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1화 (291/604)

액자 안에 들어 있는 나무패는 총 5개였다. 그렇다면 5명의 고아 출신의 소유품이라는 건데, 어떤 연유로 전당포를 전전하게 된 것일까?

부모 같은 드라이어드가 만들어 준 물품인데 버렸을 리는 없고.

나무패의 용도에 대해 설명을 간단히 끝낸 시들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시들링의 드라이어들이 말하길, 그 역시 드라이어드가 어렸을 때부터 보살펴 주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저 나무패의 제작자와 시들링을 키워 준 드라이어드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단번에 알아본 것은 물론 그리운 얼굴을 했으니….

시들링의 드라이어드 부케의 초대 메인이었다는 의문의 드라이어드, 하지만 그는 이 자리에서 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문을 나가기 전, 글로리아의 수행원이 우리에게 은색 배지를 나눠 주었다.

월계수와 개나리꽃 모양이 문양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 배지를 잘 보이는 곳에 착용하십시오. 이 테라리움에서 당신들이 글로리아 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전보단 사람들이 협조적으로 대할 겁니다.”

옷깃에 붙이고 나자 수행원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나가자마자 따라붙은 다른 사람이 우리를 저택 밖까지 배웅했다.

“으아아… 언니, 이제 어떡하지? 죽을 수도 있는 동굴이라고 했지? 안에서 뭐가 나올까?”

“혹시 두렵다면 넌 따라오지 않아도 돼.”

“에잇! 그게 무슨 소리야? 차라리 언니가 내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놓고 갈지언정 나 스스로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런데 진짜 놓고 가면 안 돼…. 나도 가고 싶어! 열심히 할게! 정말 위험할 것 같으면 피할게!”

“그래그래, 같이 가자. 너도 길드원인데 함께 가야지.”

글로리아의 저택 안에서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던 것이 언제였냐는 것처럼 한껏 명랑해진 로웰라가 소리쳤다.

“시들링, 혹시 그 5개의 나무패 중에 네 것도 있었어?”

“그렇지 않다.”

시들링은 주머니에서 좀 전에 봤던 나무패들보다 훨씬 정교하게 만들어진 나무패를 꺼내서 보여 주었다.

앞서 글자라곤 도무지 알아보기 힘들었던 문양이 파여 있던 것과 달리 그의 나무패는 시들링의 이름이 알아볼 수 있게 파여 있었다.

또한 음각 안에 덧바른 잉크도 선명했다.

하긴… 그런 세월감이 느껴지는 물건이 시들링의 것일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네 이름표를 만든 드라이어드가 그 5개의 이름표도 만들었다고 생각해?”

내 질문에 시들링은 잠시 답하는 것을 미루었다.

만약 이대로 그가 입을 다문다면 과거 이야기에 대한 회피로 보고 더 이상 묻지 않고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와, 그럼 엄청 오래 산 드라이어드겠네요. 그 이름표 엄청 오래된 물건처럼 보이던데!”

역시나 그건 시들링의 초대 메인의 유품이었다.

“감정사가 회양목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고 하던데….”

“회양목 드라이어드가 자신의 모체로 만든 이름표가 맞다.”

“그럼… 널 키워 줬다는 초대 메인이… 회양목 드라이어드야?”

“…그렇다.”

시들링은 마치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아련한 얼굴이 되어 그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구나….”

44번째 테라리움은 참 신기한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시들링의 과거를 알게 될 줄이야.

“네가 이렇게 잘 자란 걸 보면 회양목 드라이어드는 무척 좋은 드라이어드겠지? 너 말고도 다른 인간의 아이들을 거둬서 손수 이름표도 만들어 주었잖아.”

“…벨라돈나는 가끔 그가 날 잘못 키워서 이 지경이 됐다고 말했다.”

악의 없는 순수한 그 말투에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하긴, 처음 만났던 시들링의 모습은 참 답이 없었지.

“언젠간 회양목 드라이어드와 있었던 이야기도 해 줄 수 있어?’

“어렸을 때라 기억은 많이 나지 않지만… 그러겠다.”

그래, 그거면 됐다.

회양목과의 추억을 이야기하다 보면 대체 그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알 수 있게 되겠지.

그렇다면 시들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44번째 테라리움은 과거 자료를 전부 태워서 정보가 거의 없다고 했으니 동굴과 그나마 인접한 45번째 테라리움으로 가 볼까 해.”

