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이아를 펑펑 쓰는 일이 남에게 해가 될 수 있다니.
그것도 내 다이아를 받게 되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말이다.
다이아는 돈.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지만 행복하기 위해선 꼭 돈이 필요한 거 아닌가?
그래서 지금껏 복권 당첨처럼 갑자기 생긴 공돈은 그야말로 최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로리아의 말을 듣다 보니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여태까지 다이아로 대부분의 일을 해결해 왔고, 다이아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아도 내가 그동안 사용해 왔던 다이아의 결과물이 일이 풀리는데 기여를 했다.
그랬었는데… 지금만큼은 다이아의 개입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봐야 한다니.
솔직히 반박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억지를 부릴 수 있으나, 이곳의 수장과 반목하면서까지 사람들에게 다이아를 뿌려 가며 목적을 이루기엔 난 선량한 의도를 가진 자선가가 아니었다.
“당신의 말은 알겠어요. 제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이곳의 방식을 따를게요.”
자신과 다툴 거라 생각했는지, 쉽게 수긍하는 내 모습에 글로리아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테라리움의 사람들이 당장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에요. 매일 복지 차원에서 끼니를 나눠 주고 있으니까요. 어떤 이들은 거주지가 저당 잡혀 살 곳을 잃게 되었지만 복지 시설의 입주 자격까지 팔아 빚을 냈기 때문에 거리를 전전하는 거예요. 당신이 어쭙잖게 끝까지 선행이란 가면을 썼다면 크게 실망할 뻔했어요.”
44번째 테라리움의 실태는 정말 종잡을 수 없었다.
“동굴에 대해 정보가 더 필요해요. 확실히 난이도가 아주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어 사전에 철저히 준비를 해야겠어요.”
“정말 위험한 일을 자처하겠다는 건가?”
만약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대한 단서를 얻을 방법이 한 가지라도 더 존재했다면 이렇게까지 44번째 테라리움에서 목을 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애드너가 일러준 전당포 외에 도저히 실마리가 없었다.
“위험한 건 알아. 그래서 지원을 부를 거야. 이리스 쪽과 합류하자.”
“그렇다면 나도 더는 말리지 않겠다.”
애초에 무엇이 우릴 위협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에 셋만 갈 생각은 없었다.
로웰라는 뉴비였고 난 드루이드로서의 능력이 불안했다.
이럴 때 길드원들의 도움을 받아야지.
“이미 동굴에 대해서는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고 있어요.”
그런데 글로리아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딱히 알아낸 것이 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유적지가 있다는 건 알지만…. 어떤 유적인지 언제 지어진 것인지도 확실치 않아요. 만약 44번째 테라리움에 역사적 자료가 남아 있었다면 도움이 됐겠지만. 애석하게도 전대 행정 관리원이 부임할 때 옛날 자료들을 전부 소각했어요. 예기치 않은 화재 사고가 났다고 포장했지만 실상은 달랐지요.”
“네? 전부 소각했다고요?”
모 나라의 문화 대혁명 같은 일이?
“테라리움을 제 입맛대로 고치기 위해서예요. 44번째 테라리움이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은 전대 행정 관리원의 업적이 컸어요. 어쨌든 계속 동굴에 대해 알아보고는 있어요. 정보가 들어온다면 곧바로 공유해 줄게요.”
“그럼 저희도 지원군이 합류할 동안 저희 나름대로 알아보겠습니다.”
44번째 테라리움에 정보가 없다면… 동굴과 인접한 다른 테라리움에 찾아가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나마 가까운 곳이 45번째 테라리움인데….
이리스 파티에게 합류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벌을 보내고 어떻게 정보 수색을 시작할지 고민했다.
“그래서 전당포에서 찾는 물건이 뭔가요?”
“음… 혹시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지상의 낙원이란 별명도 있고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곤 하는데. 외부로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비밀스러운 곳이라 이곳의 전당포에서 관련 물품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내 말을 들은 글로리아의 표정이 묘했다.
곧 그녀는 생각에 빠진 것처럼 입술을 두드리며 시선을 흩트렸다.
“파라다이스… 낙원… 회원제라….”
글로리아는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문 앞에 선 수행원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타토르의 물건을 가져와 줘.”
“네, 알겠습니다.”
다가온 수행원에게 지시를 마친 그녀는 다시금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정말 이걸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어쩌면 당신들이야말로 동굴로 가서 제 중요한 물건을 찾아와 줄 수 있는, 세계수가 보낸 사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
신이 보낸 사자라 표현할 정도라니. 이번 일에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이 연관되어 있는 걸까?
“제게서 중요한 물건을 빼앗았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했죠? 그자의 이름은 타토르. 이 44번째 테라리움에서 저와 끝없이 반목하는 사람이에요. 저와 사상이 맞지 않는 부분이 참 많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유일한 군림자가 되고 싶은 그의 눈에 제가 계속 거슬리기 때문인 거겠죠.”
테라리움의 지배자인 행정 관리원은 아예 논외로 치는군.
“타토르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그가 내게 어떠한 곳에 다녀왔다며 자랑을 했기 때문이에요. 아무나 갈 수 없는 특별한 곳에, 자신이 특별히 선정되어 초대를 받았다고 했죠. 나와 달리 자신은 자격이 있는 거라며 참 재수 없게 굴었는데…. 낙원 같은 곳이라 했어요. 그땐 그 자식 꼴도 보기 싫어서 대충 흘려듣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하네요. 그는 뽐내기를 정말 좋아해요. 자신이 다녀온 곳이 얼마나 특별한 곳인지 구구절절 설명했어야만 해요. 그런데 그 특별한 곳이 어딘지 정확히 말하기를 꺼려 했단 말이죠? 어쩌면….”
