방을 찾기 위해 그들을 추적하고 있어요. 물론 그중에 반드시 동굴에 대한 자료가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뭐라도 해야지요.”

그녀가 손짓하자 수행원들이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엔 물, 식량, 모포 등을 포함해 각종 장비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말 그대로 정말 무엇이 있을지 모를 동굴이라, 정보를 얻는 것은 실패했어도 당신들의 여정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준비해 봤어요. 이 정도라면 그 안에서 고립되더라도 한 달은 족히 버틸 수 있는 수량이에요. 그리고 돌을 뚫거나 추위를 피하고 불을 피울 수 있는 장비들을 준비해 보았는데….”

글로리아는 말을 멈추고 우리의 드라이어드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드루이드에겐 차라리 이런 장비들보단 드라이어드 한 그루가 더욱 효용 있겠네요.”

“준비해 주신 건 감사히 받겠습니다.”

난 작정하고 비상식량을 사재기한 덕에 1년은 족히 버틸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 길드원들은 사정이 다를 테니 그들에게 넉넉히 챙겨 두라고 일렀다.

장비 역시 용도를 명확히 알고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이라면 사양 없이 챙겼다.

은둔자의 정원에서 겪었던 특수 상황처럼 어쩌면 드라이어드들을 강제로 아티팩트로 돌려보낸 채 홀로 고군분투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내게 있는 무기라고 해 봐야 총 한 자루뿐이니 휘두를 수 있는 거라도 챙겨야지.

추리 게임에서 많이 보았던 쇠 지렛대가 눈에 띄어 두 손으로 쥐어 보니 묵직한 무게에 살짝 팔이 저릿해졌다.

시들링의 검이 이것보다 무거워 보였는데… 한 손으로 휙휙 휘두르는 그가 부러웠다.

“저흰 이곳에 남아 후방을 엄호할 예정이에요. 소식을 들은 타토르가 호위병들을 끌고 뒤를 칠 수도 있고 산사태가 잦은 지역이라 동굴 입구가 막힐 수도 있으니 대비를 해야지요.”

동굴 안의 위험만 걱정했지, 밖의 위험은 미처 생각 못 했기에 글로리아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물론 이건 그녀가 사주한 의뢰이기에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란 건 알고 있지만, 일만 덜렁 시켜 놓고 나 몰라라 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다들 챙겼으면 출발해 볼까요?”

“조심하세요. 듣기론 스크래퍼들도 이 영역 너머론 가지 않는다고 해요. 저렇게 잡동사니가 많이 쌓여 있는데도 굳이 내버려 둔다는 것은 괜히 욕심을 부리다 부정 탈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요.”

글로리아가 가리키는 경계는 명확하게 보였다.

철사 따위를 얼기설기 엮어 나무와 바위에 칭칭 감아 임시 철조망 같은 것을 만들어 두었다.

하지만 어설프게 만들어진 탓에 지나치는 것도 쉬웠기에 단순히 위협용 이상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접근을 간절히 막고 싶었다면 차라리 벽을 세우거나 팻말이라도 세워 둬야 했다.

“45번째 테라리움에서 모두 들었죠? 많은 이들이 이유도 모른 채 행방불명된 곳이에요. 목표는 동굴 안 어딘가에 있을 종이 한 장을 찾아오는 것이지만, 정말 위험하단 판단이 들면 다들 무리하지 말고 철수하도록 해요.”

안전 최우선, 이곳에서 길드원들이 크게 다치느니 차라리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대한 다른 단서를 찾는 게 나았다.

내 말에 다들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던전. 그 누군가가 클리어한 후 공략도 남기지 않은 비밀에 싸인 던전.

그 안에 어떤 적이 도사리고 있는지, 어떤 함정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

다들 할 수 있는 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남은 것은 입장뿐이었다.

조심히 걸음을 떼는 우리들을 글로리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잎사귀 하나 없는 마른나무가 을씨년스럽게 우거지고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솟구친 허연 바위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지형에 일은 거대한 파도처럼 입을 쩍 벌린 회색빛 절벽 아래 짙은 어둠을 품은 동굴이 보였다.

정확히는 절벽 중간에 뚫려 있었고 그 아래 동굴로 오를 수 있도록 계단처럼 바위를 쌓고 벽을 깎아 놓은 구조물이 존재했다.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주변을 보니 완만하게 아래로 흐르는 길이 존재했지만 워낙 절벽이 높은 탓에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때 데이지를 비롯한 칼미아와 아이리스 드라이어드 등 기동성이 좋은 드라이어드들이 훌쩍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드루이드는 드루이드의 방식으로, 드라이어드의 힘을 이용해 단숨에 절벽 아래까지 내려가자는 의미였다.

