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9화 (289/604)

그녀가 우릴 도와줄 수 있다?

바라는 대가가 분명히 있는 데다 그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닐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일단 들어는 볼게요. 우릴 부른 이유가 뭐죠?”

“단순해요. 내 밑에서 일해 줘요.”

순간 테라리움에 들어서자마자 드루이드를 과시용 호위 인력으로 중개하기 위해 몰려들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글로리아도 결국 그런 걸 원했던 건가?

“그럴 수는 없어요. 우린 이미 말했다시피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요.”

“평생을 내 밑에서 일하라는 게 아니에요. 아, 그래요. 내가 너무 이곳의 화법에 익숙해졌군요. 난 당신들에게 어떠한 의뢰를 맡기고 싶어요. 또한 이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선 내 밑에서 일하고 있다는 신분이 필요할 거예요.”

“의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글로리아의 표정이 갑자기 험악해졌다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워낙 빠른 변화라 계속 주시하고 있지 않았다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였다.

“내게 아주 중요한 물건이 있어요. 그걸 되찾기 위해 수도 없이 노렸지만 결국 뺏기고 말았지요.”

되찾는다는 말은 원래 자기 소유였다는 거겠지?

“처음엔 그자의 저택 아주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미 당신들을 섭외하기 전에 수없이 많은 숙련자들을 저택에 잠입시켰죠. 전혀 소득이 없었지만 그래도 알아낸 것은 있었죠. 저택엔 내가 찾는 물건이 없다.”

찻잔을 쥔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이나 무서움 때문이 아닌 분노에 의한 떨림이었다.

“정말 날 엿 먹이기 위해선….”

글로리아는 그 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 뒤로 그자가 소유한 사택이나 별장 모든 곳을 사람을 보내 뒤져 봤어요. 하지만 그 어디에도 없었지요. 이제 남은 곳은 단 하나뿐이에요.”

그녀는 마저 차를 호록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개인 집무 책상으로 걸어가 서랍을 열더니 돌돌 말린 두루마리를 들고 와 커피 테이블에 펼쳤다.

그것은 어느 한 지점이 붉은색 x자로 표시된 지도였다.

“그자가 아주 비밀스레 어떤 땅을 매입했다는 정보를 어렵사리 입수했죠. 44번째 테라리움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에요. 정찰을 보내서 알아본 바론 가파른 절벽 중앙에 동굴이 있는 곳이었어요.”

글로리아는 표시된 구역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주변은 바위가 많고 경사도 심해서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든 곳이에요. 굳이 그런 곳을 비싼 값을 치르고, 그것도 아주 비밀스럽게 매입할 이유가 뭘지 궁금해졌죠. 동굴 안엔 고대의 유적이 있을 거란 소문이 있더군요. 그자는 이곳을 독점해서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을 모두 독차지할 생각이었던 거겠죠. 거기다 아주 은밀한 곳에 위치한 비밀스러운 장소라 중요한 물건을 숨겨 놓기에도 좋을 거예요. 사방에서 잠입하기 쉬운 건물보다 동굴은 입구만 막으면 지키기에도 안성맞춤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 표시된 지역의 동굴로 가서 당신에게 중요한 물건을 찾아 달란 의뢰인가요?”

내 질문에 글로리아는 잠깐 동안 말없이 날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눈빛이었다.

“역시 외부인이라 들은 것이 없으니 이 장소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군요…. 사실대로 말해야겠죠? 장사의 기본은 신뢰니까.”

운을 띄우는 그녀의 말 때문에 일순 약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글로리아는 펼쳐진 지도를 휙 뒤집었다.

뒷장엔 빼곡한 글자와 동그라미가 처진 도식화가 존재했다.

순서에 따라 나열한 듯 화살표는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대충 휘갈겨 쓴 듯한 글자에서 유독 눈에 띄는 단어는 ‘사망, 실종’이었다.

약한 불안감은 순식간에 섬뜩함이 되었다. 양어깨가 느닷없는 냉기로 오소소 떨려 왔다.