글로리아가 말하는 타토르라는 자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갈 수 있는 회원일 확률이 높다!
심지어 베일에 싸인 정확한 주소도 알고 있을 수 있었다.
잠시 후 수행원이 노트 사이즈의 작은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상자는 철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고 자물쇠가 두 개 채워져 있었다.
아주 중요한 물품을 보관하는 것처럼 보안이 철저해 보였다.
커피 테이블 위에 상자를 올려둔 수행원은 두 개의 자물쇠 중 하나를 열쇠로 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글로리아는 나머지 자물쇠를 이리저리 만져 보다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목걸이를 풀어냈다.
옷 속에 숨겨진 목걸이 장식의 정체는 열쇠였다.
둘이 따로 열쇠를 보관하면서까지 보안에 신경 쓰는 상자라…. 뭐가 들어 있는 걸까?
철컥.
마지막 자물쇠가 풀리고 상자가 열리자 꼭꼭 감춰 둔 내용물이 드러났다.
기대했던 금은보화는 없고 종이 뭉치가 가득했다.
“제 물건을 찾기 위해 사람을 보내 타토르의 사택을 수색했는데 결국 찾지 못했다고 했죠. 하지만 빈손으로 나오긴 억울해서 그자의 물건들을 가져오라 했어요. 서류든 뭐든, 은밀하게 숨겨 놓은 것이라면 전부. 이래야 서로에게 공평한 거니까요. 그중 이런 게 있었어요.”
그녀는 한 번 접혀서 명함 사이즈 정도가 된 검은색 종이를 내게 건네주었다.
종이를 펼치니 안에 붉게 빛나는 글씨로 초대장이라고 적혀 있을 뿐, 달리 어떠한 문구도 적혀 있지 않았다.
혹시 특수한 처리를 해서 보통 사람은 볼 수 없는 뭔가가 있는 게 아닐까?
“비밀스러운 초대장… 어때요? 관련된 물품 같나요?”
“수상한 냄새가 풍기는 물건은 맞네요.”
칼롱이 내게 전해 주었던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홍보 팸플릿과 비슷하게 생기긴 했다.
검은 배경에 붉게 빛나는 글씨.
글로리아는 내게서 다시 종이를 가져가 상자 안에 넣어 두었다.
임무를 완수하면 주겠다는 거겠지?
“어쩌면 이곳 전당포 어딘가에 당신이 찾는 파라다이스 테라리움과 관련된 물품이 있었던 것은 맞을 거예요.”
상자는 다시 닫히고 자물쇠가 잠겼다.
“내가 저택에서 이 초대장을 훔친 이후부터 타토르는 전당포를 뻔질나게 드나들었거든요. 그는 흑색지나 붉은 글씨가 새겨진 서류를 찾고 있다고 했어요. 아마 당신보다 타토르가 먼저 전당포에서 관련 물품을 얻게 되었고 연결 고리를 만든 거겠죠. 그렇다면 전당포를 뒤져 보는 대신 타토르에게서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대한 정보를 수색하는 방향으로 틀게요. 괜찮나요?”
“아무래도 그게 더 효율적일 것 같네요.”
“당신이 제 물건만 찾아와 준다면 저 역시 반드시 당신이 만족할 만한 정보를 찾아내고 말겠어요.”
“그러는 당신은 뭘 찾고 있는데요?”
내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했던 것과 달리, 글로리아는 크게 망설이는 눈치였다.
중요한 물건을 찾아 달라고 했지만 한 번도 그 물건의 정체에 대해 제대로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서류예요. 제 이름이 적혀져 있을 테니 한눈에 뭘 찾는지 바로 알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어요. 만약 당신이 의뢰에 성공한다면 알 수 있겠죠.”
의뢰를 맡기려는 사람에게도 정확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비밀스러운 서류.
위험한 동굴 안에서 그 종이 한 장을 찾아낼 수 있기는 할까?
“어쨌든 알겠어요. 그럼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동굴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러 갈게요.”
“잠시만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글로리아가 만류했다.
그녀는 줄곧 대화를 상대했던 내가 아닌 시들링을 바라보았다.
“제게 이 물건이 무엇인지 알려 주실 수 없나요?”
감정사가 살펴봤어도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나무패.
“부적이라면 상관없지만 저주라든가 내게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물건인지 궁금해서요.”
말없이 나무패를 바라보던 시들링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걱정할 필욘 없다. 이건 단순히 이름이 적힌 이름표다.”
“이 문양이 글자였다고요? 어딜 봐도 글자로 보이지 않는데.”
“이름표?”
“알아볼 수 없을 만하다. 그건 드라이어드가 인간의 글씨를 흉내 낸다고 쓴 것이니까.”
“그럼 이건 드라이어드가 만든 이름표라는 건가요? 왜 그런 걸 만들죠?”
영험한 효능을 가진 부적도, 저주가 담긴 매개체도, 특별한 장식품도 아닌 그저 단순한 이름표였다니.
정체를 알게 된 글로리아는 어떻게 생각할까?
우릴 상대하기 위해 꽤 많은 다이아를 치르고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골동품이란 생각에 사들였을 텐데, 그저 드라이어드가 사람의 글자를 흉내 내 만든 이름표였다는 걸 알면 손해를 봤다고 생각할까?
“이름 없는 고아들을 거둔 드라이어드가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며 함께 만들어 준 것이다. 그는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월렛을 들고 다녀야 한다고 알고 있었고, 월렛이 단순히 이름표인 줄 알았었지. 월렛이 없는 고아들은 사회에 나가 활동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만들어 주며 고아들에게 사회와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준 것이다.”
시들링의 말을 들은 글로리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낮게 읊조렸다.
“더없이 소중하고 훌륭한 물건이었네요.”
그녀는 나무패를 사들인 것을 전혀 후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