“오, 그럼 이리스 언니가 실새삼 정보를 찾아보러 2번째 테라리움의 도서관까지 가 본다고 했으니 여기까지 오는 시간이랑 잘 맞을 것 같아.”

이리스 파티는 실새삼에 대한 정보를 좀 알아낸 것이 있을까?

45번째 테라리움으로 가기 위해 걷다 보니 글로리아에게 나무패를 팔았던 전당포가 보였다.

나는 다시 한번 배지가 잘 보이도록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그곳으로 들어갔다.

“뭐야? 왜 또 왔어? 안 팔아.”

주인장은 여전히 냉담했다.

하지만 그에게 배지가 달린 옷자락을 흔들어 보이자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것만 달고 있으면 사람들의 태도가 협조적으로 변할 거라고 하더니 진짜였잖아?

“그래도 팔 순 없다.”

조금 누그러진 말투가 되었지만 여전히 판매 거부는 완강했다.

뭐, 나도 필요 없었다. 굳이 전당포에서 파라다이스 테라리움과 관련된 물건을 찾고자 하던 원래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니.

“아뇨, 뭘 사려는 게 아니라 물어볼 게 좀 있어서요. 글로리아가 사 갔던 5개의 나무패, 어디서 얻은 거예요?”

드라이어드가 만들어 준 세상과의 연결 고리를 버렸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소유자가 직접 돈을 꾸기 위해 전당포에 맡겼을 리는 더욱 없었다.

“내가 고객의 정보를 함부로 넘길 것 같아?”

“글로리아가 이 배지를 달고 있으면 다들 협조적으로 나올 거라 했는데.”

“끙….”

주인장은 이마를 꾹꾹 누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뭐, 불법적인 물건이라 해도 난 관련 없네. 난 그저 돈을 빌려준 대신 맡아 줬을 뿐이니까. 원래 전당포가 다 그렇게 운영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위험한 물건은 아니고 정말 출처가 궁금할 뿐인데요.”

“내게 오랜 세월감이 느껴지는 희귀한 골동품이라며 가지고 왔지. 처음엔 액자에 담겨 있지도 않았어. 가죽 주머니에 이것저것 한데 뒤섞인 채로 가져와 매대에 펼쳐 놓았으니까. 흙먼지도 잔뜩 묻고 녹슨 칼날도 함께 들어있어서 부딪혔을 테니 손상이 컸지. 그나마 쓸만하다 싶어서 고른 게 나무패였다네. 나머진 이쪽에서 복원 전문가를 불러와 쓰기엔 도저히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어.”

“흠….”

“나무패 5개를 전부 한 사람이 가져온 건 아냐. 또 누군가 비슷하게 상자에 골동품이라며 이것저것 담아 와 값을 치러 달라고 했지. 거기에도 나무패가 두어 개 들어 있었어. 나무패를 가져온 둘은 이 근방에서 유명한 스크래퍼들이야. 다이아를 마련하기 위해 땅에 떨어진 것이라면 뭐든 줍고 보는 놈들이지. 그 녀석들에게 나무패를 어디서 주웠는지 물어봐.”

“스크래퍼라….”

“마침 저기 오네.”

누군가 전당포에 들어서고 있었다.

여기저기 해진 거대한 가죽 주머니를 어깨에 메고 들어오던 한 여자가 우릴 슬쩍 보더니 쿵 소리가 나게 바닥에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물건이 잔뜩 들어 있는지 소리가 참 요란했다.

“선객이 있네. 나중에 찾아와?”

“그렇게 거칠게 내려놓지 말랬지! 그럼 그나마 쓸만한 물건도 손상된다고 몇 번을 말했지 않나! 선객은 무슨. 됐고 내가 물건을 볼 동안 저분들이나 상대해 드려라.”

“내가 왜? 날 찾고 있어?”

그 여자가 바로 주인장이 말했던 스크래퍼 중 한 명이었나 보다.

주인장이 가죽 주머니의 입구를 열자 온갖 흙 때 묻고 더러운 고물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는 경계하는 태도로 우릴 보았다.

“그쪽에게 다이아를 빌린 기억은 없는데. 혹시 다른 사람에게 내 채권을 사기라도 한 거야? 난 이미 약속된 이자가 아니라면 갚지 않을 거야.”

“그런 건 아니고요. 시들링, 그것 좀 잠깐 꺼내 봐.”

시들링은 내 말에 주머니에서 이름표를 꺼냈다.

