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4화 (294/604)

난 책을 들고 도서관 이용객들이 버린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 사서에게로 갔다.

“혹시 이 동화책의 출처를 알 수 있을까요? 책엔 저자의 이름이나 출신이 따로 적혀 있지 않는데, 저자와 관련된 정보라든가 아니면 어디서 기부를 받았는지 등등요.”

내게서 책을 건네받은 후 책의 상태를 확인한 사서의 얼굴은 말도 못 하게 구겨졌다.

“세상에… 책장을 채우는 데 급급해 들어오는 책들은 일단 모두 받는 편이지만… 이렇게 상태가 심각한 책까지 남아 있을 줄은 몰랐네요. 자체 폐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서는 내가 책의 상태를 책망한다고 오해하는 듯했다.

“아뇨, 전 그 책이 필요해요. 폐기하실 거라면 차라리 제가 살게요. 전 정말로 이 책의 출처를 알고 싶을 뿐이에요.”

“어… 책을 사시겠다고요? 이건… 도저히 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책을 버릴 것처럼 쓰레기봉투에 넣으려던 사서는 당황하며 커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알아볼 수 있는 직인이 남아 있는 게 아니라… 아마 개인이 사비로 낸 책일 거예요. 책에 저자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지 않다면 그야말로 익명을 원했을 수도 있으니 제 선에서 저자를 알아보는 건 힘들 거예요. 하지만 출처는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잠시만요.”

사서는 치우던 걸 멈추고 자리로 돌아가 서랍을 뒤지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상태가 이렇게 나쁜데 책의 제목이라도 남아 있어서 다행이네요. ‘왕의 명을 받은 나무’라…. 최근 자료는 없고.”

어느새 사서의 책상 위는 꺼내 둔 종이 뭉치로 난잡해졌다.

기다리는 동안 심심했는지 로웰라는 다시 유머집을 펼치고 시들링을 상대로 테스트를 하기 시작했다.

“이건 웃지 않고 못 배길걸요? 밤나무끼리 만났을 때 하는 인사가 뭐게요?”

“드라이어드들은 인간들과 다르게….”

“정답은 ‘너도밤나무?’예요. 야, 너도 밤나무? 나도! 깔깔깔.”

로웰라의 웃음소리가 도서관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보통의 도서관이라면 굉장히 민폐인 행동이었으나 애초에 이 도서관은 정숙과 거리가 멀어서 로웰라의 웃음소리 정도는 가볍게 묻혔다.

“그 유머집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나 봐?”

“언니! 진짜 재밌지 않아? 와,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하지?”

여기가 회사였다면 나이가 지긋한 부장님이 칠 법한 유치한 개그였지만….

로웰라가 나보다 상사가 아니기에 억지로 웃어 줘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밤나무들끼리 그런 인사를 한단 말인가?”

반면 시들링은 상당히 심각하게 유머를 유머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저런 말장난에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로웰라도 그렇지만… 시들링도 참….

시들링이 저렇게 웃는 모습도 상상이 안 가긴 했다. 좀 깰 것 같아.

“아, 찾았습니다. 어… 제가 사서로 부임하기 한참 전에 기부된 책이네요. 그 책은 테라리움이나 업체를 통해서 들어온 책이 아닙니다. 개인이 기부한 책이에요. 그런데… 안타깝게 익명 처리가 되어 있네요.”

정말 비밀이 많은 책이네.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그 책과 함께 기부된 다른 책들에 대한 정보라도 알려드릴까요?”

사서는 미안하단 표정으로 내게 리스트를 건네주었다.

그 익명의 기부자는 내가 가지고 있는 동화책 외에도 상당히 많은 책을 이곳에 기부했다.

그중 이상하게도 동화책으로 분류된 것은 단 한 권뿐이었다.

다른 책은 꽤 평범한 교양 도서들이었다.

교양 도서는 보통의 사람이 소유해도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책들이지만 동화책의 주된 독자층은 보통 아이들이었다. 아이가 있는 가정집이든 보육원이 됐든.

