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6화 (286/604)

외지인의 등장을 이토록 반기는 테라리움은 처음이었다.

도저히 여기 사는 주민이라 볼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둘 우리 주위에 몰려들어 다짜고짜 흥정을 시작했다.

“저리 꺼져! 내가 먼저 거래 중이었잖아!”

“다이아를 더 많이 준다는 쪽을 따르겠지. 아직 확실히 거래가 성사된 것도 아니잖아?”

“드루이드가 셋이나 되다니! 혼자 셋을 다 독점할 생각이야? 한 명쯤은 괜찮잖아?”

다들 똑같은 목적으로 우리에게 접근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귀하신 분들을 호위하는 임무라고?

드루이드가 호위 임무를 맡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이건 단순한 호위와는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화려하게 차려입어야 하고 드라이어드를 잔뜩 꺼내 놓아라?

안전보단 과시에 중점을 둔 것 같은데.

“언니, 어떻게 할 거야?”

로웰라는 불을 상대하며 신나게 날아다녔던 것과 달리 지금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쨌든 여기 온 목적은 전당포니까 추가 업무를 맡을 여유는 없지.”

전당포라는 말에 다들 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본다.

“전당포라고?”

“뭐야, 뒤가 구린 녀석이었잖아?”

“퉤, 진작 말을 할 것이지. 하마터면 다이아를 날릴 뻔했군.”

다들 전투적으로 우리에게 흥정하려 들던 게 언제였냐는 듯 태도가 확 달라졌다.

마치 한 입 베어 무니 떫은맛이 나는 감인 걸 알아차린 것처럼 거들떠도 보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대체 전당포가 어떤 이미지길래 이렇게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거지?”

“우리가 범죄자라도 되는 기분이었어.”

44번째 테라리움의 전당포를 찾는 사람은 떳떳하지 못한 자들이 많다더니.

이건 불법 대출을 받는 순간 신용도가 확 떨어지는 것처럼, 전당포에 방문하는 순간 이를 지켜본 자들에게 낙인이 찍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들링, 이곳에 대해 뭐 아는 것 없어?”

“전당포에 대해선 잘 모르나 저들이 드루이드를 대상으로 하는 중개업에 대해선 알고 있다.”

여행을 많이 다닌 시들링도 이곳 전당포에 대해 아는 게 없구나. 그렇다면 이리스 파티도 그러할까?

“중개업? 귀한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겠다는 거?”

“그렇다.”

시들링은 그 ‘귀한 사람들’을 세간에선 페이크 로열이라고 불린다고 말했다. 가짜 왕족?

“굳이 이곳이 아니더라도 뒤 번대 테라리움에선 자주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작은 것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라고 평가하는데 가진 다이아는 많으나 앞 번호에선 왕 행세를 할 수 없어 뒤 번호 테라리움에서 활동하지. 그들은 과시하는 것을 즐기고 테라리움을 상대로 권력을 부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확실히 앞 번대의 테라리움에서 왕 행세를 하려면 어지간한 부자가 아니고선 힘들긴 하다.

실력 좋은 드루이드와 그들이 속한 길드들, 분점을 여러 개 가진 기업들, 연금탑 소속의 저명한 연금술사들 그리고 당장 테라리움을 지배하는 행정 관리원들이 있었다.

또한 온갖 유명한 사람들이 앞 번호에 몰려 있으니 왕 노릇을 하기엔 힘들 테지.

시들링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과시가 디폴트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살 터전도 빼앗아 집도 크고 화려하게 짓고 다른 페이크 로열들을 견제하기 위해 화려한 겉치장이라면 뭐든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또한 이러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주로 사람들의 피를 말리는 고금리 대출업을 한다고도 말했다.

차라리 테라리움을 사들여 행정 관리원 행세를 하는 게 낫지 않나 생각했는데, 뒤 번대 테라리움은 유지비가 많이 들어서 오히려 기피한다고 한다.

“테라리움 입장에선 그렇게 좋은 주민들은 아닌 걸로 보이는데….”

“하지만 뒤 번호 테라리움들이 주민을 가려 받을 처지는 아니다.”

