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말한 부티크는 내가 옷을 잔뜩 사재기했던 아라크네 부티크를 말하는 거겠지?
그곳이 내일부터 아무런 손님을 받지 못하게 된다고?
물론 점원들이 내 말만 듣고 원래 있던 손님들을 내쫓았을 뿐만 아니라 좀 심하게 불친절하게 대하긴 했지.
하지만 이건 그들이 단순히 감정이 상해서 다시는 방문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뭔가 더 고약한 속사정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문 너머로 벌써 뛰어가지 않으면 쫓지 못할 정도로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지고 있었다.
솔직히 그녀를 따라가지 않아도 내가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나무패에 관심이 있는 것은 시들링이지, 내가 아니니까.
“저 여자 누구예요?”
“직접 따라가 보지 그래? 내가 여기서 입이라도 잘못 놀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테니. 테라리움에서 얼마나 요란하게 굴었으면 저분이 직접 행차한 거야!”
상당히 무서운 사람이었잖아? 그녀의 정체를 도통 종잡을 수가 없다.
보통의 페이크 로열은 아닐 거란 느낌이 들었지만….
“헐,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럼 저도 따라갔다가 사라지면 어떡해요?”
주인장은 우리들의 드라이어드들을 힐끔 보더니 책을 펼치곤 읽기 시작했다.
대놓고 딴짓이라니…. 더 이상 말 걸지 말라는 눈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친절한 양반이구먼.
드라이어드에 시선을 뒀다는 건 실력에 따라 다르다는 걸까?
“언니, 어떡해? 따라갈 거야?”
“아니, 나 혼자 간다. 함정일 수도 있다.”
시들링이 대뜸 혼자 상대하겠다고 나섰다.
문득 커뮤니케이션에 어리숙한 시들링이 그녀를 상대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등장한 지 몇 분 만에 우리를 완벽하게 동요시키고 사라진 사람이었다.
시들링 따위는 금방 수족처럼 부릴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파필리온 같은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라, 전처럼 시들링이 호구 잡힐 그림이 어렵지 않게 예상되었다.
얘는 전투에서나 강하지….
“그 여자가 가져간 물건이 신경 쓰이는 것 맞지? 만약 갖고 싶다면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하라고 하면 어떡할 거야? 다이아론 안 될 것 같던데.”
“다 하겠다.”
“그렇게 앞뒤 따지지도 않고 하다못해 기간도 정해 놓지 않고 다 하겠다니. 벌써부터 너 혼자 갔을 때 어떻게 될지 훤하다, 훤해. 그냥 따라가자. 느낌상 저 사람이 페이크 로열의 중추인 것 같은데 뭔가 많이 알고 있겠지. 계속 전당포를 뒤지면서 문전 박대만 당하느니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게 방법일 거야.”
“위험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다.”
“여차하면 드라이어드들이 지켜 주겠지.”
결국 여자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한참을 멀어졌던 그녀는 우리가 따라오는 기색이 보이자 슬쩍 멈춰 섰다가 걸음 속도를 늦추었다.
도착한 곳은 테라리움에 도착하자마자 눈길을 끌었던 으리으리한 건물이었다.
과수원 바로 근처에 세워져 과수원 건물과 위용을 겨루고 있었는데, 꼭 기세를 억누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테라리움의 중심이 되는 과수원은 여행 온 드루이드들이나 주민들의 왕래가 잦은 랜드마크 지역이었고, 이 때문에 주변에 상가가 활성화가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과수원 주변은 땅값이 상당히 비쌌다.
그런데 일개 거주지가 다른 시설들을 죄다 누르고 떡하니 테라리움 중심지에 세워져 있다니.
드넓은 정원엔 경호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문을 열어 주는 시종도 따로 있었다.
건물이 큰 만큼 곳곳에 쉴 새 없이 창문을 닦거나 바닥을 쓰는 청소부들도 많았고, 물건을 든 사람들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단순히 개인 집이라기엔 회사에 버금갈 정도로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
집주인이 지나가자 다들 알은체를 하기보단 티 나게 시선을 피했고, 오히려 뒤따라가는 우리에게 진득하게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리 곱지만은 않은 시선이었다.
이 공간 안에서 집주인은 대하기 어려운 존재, 우리는 껄끄러운 존재라는 것이 느껴졌다.
“집 안이 과수원보다 훨씬 넓은 것 같네요?”
“일할 사람이 많으려면 넓어야죠.”
비아냥이었는데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미로 같은 저택을 한참 걸어 가장 은밀하고 안전한 곳일 법한 깊숙한 방에 도달했다.
이 정도로 안까지 들어왔으면 도망가는 것도 한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여태 봤던 방보다 세 배는 커 보이는 방 안의 벽면과 수납장엔 온갖 물건이 가득했다.
금과 보석 등 한눈에 봐도 반짝거리고 비싼 값을 할 물건들부터 용도를 알 수 없고 부서지기 직전의 세월감이 느껴지는 물건까지 다양했다.
그곳에 전당포에서 가로챈 나무패를 두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전당포 주인들이 그렇게 다이아에 목매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큰손이 여기 계셨구먼.
여자가 자리에 앉자 커피 테이블 위로 수행원이 포장된 상자를 올려 두었다.
“아데로를 불러와.”
수행원은 그녀의 지시에 빠르게 방을 나갔다.
“그렇게 서 계시지만 마시고 앉으세요. 경계하실 필요도 없어요. 제가 당신들에게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하듯 저 역시 당신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요.”
그녀는 이유를 말하는 대신 우리 손목의 테라리움 아티팩트를 바라보았다.
우리와 다르게 그녀의 손목은 허전했기에 드루이드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안심할 수가 없는 것이 우린 드라이어드를 부리지 않더라도 손에서 불을 뿜는 베스탈리스를 이미 만난 경험이 있었다.
