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7화 (287/604)

바짝 열이 오른 시선들이 쏟아졌다. 치욕적인 상황에 다들 일의 원인인 나를 노려보았다.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지만 어쩌겠는가?

나를 누르려면 내가 이곳을 단독으로 사용하겠다며 지불한 다이아보다 더 얹어서 내놓으면 된다.

그럼 이 박쥐 같은 점원들은 좋다고 즉시 날 쫓아낼 것이다.

“하, 알겠어. 이건 내가 봐 뒀던 거니까 이거나 계산해 줘. 오늘 중요한 자리에 꼭 입고 가야 하니까.”

차라리 자리를 빨리 뜨고 말겠다는 심정인지 코트를 든 남성이 점원을 재촉했다.

악감정은 없다 했는데 왜 이렇게 아니꼬운지 모르겠다.

이곳을 오며 목격한 여러 광경들과 테라리움의 경제가 철저하게 자신들의 위주로 돌아가게 만든 부조리가 가슴 한구석에서 불길을 지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겨우 이런 곳에서 이런 방식으로 왕 노릇을 하고자 그랬단 말이지.

“저것 좀 보여 주겠어요?”

남성이 든 코트를 가리키자 어이없다는 눈빛이 내게 달려들었다.

점원이 재빨리 코트를 빼앗아 가져왔다. 망설이는 태도 따위는 전혀 없었다.

의류점은 철저하게 자본에 따라 저울추가 확연하게 기울어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시들링, 어때? 네가 입어 볼래?”

“이게 무슨 짓이야?”

코트를 빼앗긴 자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날 씹어 삼킬 듯 분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들링은 묘한 눈으로 점원이 든 코트를 바라보다 잠자코 집어 들었다.

“내 동행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아직 값을 치른 것도 아닌데 뭐 어때?”

“내가 먼저 고른 것이 아닌가!”

“못 들었어? 내가 여길 하루 빌렸다니까?”

눈빛만으로 이미 나를 수차례 팼을 것이 분명한 그는 씩씩대다가 바닥을 전부 깨부술 기세로 가게를 나갔다.

괜히 싸움으로 번졌다간 물리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자신이 손해를 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나와 달리 시들링과 로웰라는 허리춤에 무기를 매달고 있었고,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세 명 모두의 손목에 테라리움 아티팩트가 채워져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언제든지 드라이어드를 꺼낼 수 있는 드루이드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언니, 코트가 안 맞는데? 팔뚝이 안 들어가.”

로웰라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넌 안 맞으면 그냥 입지 말지, 왜 그러고 있어?”

건넨 코트를 묵묵히 입어 보려던 시들링은 팔도 채 꿰어 넣지 못한 채로 요지부동이었다.

뒤에서 옷 입는 것을 도와주던 점원만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코트를 붙들고 있었다.

시들링이 무리하게 팔을 욱여넣다가 찢어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는 눈치였다.

“입어 보라고 했지 않나?”

“억지로 입어 보란 건 아니었어. 됐어, 지금 보니 네게는 영 안 어울리네.”

그때 한쪽에서 조용한 움직임이 눈에 띄었다.

좀 전의 상황을 반면교사 삼아 아무 말 없이 손에 든 물건을 결제하려던 사람이었다.

이번엔 스카프라….

“저것도 좀 보여 줘 봐요.”

“이…!”

내가 가리키자 억센 손이 구겨져라 스카프를 움켜쥔다.

도토리를 지키려는 다람쥐처럼 통통하고 작은 손이 점원의 손을 피해 이리저리 스카프를 휘둘렀다.

“그리고 저것도.”

“이건 내가 먼저 본 거야!”

프릴이 과하게 들어간 연노란색 블라우스는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유치원에서 장난감을 둔 아이들의 싸움이 이처럼 유치하겠지.

가만히 앉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는 족족 제 손에 들린 물건을 사수하려는 사람과 빼앗으려는 점원 간의 다툼이 일어났다.

“날 이런 식으로 대해 놓고 이 집이 무사할 것 같아!”

“입점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이 바닥 생태를 모르나 본데,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될 거야!”

“여기 말곤 갈 데가 없을 줄 알아?”

마침내 쫓겨나는 자들의 저주가 무시무시했다.

날 등에 업고 기고만장한 룩스리아도 어쩐지 뜨끔한 얼굴이 되었다.

“로웰라, 마음에 드는 것 있으면 골라 봐.”

“음, 하나같이 전투를 하기엔 너무 거추장스러워 보이는데… 그래도 꾸며야 하는 게 목적이니까 좀 골라 볼까?”

로웰라는 뒷짐 진 채 손님들에게서 빼앗아 행거에 잔뜩 걸려 있는 옷들을 이리저리 구경하기 시작했다.

