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치를 많이 낮췄기 때문인지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45번째 테라리움은 44번째 테라리움보다 상황이 조금 더 나은 편일 뿐 내부 상황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페이크 로열은 이곳에도 있었고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우리가 드루이드인 걸 알아차리고 벌떼처럼 몰려드는 중개업자들의 행동도 동일했다.
상황이 좀 더 낫다고 평가한 것은 단순히 도박장과 같은 업소가 대놓고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긴 적어도 건물 사이에 숨어 치부를 가리고자 하는 노력이라도 있었다.
거리를 떠도는 고아들이나 노숙자들의 행색도 좀 더 깔끔하긴 했다.
새로운 테라리움에 도착한 김에 잠시 둘러보고 있는데 익숙한 이름의 간판을 발견했다.
보나의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다는 ‘석류 금융’이었다.
그 어떤 연고도 없던 44번째 테라리움에 비하면 그나마 비벼 볼 데라도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정 안 되면 우리 직원 이름이라도 팔아 봐야지.
이전 테라리움에서 했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신분으로 과수원을 방문했다.
아예 이곳의 행정 관리원에게 정식으로 협조를 구하는 것이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방문했던 테라리움들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작은 과수원으로 들어가자 간소하게 차려진 안내 데스크에 한가로이 앉아 있던 안내원이 우릴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무슨 연유로 방문하셨나요?”
“행정 관리원님을 뵙고 싶습니다.”
“실례지만 따로 일정을 잡으신 게 있으신가요? 오늘 행정 관리원님께선 공식 일정이 없으신데 누가 오셨다고 전해 드리면 될까요?”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제이가 방문했다고 전해 주세요. 테라리움 일정으로 방문한 건 아니고 개인적인 일로 방문했습니다.”
쿠당탕!
급하게 일어나다 책상에 무릎을 찍었는지 소리가 상당히 요란했다.
제대로 신분을 밝히니 파급력이 꽤 컸다.
이미 미미르의 일을 겪었기에 뒤 번대 테라리움 관계자들이 앞 번대에 대해 얼마나 큰 동경과 환상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45번째와 28번째는 무려 앞자리만 두 수나 차이가 났다.
미미르가 비록 소심한 초식동물 같은 성정이라 내 앞에서 덜덜 떨긴 했지만 이곳의 행정 관리원도 큰 차이 없는 반응을 보일 거란 예상이 들었다.
아픈 무릎을 다 돌보지도 못하고 급하게 뛰어가는 안내원의 행동을 보아하니 더욱 그런 확신이 생겼다.
28번째가 아닌 16번째를 들먹였으면 기절이라도 했으려나….
44번째 테라리움에서 받았던 냉대를 싹 잊을 정도로 우린 아주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45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우릴 귀빈실로 안내했다.
말이 귀빈실이지, 오늘 급조된 곳이나 다름없는지 용도에 어울리는 방은 아니었다.
그저 쓰는 사람 없이 놀리던 빈방임을 증명하듯 묵은 먼지 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간지럽혔다.
“저… 저희 테라리움엔 어떤 연유로 방문을 하셨는지….”
“아, 너무 어려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말했듯이 개인적인 일로 방문했습니다. 제가 찾고자 하는 정보가 있는데 행정 관리원님의 도움을 받으면 더 수월할 것 같아서 염치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었네요. 바쁘셨을 텐데 갑자기 면담을 요청드려서 죄송합니다.”
“아유, 죄송할 것까지야…. 무려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오신 분이신데 알아보고 마중 나가지도 못한 제가 다 죄송합니다.”
행정 관리원의 월렛은 만능이긴 해도 방문자의 정확한 신분까진 알 순 없었다.
어느 정도 명성이 높은 드루이드는 티가 나긴 하지만 내가 몇 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지 하는 세부 정보는 표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단, 날 보자마자 알아보았던 파필리온의 경우처럼 특정 조건에선 내 정보가 오픈되는 경우가 있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뒤 번대의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면 월렛에 정보가 표시되었다.
내가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란 사실은 16번째 테라리움의 전 행정 관리원인 파필리온의 월렛엔 표시되었지만, 3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 미미르의 월렛에는 표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내가 28번째 테라리움에 있을 적 폰으로 확인한 사실이었다. 1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 키르켄의 정보가 가려진 반면, 미미르의 정보는 공개되었기에 알아차렸다.
내가 16번째의 행정 관리원까지 역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키르켄의 정보를 보지 못한 것은 월렛의 실시간 동기화 문제에 있는 것 같았다.
28번째 테라리움에 묵으니 월렛은 28번째 행정 관리원 모드에 동기화되어 있었다.
만약 16번째 테라리움에서 키르켄의 정보를 확인했다면 동기화가 바뀌어서 정보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행정 관리원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테라리움 번호로 인한 암묵적 줄 세우기를 월렛의 정보 차별이 정당화시키는 찝찝한 기분이 들었었다.
44번째 테라리움에는 글로리아에게 바로 내 정보를 떠넘겼던 입이 가벼운 행정 관리원이 있었지만, 내 제대로 된 신분까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정체가 행정 관리원이었단 사실이 탄로 나면 대우가 또 달라졌겠지.
“찾고 계시는 정보가 어떤 것일까요? 제가 힘이 닿는 대로 도와드리겠습니다.”
“44번째 테라리움 근처의 어떤 동굴에 대한 정보를 찾고 있습니다. 본래라면 44번째에서 계속 정보를 찾았을 테지만 모종의 이유로 전부 소실되어서 어쩔 수 없이 그나마 인접한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동굴이라 하면… 정확히 어떤?”