“이 의뢰는… 아주 난이도가 높을 거예요. 어쩌면 당신들 이름 역시 이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수도 있겠죠.”

“죽을 수도 있는 의뢰라는 건가 봐.”

조용히 중얼거리는 로웰라의 목소리엔 옅은 공포도 있었지만 기대감이 주를 이루었다.

“사실 그 자가 이곳에 물건을 숨긴 것은 어느 정도 기정사실화되었지만… 웃긴 건 그자도 이젠 그 물건을 되찾을 방법이 없다는 거겠죠. 숨기러 들어가는 건 쉬워도 다시 나오는 건 힘들다는 이야기예요.”

글로리아는 동그라미 처진 부분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엔 유적지를 발굴하려던 인부들이었어요. 모두 실종되었지요. 어쩌면 전부 죽었을 수도 있어요. 내가 이 동굴의 존재 여부를 알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에요. 일꾼으로 파견된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으니 그들의 가족들이 날 찾아왔거든요. 그들은 내가 테라리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고 가족들의 행방 역시 알고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때 당시의 난 아는 게 없었지요. 말 그대로 44번째 테라리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내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다니.”

그녀는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는 얼굴로 눈을 찌푸렸다.

“그래서 일꾼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을 추적해 동굴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다음은 그곳에 정찰을 보낸 내 일꾼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죠.”

“전부 사라졌다고요?”

“분명 실력 있는 드루이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사라졌어요. 동굴 안으로 들어간 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단 말이에요. 입구 근처엔 전투가 벌어진 흔적들은 없었어요. 참으로 이상하지 않나요? 그 후로 족족 동굴로 파견한 사람들이 전부 행방이 묘연해졌어요. 그 근처를 하루 종일 감시하는 사람이 있는데 들어가는 사람은 있어도 나오는 사람이 없다고만 말했답니다.”

그런 기이한 장소에 대해 듣고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던전.

갑자기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던전이란 게이머들의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콘텐츠 아닌가?

공략과 클리어에 따른 보상, 명성.

던전은 아주 기본적인 컨텐츠이자 RPG에서 필수 콘텐츠나 다름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네요?”

아, 티가 났나 보다.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어쨌든 이곳에 잠입해서 제 물건을 찾아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당신이 전당포에서 찾는 물건이 무엇이든, 내가 테라리움의 온 전당포를 뒤져 관련된 물건을 전부 구매해 놓겠어요. 그리고 이것.”

글로리아가 나무패가 담긴 액자를 가리켰다.

“이것도 보상으로 드리죠. 어떤가요? 절 도와주시겠나요?”

“거절해라.”

대뜸 수락하려는 날 시들링이 저지했다. 그의 저지는 익숙했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말해 놓고도 아차 싶었는지 내 눈치를 본다는 점이었다.

그가 날 말리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오랜 여행으로 숙련된 그가 느끼기에 아주 위험한 일이라는 감이 온 것이겠지.

“들어간 모든 자들이 행방불명된 데다 어떠한 곳인지 정확한 정보도 없다. 그런 위험한 곳을 단순히 앞의 보상들을 위해 공략하기엔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의뢰를 들어줄 수 없다면 나 또한 당신들의 일에 협력할 수 없어요.”

“네가 잘하는 방법을 써라.”

시들링이 말하는 방법이란 언제나와 같이 다이아로 밀어붙이라는 말이었다.

정말 단순하게 따져 본다면 나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글로리아가 테라리움을 사들이지 않는 한 어쭙잖게 다이아를 휘두르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난 정말로 테라리움을 다이아 부담 없이 먹어 치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28번째 테라리움이 막 정비를 끝낸 와중에 이렇게 문제가 많은 44번째 테라리움을 또 내 수중에 두라고?

새로운 테라리움이 생긴다는 것은 새로운 가드닝 스킬, 세계수 가지와의 연계 등등 다양한 이득이 있지만 뭐든지 과분하면 독이 됐다.

단순히 이곳이 문제가 많은 테라리움이라서라기보단 내가 버거웠다.