시들링에게도 골라 보라고 제안했지만 도통 움직이지 않길래, 인형 옷 입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것저것 골라서 대 보았다.

하지만 막상 그럴싸한 옷을 골라도 밖에 나가 검을 휘두르는 근육질에게 맞춰진 사이즈가 아니다 보니, 예쁜 옷보단 맞는 옷 중에서 골라내야만 했다.

“이거 미미르가 입으면 웃길 것 같지 않아? 꼭 뒤뚱뒤뚱하는 펭귄처럼 보일 것 같아.”

처음엔 주저하던 로웰라도 나중엔 신이 나서 이것저것 고르기 시작했다.

당장 치장용으로 몇 벌 필요할 뿐이었지만 훗날 이러한 상황이 또 올 수도 있고, 손님들이 잔뜩 협박하고 나간 이후로 룩스리아의 표정이 영 어둡길래 한 번이라도 손때가 탄 물건들은 전부 구입해 주었다.

과수원 직원들에게 선물이라도 보내 줄까 하는 생각에 부티크에 디스플레이된 물건 대부분을 포장시키고 있는데도 룩스리아의 눈 속엔 옅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그렇게 자본에 휘둘려 철저하게 편중된 서비스를 제공했으면서 이제 와서 후회하는 얼굴은 또 뭐람.

몇 날 며칠을 팔아야 나올 매출을 한 시간도 안 되어서 가볍게 뛰어넘었는데.

이 가게 입장에서야 매출액이 고공 행진을 하는 수준이겠지만, 솔직히 이 정도는 난쟁이들 간에 기별도 안 갈 정도였다.

철저하게 체계적으로 내게 계산서를 들이미는 황금 호박 상회가 이것보다 다이아를 더 잘 썼다.

쉴 새 없이 핸드폰에서 쏟아져 나오는 다이아를 보며, 로웰라는 아예 이 가게를 사는 거냐며 농담 식으로 말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룩스리아는 내게 어울릴 만한 정장 몇 벌을 골라 주었고 그중 내 취향과 맞지 않더라도 최대한 사치스러워 보이는 옷들을 골랐다.

실시간으로 맞춰 수선까지 하고, 우리 셋은 들어올 때와 달리 꽁지깃을 펼친 공작새처럼 한껏 화려해진 모습으로 의류점을 나왔다.

시들링의 날개 달린 칼미아와 내 화관 쓴 데이지를 일부러 불러낸 후 거리를 거닐자 오고 가며 보았던 페이크 로열들과 하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이 정도면 전당포에서 다짜고짜 쫓아내지 않겠지?”

“한눈에 봐도 아기 때부터 다이아를 굴리며 놀았을 것 같이 보이지 않을까?”

로웰라는 턱을 치켜들고 분홍색 깃털이 잔뜩 달린 부채를 활짝 펴 살랑살랑 바람을 일으켰다.

그녀는 아무리 봐도 엄마 옷을 몰래 차려입은 아이처럼 영 어색했지만 시들링은 달랐다.

맞는 옷을 찾다 보니 소매가 크고 상하의가 이어진, 성직자들이 입을 법한 검은색 사제복 스타일의 옷을 고르게 되었다. 처음 봤을 땐 이걸 대체 누가 소화하나 싶었는데 그게 시들링이었다.

은실로 마감된 넓은 천 허리띠로 허리를 조이고 짧은 케이프와 브로치, 가는 체인으로 장식을 했을 뿐인데 갑옷을 입었을 때의 날이 선 모습은 어디 가고 경건하고 거룩해 보일 지경이었다.

애초에 키가 크고 어깨가 넓으니 옷발이 아주 잘 받는 것 같았다.

영화 속에서 막 뛰쳐나온 해외 배우 같은 모습에 대본만 쥐여 준다면 누구라도 그가 배우라 믿을 것 같았다.

다만 덩치와 인상 때문인지, 악마를 퇴치하는 사제들이 나오는 영화를 찍는다 해도 주기도문을 외우기보단 십자가로 직접 때려잡는 물리 계열 퇴치를 할 것 같았다.

저 차림새 그대로 44번째 테라리움을 입성했다면 쟤 한정으로 몸값이 참 많이 뛰었겠지.

엘더만큼이나 데리고 다니면 과시용으로 참 좋은 모델이 아닌가?

우린 꽤 페이크 로열을 잘 흉내 냈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이미 들렸던 전당포를 피해 다른 전당포로 호기롭게 입장했다.

하지만 어쩐지 상황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저자세는 아니더라도 다이아 냄새를 맡고 쌍수 들고 환영해 줄 줄 알았던 전당포 주인들은 여전히 우릴 문전 박대했다.

뭔가 이상했다.