“당신이 전당포에 이런 물건을 판 적이 있다고 들어서요. 어디서 주웠는지 말해 줄 수 있나요?”

그녀는 나무패를 유심히 보더니 길게 콧소리를 냈다.

기억을 못 하는 눈치가 아닌, 뭔가 못마땅하다는 태도였다.

“당신들이 누군지 알고 내 일터를 대뜸 공개하겠어? 괜히 알려 줬다가 싹 쓸어가 버리면 어떡하라고?”

“글로리아의 사람이다. 조심해라.”

“윽…. 아무리 그래도 말이지.”

주인장이 혀를 끌끌 차며 말하자 여자는 크게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난 주머니에 굴러다니는 다이아를 꺼내 그녀 옆에 놓인 매대에 올려 두었다.

“음…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지금 보니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다이아를 한 알 더 꺼내 올려 두자 그녀의 미소가 점점 더 진해졌다.

이런 방식은 글로리아가 분명 좋지 않다고 했지만, 나도 사람 봐 가면서 써먹을 눈치 정도는 있다.

적어도 이 여자는 다이아를 벌기 위해 일을 하고 있지 않나?

“기억이 거의 다 떠오른 것 같은데.”

또다시 다이아를 한 알 더 꺼내 올리자 표정이 대번 환해졌다.

“아, 기억났다! 났어! 여기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절벽이 하나 있거든?”

그래 놓고 사람 궁금해 뒈지라는 것처럼 말을 뚝 끊어 버리길래 마지막으로 다이아를 한 알 더 올려 두었다.

정말이지…. 잠깐, 절벽이라고?

“가는 길도 험악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면 일부러 찾지 않는 곳이야. 거기서 발견했어. 본래 인적이 드문 곳이 뭘 긁어 볼 게 많거든.”

“혹시 동굴이 있는 곳인가요?”

“아무리 겁대가리 없는 나라도 목숨은 소중한 법이야. 거길 다녀간 사람들이 죄다 실종됐다는데 절벽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지. 하지만 위치상으로는 동굴 근처가 맞긴 해.”

그녀는 그 근처에서 끈적이는 액체를 바른 갈고리에 긴 막대나 줄을 매달아 내려보내고 걸리는 물건이 무엇이든 끌어 올려 줍는다고 했다. 절벽 아래뿐만이 아니라 깊게 뚫린 구덩이 속으로도. 그렇게 나무패를 얻게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그럼 나 이거 전부 가져도 되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환한 얼굴로 매대 위의 다이아를 단숨에 쓸어갔다.

“원하는 정보도 얻었으니 저흰 가 볼게요.”

밝게 손을 흔들어 주는 여자와 달리 주인장은 아예 이쪽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애초에 배웅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나무패가 동굴에서 나온 물건일까? 동굴 근처라곤 했지만… 좀 수상한데. 왜 하필 거기서 발견된 걸까? 그것도 5개나. 시들링, 네 생각은 어때?”

그 역시 나처럼 고민하는 얼굴로 자신의 이름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패를 소유한 사람들이 동굴을 방문했다가 변을 당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같은 출신의 사람들이 우연찮게 다섯 명이나 그곳에 있었다는 것도 신기하지 않아? 대체 그곳에 뭐가 있다고.”

“아니면 이름표를 제작한 드라이어드가 그곳을 방문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거기서 만들었던 이름표를 잃어버린 걸 수도 있잖아?”

로웰라도 진지하게 추리에 끼어들었다.

“내 회양목 드라이어드가 본래는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했었다. 아마 그의 군락지였을 것이다. 그는 날개와 화관이 있는 포레스트의 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장성한 왕이 군락지를 떠나 살게 된 이야기에 대해선 듣지 못했다. 그곳이 어디였는지도. 아마 내 드라이어드들도 잘 모를 것이다.”

“그럼 혹시 동굴 근처에 회양목 군락지가 있는 게 아닐까? 너를 거두기 전부터 군락지에서 고아들을 거둬 길렀다면 나무패가 그 근처에서 발견된 까닭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아.”

“회양목은 스톤 필드 드라이어드다. 절벽과 바위가 많은 지형이라고 했으니 군락지가 있을 법하다.”

아직 동굴에 대한 정보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그 주변 지형에 대한 정보를 확실치는 않지만 조금 얻은 것만으로도 성과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정보는 천천히 좁혀 들어가면 되니까.

45번째 테라리움으로 가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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