그건 그렇지. 세금으로 운영되는 테라리움은 주민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페이크 로열이 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해 가며 돈지랄을 하더라도 이곳의 행정 관리원 입장에선 다이아가 많은 쪽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차피 불의 위협을 상시 받는 테라리움은 세금이 낮았다.

다들 앞 번호 테라리움으로의 진출을 꿈꾸고 있다 하더라도 사정상 그러지 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번호대가 달라지자마자 확연히 달라지는 테라리움의 사정에 입 안이 썼다.

당장 자문인들에 의해 휘둘리는 38번째 테라리움도 직접 가 보진 못했으나 이보단 나을 듯싶었다.

빨리 전당포를 방문해 테라리움을 뜨고 싶었는데 찾는 것도 일이었다.

44번째 테라리움에 방문하면 금방 애드너가 말한 전당포를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곳곳에 크고 작은 전당포들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창문이 없는 도박장도 많았고 문을 닫은 것인지 안에서 다른 불법 행위가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수상한 가게도 많았다.

“좋지 않아…. 전당포가 이렇게 많다는 것은 사람들이 급하게 돈을 빌려야 할 일이 많다는 거잖아.”

여태 방문했던 테라리움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페이크 로열들은 주로 고금리 대출로 품위 유지비를 충당한다고 했으니, 이 테라리움에 얼마나 많은 가짜들이 판치고 있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어딘가를 바라보는 로웰라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그곳엔 해진 옷을 입고 힘이 없는 모습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고아들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거리에 나앉은 노숙자들도 눈을 돌리는 곳마다 존재했다.

“앞자리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이렇게 테라리움 사정이 변한다고?”

“불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마음이 아파…. 여긴 복지 시설도 없나 봐. 다들 제대로 못 먹고 있는 것처럼 보여….”

그 와중에 거리의 사정과 확연히 다른 모습의 사람들도 보였다.

화려하고 재질이 좋은 옷, 등을 꼿꼿이 세운 수행원들을 잔뜩 동행시켜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이었다.

저들이 페이크 로열이겠지.

다 죽어 가는 테라리움에 군림하여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왕 행세를 하는 사람들.

은둔자 정원의 드라이어드들을 착취하던 실새삼과 다를 바가 뭔가 싶었다.

특정 전당포를 찾는 일을 멈추고 눈에 보이는 아무 전당포나 들어갔다.

잘 먹고 지내는지 볼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퉁퉁한 손가락마다 금반지를 끼운, 탐욕스러워 보이는 주인이 카운터에 앉아 우릴 맞이했다.

“뭘 팔러 왔남?”

“물건을 좀 찾으려고 왔는데요. 팔려는 게 아니라 사려고요.”

“안 팔아.”

대뜸 거절하는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안 판다고요? 왜요?”

“살 사람은 다 정해져 있어. 그쪽이 내가 제시한 금액에 살 수나 있겠어? 그쪽 같은 뜨내기에게 파느니 뭘 팔아도 비싼 값에 사 주는 고객이 더 낫지. 그리고 무슨 소문을 듣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드라이어드의 전설과 관련된 물건이나 금지된 연금술로 만들어진 장비 따윈 없어.”

“그런 걸 사려고 온 건 아닌데요.”

“거, 척 보기에도 여기저기 쏘다니는 드루이드로 보이는데 말야. 내가 당신 같은 사람들을 한두 번 본 줄 알아? 굳이 이런 으슥한 곳까지 찾아온 걸 보면 범죄자 신분의 드루이드가 급매한 소유 아이템들을 찾고 있나 본데, 있다 해도 안 팔아.”

“범죄자 신분?”

나도 모르게 시들링에게 눈이 갔다.

“아니, 네가 범죄를 저질렀다기보단 수배자니까….”

시들링은 내 시선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쫓기고 있으니 의뢰를 맡아 다이아를 벌 순 없고, 당장 먹고살 다이아가 필요해 물건을 정리했을 것이다. 한 테라리움의 주요 인사를 암살해서 범죄자 신분이 된 드루이드가 있는데, 그가 사용하는 무기가 매우 뛰어난 검이라 많은 이들이 탐한다는 소문은 있었다. 그 드루이드는 결국 잡혔는데 연행 당시 검이 보이지 않아 어딘가에 숨겨 뒀거나 팔아 치웠을 거라 생각해서 이런 전당포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다.”