언제고 갑자기 돌변할 수 있지만… 수집품이 가득한 방 안에서 섣불리 과격한 행동을 보이진 않겠지.
그런 판단이 들어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날 따라서 시들링과 로웰라도 자리를 잡았다.
우리 사이엔 장시간 침묵만이 흘렀다.
그녀는 우리를 살피며 흥미롭다는 눈빛만 보낼 뿐 딱히 먼저 입을 열지 않았고, 난 묻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도통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로웰라는 눈치가 좋아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란 걸 깨닫고 내게 의지하고 있었고 시들링은 애초에 내가 아닌 다른 이들과 나서서 대화를 이끌어 가는 인물이 아니었다.
무거운 침묵이 깨진 것은 문을 열고 등장한 다른 이들 때문이다.
한쪽은 다과를 날랐고 다른 이는 여자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후 우린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커피 테이블 위의 포장 상자에 집중했다.
“살펴봐요.”
그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대충 덕지덕지 기워진 포장지를 뜯어내고 액자를 열어 나무패를 살피기 시작했다.
시들링의 고집스러운 시선이 다시금 나무패에 아련하게 떨어졌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이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굼뜨지는 않은 동작으로 세심하게 나무패를 살피기 시작했다.
다루는 손길에서 노련함이 느껴졌다.
“억지로 세월감을 흉내 낸 물건은 아니며 보시는 것처럼 백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물건입니다. 목재는 치밀하고 균일한 광택과 재질로 보아 회양목으로 보입니다.”
회양목이란 말에 시들링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문양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이라 용도는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데 옛날에 사용하던 부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 정확한 용도를 조사해 오겠습니다.”
보고 만지는 것만으로 목재를 파악하다니.
“그럴 필욘 없어요. 저자가 이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눈치니까.”
그녀가 언급한 사람은 시들링이었다.
“가 봐도 좋아요.”
그녀의 말에 그나마 조용한 방 안에서 소음을 내던 이들이 모두 떠나 버렸다.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난 글로리아예요. 다이아를 조금 만질 줄 아는 보잘것없는 사람이랍니다.”
제 스스로 보잘것없다 말하는 사람이 이렇게 큰 저택에서 수많은 사람을 굴리다니.
“전 제이, 이쪽은 시들링과 로웰라예요. 우린 드루이드로 44번째 테라리움엔 여행차 들렀어요.”
“송구하게도 당신들에 대한 정보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답니다. 이곳의 행정 관리원은 참으로 입이 가벼운 자거든요.”
행정 관리원과 직접적으로 결탁한 인물이라….
과수원 옆에 대놓고 거주지를 둘 정도로 보통 비범한 인물은 아닐 거라 예상했지만….
글로리아의 말은 외부인이 테라리움에 들어서는 순간 월렛으로 모든 정보를 볼 수 있는 행정 관리원이 입이 가벼운 자란 사실보다, 어쭙잖게 거짓말을 할 경우 들통날 거란 압박감과 그녀 자신이 테라리움에서 얼마나 영향력이 큰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름을 속이는 등의 잔재주를 썼다면 비웃음을 살 뻔했다.
“난 사실 이 물건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제 심미안에 맞지 않거든요. 나조차도 단번에 이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전시해 봤자 그 누가 알아보기나 하겠어요?”
“그럼 내게 팔아요.”
“하지만 이것이 가져다줄 다른 이득에는 관심이 아주 많죠. 벌써부터 당신들이 줄줄이 제게 엮여 왔잖아요? 그리고 당신, 눈에 아주 익어요.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나요?”
시들링은 글로리아의 은근한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길드 수배범이다.”
아주 대놓고….
“그래요…. 수배지에서 당신의 얼굴을 봤군요. 그렇다면 그 유명한 아이언비스트라는 건데…. 그런 이가 탐내는 물건이라…. 방금 물건의 가치가 올라갔네요.”
“대체 왜 우릴 따라오라고 한 건가요?”
내 물음에 글로리아는 가볍게 웃으며 찻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좋은 향기를 내는 따뜻한 액체를 한 모금 넘긴 그녀는 한껏 음미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계속 그렇게 테라리움을 휘젓고 다니는 동안 내버려 두길 원했나요? 어차피 당신들의 방식으론 테라리움 안에서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을 거랍니다. 하다못해 작은 식료품 가게조차도 당신들에게 빵 한 조각 팔지 않을 거예요.”
“밉보였다는 건가요?”
“그런 단순한 보복보단 좀 더 음습하고 은밀한 관습을 어긴 거죠. 여행으로 상당히 많은 다이아를 축적하신 것 같은데 이 테라리움을 통째로 사들여 깡그리 청소하지 않는 한, 어쭙잖게 찔러 보는 행위는 반감만 살 뿐이랍니다. 이곳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긴밀하게 형성된 유대감이 있어요. 외부인이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속으로 더 단단하게 뭉치죠. 당신은 사람들을 적대하는 대신 한없이 굽히고 들어갔어야 했어요.”
“텃세라는 거네요?”
“음… 틀린 말은 아니죠.”
한마디로 난 단순히 페이크 로열이냐 아니냐를 떠나 제대로 텃세에 당했다는 말이었다.
44번째 테라리움은 자신들끼리 고이고 고여 썩어 버린 곳이었다.
“하지만 난 당장 이곳의 전당포에 관심 있지 오랜 시간을 들여 잘 보인 후 이곳 사회에 편입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그렇지만 그것이 이곳의 룰이랍니다. 이걸 지킬 수 없다면 여길 떠나셔야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로. 하지만 또 모르죠. 그래서 제가 당신들을 부른 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