지도를 펼쳐서 동굴을 가리키니 행정 관리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확실히 지도상의 위치만 봐도 45번째는 인접하다고 말하기에 애매한 수준이었다.
완전히 44번째 테라리움의 관리 구역이라 운이 나쁘다면 이곳에서 정보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그쪽은 아무래도 지형 때문에 저희가 굳이 주시하지 않는 곳이라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름 아닌 제이 님께서 하시는 부탁인데 설렁설렁 처리할 순 없죠.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내가 테라리움에 방문하자마자 바로 찾아와 독대 자리를 마련한 사실이 마음에 들었는지 45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의 말투에서 은은한 친근감이 묻어났다.
행정 관리원은 나의 이 일련의 행동을 통해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저야말로 쓸 만한 정보가 나올 때까지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는데, 혹시 이곳에 도서관이 있나요?”
“도서관이라 하기엔 민망한 수준이지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44번째 테라리움엔 도서관이 없었다.
그곳은 내면의 양식을 충족할 어떠한 수단이 없었고 그저 유흥과 쾌락만을 위한 장소들만 즐비했었다.
전대 행정 관리원이 일부러 과거 자료를 태워 먹은 연유도 있었지만 그 후로 부임한 행정 관리원이 만행을 수습하기 위해 몸소 나서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도서관을 언급하는 행정 관리원의 표정이 영 떨떠름하긴 했지만 있다는 것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었다.
안내 역할 정도는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될 텐데 굳이 자신이 나섰다.
동행하는 와중에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는데, 꼭 페이크 로열들이 과시용으로 드루이드를 대동하는 느낌과 같았다.
45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은 내 방문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굳히는 것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도서관에 도착해 사서에게 말하는 걸 들으니 완벽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여기까지 친히 방문해 주신 행정 관리원님이십니다. 제게 직접 협조를 요청하셨으니 누가 되지 않도록 성심성의껏 안내해 주세요. 그럼 제이 님, 전 미리 과수원에서 이야기를 나눈 대로 최선을 다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님께서….”
쩔쩔매는 사서의 표정이 감사원이라도 앞에 둔 줄 알겠다.
“어떤 책을 찾고 계실까요?”
“44번째 테라리움에 위치한 동굴에 대한 정보를 찾고 있습니다. 동굴이 아니더라도 그 근방에 대한 정보라면 어떤 거라도 좋아요.”
데스크 위의 리스트를 손가락으로 훑는 사서의 표정은 난처함만이 가득했다.
“행정 관리원님께 당부를 받았기에 최대한 도움을 드리고 싶지만….”
“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직접 보시는 게 이해하시는 데 빠르실 것 같습니다.”
사서는 리스트 중 한 장을 선별해 떨리는 손길로 내게 건네주었다.
“아….”
보자마자 단번에 이해가 갔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자서전, 어린이를 위한 동화, 어떤 시기에 유행했던 가십거리, 유머집, 연애소설 등등….
이 도서관에는 백과사전 같은 정보 도서가 단 한 권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동안 발행된 테라리움의 소식지를 스크랩해 놓은 것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소식지를 발행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저희 도서관은… 다른 테라리움에서 유행이 지난 폐기 도서 수입이나 주민들의 기부로 운영되다 보니… 방문하신 목적과는 그다지 어울리진 않습니다. 정보 도서는 보통 유행을 타지 않고 상태가 나빠도 내부 주민들에게 기부하거나 중고 거래 수요가 있거든요….”
도서관 이야기를 들은 행정 관리원의 표정이 묘하게 좋지 않다 싶었던 연유가 이거였다니.
사서의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의외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은 저마다 간식거리를 들고 더러워진 손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책장을 넘기며 읽고 있었다.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 옆 사람과 떠드는 소리, 심지어 코를 골며 자는 사람까지, 정숙해야 할 도서관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들이긴 했다.
이곳은 그저 주민들에게 카페처럼 시간 때우다 가는 곳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자릿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실내이니 더욱 좋을 테지.
“그래도 한 번 찾아보시겠다면 여기 리스트를 드리겠습니다.”
보유하고 있는 도서 수도 그렇게 많진 않았다.
책장보단 책을 읽을 수 있는 긴 책상과 의자들이 더욱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 이거 재밌겠다.”
리스트를 옆에서 힐끗 본 로웰라가 유머집에 흥미를 보이며 말했다.
참으로 난감했다.
그래도 행정 관리원이 정보를 알아볼 동안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을 리스트에서 그나마 찾아볼 가치가 있을 법한 책을 골라내고 그 책을 훑어보는 데 사용했다.
리스트에 있음에도 분실된 경우가 많았고 찾아보니 이름이 다른 책도 많았으며 리스트에 아예 없는데 책장에 꽂혀 있는 책도 존재했다.
“리스트는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따로 나눠서 찾자. 난 저쪽 책장을 훑을 테니 로웰라랑 시들링은 저쪽을 살펴봐.”
그저 각자 가까이에 있는 책장을 가리켰을 뿐인데 공교롭게도 내 쪽은 어린이를 위한 동화책과 설화집이 포진된 곳이었다.
동화책이라고 해도 삽화가 있는 책은 손에 꼽을 정도고 페이지의 반 이상을 커다란 글자로 채워 내용이 적고, 책 자체가 잡지처럼 얇아서 막막할 정도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몇 권 뽑아서 후루룩 페이지를 훑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한 책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왕의 명을 받은 나무
제목만 덜렁 써진 다른 책들과 달리 표지에 거대한 거목이 그려진 낡은 동화책이었다.
오랜 시간 사람들이 찾지 않았는지 페이지가 습기로 떡이 되어 찰싹 붙어 있던 그 책을 홀린 듯이 책장에서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