길드원들은 밧줄과 보조 도구를 이용해 허리를 감고 절벽에 징을 박아 넣으며 드라이어드의 도움을 받아 하나둘 무리 없이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반면 나와 로웰라는 데이지의 줄기를 이용해 엘리베이터를 타듯 꽤 편하게 내려갔다.

드디어 뜬소문만 무성한 동굴 입구에 도달했다.

주변엔 개척을 위해 사용했는지 중장비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암담한 결과를 나타내듯 먼지가 쌓이고 녹이 슬어 있었다.

모닥불 터와 무너지기 직전의 텐트, 깡통처럼 굴러다니는 냄비와 식기구들도 눈에 띄었다.

“횃불을 켤까요? 조명등도 있긴 한데 일회성이라 신중하게 사용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부턴 길드 마스터인 내가 아니라 오랜 여행을 통해 지식이 풍부한 이리스나 시들링이 앞장서야 할 타이밍이었다.

“아까 그 여자가 조명등에 사용할 조명석 여분을 많이 챙겨 주긴 했는데 조명등은 범위가 좁으니 차라리 횃불이 나을 수도 있어요.”

나무 막대를 주워 천을 감고 기름을 뿌려 불을 붙이니 금방 횃불이 만들어졌다.

다들 하나씩 손에 들고 동굴 안에 들어서자 금방 안이 밝아졌다.

동굴 초입까진 그나마 정상적으로 사람이 활동해도 무리 없을 만큼 개척이 이뤄졌는지 책상과 책장, 매트리스 등 생활 가구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혹시나 운이 좋다면 글로리아가 찾는 종이를 벌써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서랍을 열고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하긴 이렇게 일이 쉬웠다면 글로리아가 금방 손에 넣었겠지.

동굴 안은 갈수록 넓어졌는데 우리의 발소리와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바람 소리가 아니라면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동굴에 들어가자마자 함정을 맞닥뜨리거나 공격을 받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상당히 평화롭다고 볼 수 있었다.

쒜에엑!

갑자기 거세게 불어온 바람이 우리를 훑고 지나가자 들고 있던 횃불 몇 개가 훅 꺼져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어두운 동굴 안이 더욱 어두워지자 슬슬 불안함과 두려움이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횃불에 다시 불을 붙이려는데 다시금 파도처럼 거센 바람이 덮치자 로웰라가 들고 있는 횃불을 제외한 모두의 불이 꺼졌다.

“진짜 변덕스러운 동굴이네. 이래선 한 발자국 걷고 불붙이고 다시 걷고 불붙이는 행위만 반복할 수밖에 없겠는데요?”

“오, 언니. 여길 봐.”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다시금 불을 붙이려는 이리스 뒤로 로웰라가 무언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엔 한 면이 매끄럽게 잘려 나간 바위가 있었다.

로웰라가 자세히 보기 위해 횃불을 갖다 대니 빛을 받은 바위가 반짝거리며 빛났다.

이윽고 그 빛을 분산시켜 그 주위를 환하게 만들었다.

“와, 내 얼굴이 비치는데? 거울?”

로웰라가 발견한 바위는 단순한 바위가 아니었다.

매끄럽게 잘린 곳에는 표면과 같은 바위의 단면이 아니라 영롱하게 반짝이는 넓은 수정 같은 보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리스가 다시 불을 피운 자신의 횃불을 바위에 가져가자 놀라운 일이 생겼다.

피잉.

맑고 청량한 소리가 바위에서 울리더니 수정에 빛이 집약되기 시작했다.

그러곤 일직선으로 반사되어 튀어 나간 빛이 반대쪽으로 뻗어 나가 비슷한 다른 바위에 도달했다.

그러자 우리가 서 있던 일대가 굳이 횃불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환해졌다.

“저쪽에도 같은 바위가 있어.”

대충 메커니즘을 이해한 길드원들이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고 곧바로 동굴 더 안쪽에 있는 다른 바위를 발견했다.

나와 헤르마가 횃불을 갖다 대자 우리가 있던 바위에서 시작된 빛이 뻗어나가 로웰라와 이리스가 서 있는 바위에 반사되어 다시금 퍼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기쁨도 잠시, 또다시 거센 바람이 불어오며 우리의 횃불을 모조리 꺼 버렸다.

“제일 안쪽에 있는 이런 바위를 찾으면 동굴 전체를 밝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바위를 이정표 삼아 계속 이동하면 될 것 같네요.”

결국 우린 바람의 방해 때문에 조명등을 꺼내 들었다.

칠흑같이 어둡고 한 치 앞도 헤아리기 어려운 동굴이었지만, 우린 수정 바위라 이름 붙인 바위를 이정표 삼아 동굴 안쪽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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