그리고 고작 전당포를 들쑤시자고 테라리움을 꿀꺽하는 것도 뭔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처럼 다이아로 이곳을 들쑤시겠다는 건가요? 뭐, 해 볼 만큼 해 보세요. 하지만 원하는 그림은 절대 나오지 않을 겁니다.”

글로리아는 시들링의 말에 기분이 크게 상한 눈치였다.

“당장 이곳의 사람들은 다이아에 굶주려 있죠. 당신 앞에서 배짱을 부리던 전당포 주인들도 빚을 떠안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부티크에서 했던 것처럼 갑자기 큰 다이아를 내놓는다면 결국 어떤 이들은 현실에 순응하고 굴복할 수도 있을 거예요. 막무가내로 다이아를 막 뿌리다 보면 굴복한 사람들을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들도 많아지겠죠.”

그녀는 우릴 경멸하는 눈이 되었다.

“당신의 행동은 이 테라리움을 크게 망쳐 놓겠죠.”

“다이아를 많이 쓰면 좋은 거 아닌가?”

로웰라가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당신은 이상하게도 다이아를 쓰는데 손익을 전혀 따지지 않아요. 한편으론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과감한 투자를 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또 한편으론 손해를 전혀 따지지 않아도 될 입장이란 거겠죠. 혹시 저자의 생각처럼 우리 테라리움에 적선이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런 마음이 없잖아 있었기에 살짝 뜨끔했다.

“당신이 이곳에서 경제를 흔들어 놓을 만큼 다이아를 뿌렸다 쳐요. 그렇다면 지금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과 고아들, 빚더미에 허덕이며 하루에 한 끼로만 때우는 모든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을까요? 아니요, 다른 테라리움은 다를지 몰라도 44번째 테라리움은 아니에요. 당신의 다이아는 정당한 대가를 바라지 않는 눈 먼 다이아나 다름없어요.”

글로리아는 평정심을 잃고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도박에 대한 중독성은 잘 알고 있었고 도박에 빠져 있던 루프가 다시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안전장치를 걸어뒀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홀가분히 털어냈지만….

“그들이 갑자기 뚝 떨어진 다이아를 가지고 가장 먼저 무얼 할 것 같나요? 음식을 사고 옷을 살까요? 아뇨, 그들은 바로 도박장으로 달려갈 거예요. 어차피 큰 노력 없이 얻은 다이아예요. 쉽게 얻은 다이아는 쉽게 쓸 수밖에 없어요. 더구나 아주 어린 나이부터 그들은 도박에 학습되어 있어요. 테라리움의 수많은 기득권층이 그렇게 학습시켜 왔고 테라리움이 지금까지 굴러갈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죠. 그들은 가진 다이아를 더 크게 불릴 수 있을 거란 꿈을 안고 테라리움에 즐비한 도박장으로 달려갈 거예요.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손잡이만 당기면 할 수 있는 슬롯머신 앞에 앉아 있을 거예요.”

글로리아의 예시는 너무나도 극단적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냐고요? 정상적으로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다이아를 벌기 위해 노동력을 대가로 지불하고 있으니까요.”

문득 글로리아의 저택에서 회사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테라리움의 거주자 대부분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해도 믿을 만한 숫자였다.

아무리 큰 저택이라고 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필요할까?

“그들은 절대 도박으로 일확천금의 꿈을 이룰 수 없어요. 도박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이를 가만히 둘 것 같나요? 모든 걸 잃은 사람들이 생각을 고쳐먹고 다신 도박에 손을 대지 않을까요? 전혀요. 그리고 이젠 다른 꿈을 갖게 되겠죠. 바로 당신처럼 대가 없이 다이아를 뿌리는 사람을 말이에요. 당신이 이 테라리움에 독을 풀겠다는데 내가 가만 두고 볼 것 같나요? 차라리 내 의뢰를 받지 못하겠다면 떠나세요. 이 테라리움에서 나와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을 겁니다.”

그 말은 즉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이 테라리움에서 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철저하게 방해하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글로리아의 말에 난 머리를 망치로 크게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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