그런 곳이 동화책을 단 한 권만 보유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고 못 해도 두세 권은 더 섞여 들어와야 하지 않았나 하는 작은 의문이 들었다.

로웰라는 내 옆에서 리스트를 훑더니 발 빠르게 그 안에 적혀 있던 책 몇 권을 찾아왔다.

사서가 언급했던 것처럼 커버에 평범하게 직인이 찍혀 있고 저자도 뚜렷하며 몇 쇄라고 하단에 작게 적힌 것을 보니 여러 번 발행된 경력이 있는 책들이었다.

솔직히 리스트만 보면 동화책을 숨기기 위해 평범한 책들을 대거 끼워 넣은 격이었다.

“이 책들도 그렇게 상태가 좋지만은 않아 보여. 하나같이 물에 푹 젖었네. 운송 도중에 비라도 흠뻑 맞은 걸까?”

로웰라가 책을 조심히 펼치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들고 있는 동화책보단 상태가 훨씬 나아 보였다.

적어도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하는 덴 무리가 없어 보였으니까.

“이 책을 폐기하실 거라고 하셨죠? 제가 살게요.”

“애초에 기부가 된 책이기 때문에 값을 매길 순 없습니다. 어차피 더 이상 도서관에서 보유할 수 없는 것이 확인됐으니 그냥 가져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사서는 왜 내가 이 동화책에 집착하는지 의문이 드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책을 내게 양도해 주었다.

도서관에서 동화책처럼 특별한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기대하며 책들을 훑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그 후로 유의미한 책을 발견하진 못했다.

그러던 중 이리스 파티가 근처까지 당도했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우린 도서관을 빠져나와 그들을 기다리며 이른 저녁을 먹었다.

그즈음 45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우릴 찾아왔다.

“정보를 찾는 데 꽤 애를 먹었습니다. 저희 관할 소재가 아니다 보니 워낙 자료가 없어서 말입니다….”

그녀는 행정 관리원이 다른 테라리움의 관할 지역을 살펴보는 건, 그 지역에 눈독을 들인다고 오해받거나 월권행위로 낙인찍힐 수 있기 때문에 정보가 없는 것을 양해해 달라며 안절부절못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나마 45번째 테라리움이 동굴과 가까워서 찾아왔던 나는 아차 싶었다.

그런 관례가 있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정보를 찾고자 동분서주한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지형에 대한 정보는 끝내 찾을 순 없었지만 그곳과 연관되어 있는 정보는 찾았습니다. 제가 이곳에 부임하기 전의 훨씬 전, 그러니까 전전대 행정 관리원의 자료를 살펴보게 되었는데…. 44번째 테라리움으로부터 그 동굴을 대상으로 한 관광 사업 공동 추진 제안서가 있었습니다. 이쪽에서 대량의 물자와 광부, 수송차를 제공하는 대신 향후 발생하는 수입의 일부를 제공받는다는 내용이었는데요.”

행정 관리원은 오래되어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을 내게 넘겨주었다.

문서 하단에 ‘거절’이라고 크게 적힌 붉은 도장이 눈에 띄었다.

“44번째 테라리움에서 요청하는 내용만 있고… 별 내용은 없네요?”

“네, 아마 정식 제안서라기보단 이쪽의 입장을 떠보려는 것이 목적이었나 본데 보시다시피 관광 사업이 잘될 거란 보장도 없이 워낙 요청하는 것이 많아서…. 한쪽에 크게 불공정한 제안서였지요. 그래서 전전대 행정 관리원이 더 볼 것도 없이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조금 더 추진했다면 정보가 자세히 있었을 텐데….”

“아니에요. 이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에요. 노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오래전 44번째 테라리움은 동굴을 이용해 관광 사업을 하려고 했다.

아무 장소에서나 관광 사업을 할 순 없다.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선 그 장소에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어야 했다.