누가 봐도 다이아가 많아 보이는데? 자본 만세 아니었어?

의류점에서 했던 것처럼 다짜고짜 다이아를 꺼내도 잠깐 혹할 뿐,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냉대였다.

“뭐야? 왜 반응이 똑같지? 티가 났나?”

“아씨, 온몸에 다이아를 붙이고 오라는 거야, 뭐야. 왜 비싸게 사 줄 수 있다는 걸 보여 줘도 쫓아내는 건데?”

씩씩거리며 로웰라와 함께 전당포를 빠져나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런데 함께 나왔어야 할 시들링이 여전히 전당포 안에 있었다.

“시들링, 설마 힘으로 해결해 보려는 건 아니겠지? 테라리움에서 소란을 피워 봤자 좋지 않아. 너도 이제 개과천선해야지. 44번째 테라리움에서도 수배지 돌면 어떡해?”

석상처럼 우뚝 서서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시들링은 내 부름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봐! 나가라니까! 내 말 안 들려?”

주인장의 엄포가 데시벨을 높였다.

그래도 여전히 시들링은 요지부동이었다.

“뭘 보고 있어?”

데리고 나올 생각으로 다시 안으로 들어가니 시들링은 벽면에 걸린 액자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작은 나무패 5개가 액자 안에 들어 있었는데, 어설프게 조각한 티가 나는 나무패였다.

모서리가 둥근 얇은 나무판은 5개 모두 크기와 모양이 일정하지 않았고 안엔 기괴한 문양이 선을 따라 음각으로 파여 있었다. 잉크를 음각 안에 덧칠했었으나 세월이 아주 오래 흘렀기 때문인지 마모되어 흔적만 남아있는 정도였다.

“저게 뭔데 그래?”

나무패에서 눈을 떼고 시들링의 얼굴을 올려다봤는데 그가 보이는 동요에 깜짝 놀랐다.

흔들리는 눈빛 안에 놀람, 그리움, 경외 등 갖가지 감정이 담겨 요동치고 있었다.

시들링에게 저 나무패는 익숙한 물건임과 동시에 어떠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임이 분명했다.

“다른 건 됐고 저것만이라도 살게요. 얼마를 부르든 10배를 드릴게요.”

시들링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워낙 감정 동요가 없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점은 거의 없기도 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대체 저 나무패가 어떤 물건이길래 시들링이 이토록 정신 놓고 바라볼 정도인지.

“됐어. 그래도 안 파니까 어서 저 녀석을 데리고 썩 꺼져.”

“대체 왜 안 파는 건데요? 제가 그렇게 없어 보여요? 못 믿겠으면 여기 바닥을 전부 다이아로 채워 드려요?”

나와 주인장이 실랑이를 벌이는 와중에 전당포로 누군가 들어왔다.

주인장은 단번에 얼굴색을 바꾸고 누군가를 맞이했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여태 봤던 페이크 로열들과는 뭔가 다른 여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사치스럽긴 하나 사방팔방으로 과시하고 다니는 다른 이들과 달리 고도로 응축된 사치가 그 여자에게 담겨 있었다.

저런 분위기를 가진 사람을 또 하나 알고 있었다. 대번에 파필리온의 재수 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여자는 진짜다.

그녀는 실랑이를 벌이던 카운터에서 가볍게 시선을 떼고 시들링이 바라보고 있는 액자로 고개를 돌렸다.

“저거 제가 살게요.”

“네네, 바로 전달해 드립죠.”

전당포 주인은 우리에게 찬바람을 쌩쌩 날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꼭 쥔 두 손을 바쁘게 비비며 단번에 저자세를 보였다.

“이러는 게 어딨어요? 내가 비싸게 산다 해도 절대 안 판다고 하더니!”

주인장이 벽에 붙은 액자를 떼어 가자 시들링의 시선이 그 움직임에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아, 사 주고 나서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는데!

“제게 그걸 팔아요. 당신이 산 가격의 두 배를 부를게요.”

“후후, 이걸 갖고 싶나요? 왜 당신이 다이아가 많음에도 살 수 없고 난 살 수 있는지 궁금한가요?”

그녀는 딱히 액자를 갖고 싶어서 샀다기보단 우리의 반응을 보기 위해 산 모양새였다.

“저 사람은 이 바닥의 생태계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거죠. 당장 오늘 하루만 장사할 것도 아닌데, 그쵸? 내일부터 단 하나의 손님도 맞지 못할 어떤 부티크와 다르게 말이에요.”

주인장이 액자의 포장을 끝내자 전당포 밖에 서 있던 여자의 수행원이 재빠르게 받아 갔다.

“이걸 원한다면 날 따라와요.”

그녀는 우리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전당포를 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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