아름다운 경치,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 등.

대체 동굴은 무엇을 품고 있는 걸까?

누런 사업 제안서 옆에 도서관에서 양도받은 동화책을 내려놓았다.

아직 이 동화책의 배경이 그 동굴이라고 확신할 순 없었다.

하지만 만약 맞는다는 가정을 한다면… 사업 제안서에 적힌 ‘관광’의 의미를 달리 볼 수 있었다.

“동굴 안에 군락지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관광 사업을 유치해 볼 만하죠. 잘 보존된 군락지가 있다는 것 자체로도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데다 그 종이 특이하다면 날고 기는 드루이드들은 물론, 연금탑에서 단체로 관광을 오겠지요.”

“회양목은 그렇게 특이한 종은 아니지 않아요?”

“혹시 동굴에 회양목 군락지가 있는 겁니까? 하지만 동굴 속에서 살 수 있는 나무가 아닐 텐데. 뭐, 회양목 정도면 당장 주위를 둘러봐도 집집마다 관상수로 심어 놓은 곳들이 많으니 군락지라 하더라도 명성은 좀 떨어질 겁니다.”

회양목에 대해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 평가가 나와서 그런지 시들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단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45번째 테라리움에 방문한 보람이 있네요. 오늘 보여 주신 은혜는 꼭 기억하겠습니다.”

“아유, 은혜라고 할 것까지야. 전 그저 서류나 좀 뒤져 본 정도였는데요. 28번째 테라리움에서 믿고 찾아와 주셨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요.”

서류나 좀 뒤져 봤다고 하기엔 걸린 시간이 꽤 길었다.

아마 과수원을 쥐 잡듯 뒤진 것이 분명했다.

행정 관리원이 뿌듯한 얼굴로 떠난 뒤 나는 시들링에게 동화책을 보여 주었다.

“물론 가상의 배경을 사용한 허구적인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는데, 난 어쩌면 그 동굴에 너의 초대 메인이었던 회양목이 살고 있었지 않았나 의심이 들어.”

그나마 읽을 수 있는 구간들을 눈여겨 보던 시들링이 고개를 저었다.

“고아들을 보살폈다는 점에서 회양목 드라이어드와 닮았으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날 거두기 전에 살던 터전이 있다곤 알고 있지만, 이 책의 나무는 끝내 인간들의 손에 죽지 않는가? 내 회양목 드라이어드는 그저 수명이 다해서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갔다. 보통의 드라이어드보다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갈 수 있는 드라이어드지만 날 거둔 시점엔 많이 노쇠한 상태였지. 영혼의 연결을 해도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드라이어드에게도…. 수명이 있구나.

내 드라이어드들을 떠올리니 어쩐지 가슴 한편이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드라이어드는 영원을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결국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는 존재가 생길까?

“그럼 메스키트도….”

문득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메스키트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녀가….

내 불안을 느낀 것인지 시들링이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내 회양목 드라이어드는 너의 드라이어드와 출신이 다르다. 자연 발생 후 너무 긴 세월을 드루이드 없이 살아와 약화된 것이지, 세계수에서 태어나 드루이드와 곧바로 영혼의 연결을 한 드라이어드는 드루이드와 명을 함께 할 것이다.”

“그래…. 어쨌든 내가 책 내용을 잘못 짚었나 봐. 이젠 동굴에 직접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겠어. 아, 45번째 테라리움까지 왔는데 결국 동굴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커녕 수상함만 잔뜩 얻게 됐잖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식사를 마치고도 시간을 보냈지만 이리스 파티는 새벽이 되어서야 우리와 합류했다.

근처까지 왔다던 건 그냥 하는 이야기였는지 한시도 쉬지 않고 마차를 몰아 온 티가 역력했다.

기절 직전의 헤르마에게 조금 더 휴식 시간을 주고, 우린 45번째 테라리움에서 점심까지 해결한 후 동굴로 떠나기로 일정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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