“그래, 하여튼 안 파니까 볼일 없다면 썩 꺼져.”

도저히 거래가 불가능한 상대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전당포를 방문해도 우리가 구매자의 입장이란 걸 알게 되자 전부 퇴짜를 맞았다는 것이다.

다이아를 많이 준다 해도 애초에 우리에겐 기대조차도 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어떡하지?”

“여기 사람들 너무 무섭다. 평생 먹을 욕을 여기서 다 먹은 것 같아.”

로웰라는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곳의 피폐한 환경은 햇살처럼 명랑한 로웰라의 기운마저 다 빼먹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전당포의 고객은 페이크 로열에 한정되는 걸로 보여. 살 사람이 정해져 있고 비싼 값에 사 주는 고객이 있다잖아?”

“그럼 어떡하지? 호위 업무라도 받아서 그들에게 접근해야 할까?”

“그것보다 내가 페이크 로열이 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로웰라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들의 근본인 돈지랄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지.

“다이아만 많다면 누구나 가능한 거 아냐?”

“맞아! 언니 다이아가 엄청 많잖아!”

우린 테라리움에서 가장 큰 의류점을 찾아 들어갔다. 겉치장을 해야지.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누가 봐도 전문적으로 페이크 로열만 상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입구부터 우릴 맞이하는 점원들의 눈이 곱지 않았다.

마치 여긴 너 따위가 올 곳이 아니라는 마음의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였다.

전당포 주인들이 그랬듯이 당장이라도 쫓아낼 것처럼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쿵쿵거리며 다가오길래 나도 핸드폰을 꺼냈다.

조각난 천이 가득 담긴 바구니 위로 다짜고짜 다이아를 쏟아 냈다.

성을 내며 다가오던 점원은 바구니를 채우다 못해 넘쳐흐르는 다이아를 보고 바짝 몸이 굳었다.

“여기 하루 동안 내가 빌리고 싶은데.”

“자… 잠시만 기다리세요!”

점원은 왔던 방향으로 황급히 뛰어갔다.

잠시 후 자주색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려 고정시킨 사람이 나타났다. 딱 봐도 이 의류점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사람처럼 보였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저희 아라크네 부티크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이곳의 디자이너 룩스리아입니다. 어떤 스타일의 옷을 찾으실까요?”

그녀는 빠르게 우리 일행을 스캔하곤 바구니에 담긴 다이아를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찾아야 하나요? 당신들이 맞춰 봐야죠. 이 테라리움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곳에 왔는데 헛걸음을 한 건 아닌가 싶네. 됐어요, 영 전문적으로 보이질 않으니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는데. 아, 그 다이아는 그냥 가져요. 부족한 곳에 적선했다고 치지, 뭐.”

다이아를 그냥 가지라는 말에 오히려 놀란 것은 로웰라였다.

“호호, 고객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워낙 이렇게 대단하신 고객을 맞이해 보는 것은 처음이라 미처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일단 안에 들어오셔서 편히 차라도 한잔하시는 게 어떨까요? 저희가 성심성의껏 고객님께 맞는 의상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녀는 완전히 저자세로 우릴 맞이했다.

입구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점원들마저 떼로 나와 마치 왕의 행차를 맞이하듯 복도에 일렬로 섰다.

우리가 소파에 앉자 그들은 나서서 가게 안에 남아 있던 손님들을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뭐? 나가라고? 날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여기 매출을 얼마나 올려 줬는데 나가라는 거야, 지금?”

“죄송합니다. 귀한 손님이 오셔서 쇼핑에 방해받는 걸 원치 않으시기에 가게를 비워 줘야 합니다.”

“귀한 손님이라고? 누군데!”

갑작스레 쫓겨나는 손님들은 자신이 무시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점원들과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저들 역시 편안히 이곳에서 쇼핑을 하고 있던 걸 보니 페이크 로열이겠지?

그들은 서로 견제를 한다고 했던가. 기 싸움이겠지?

손을 까딱이자 쟁반에 차를 내오던 점원이 허리를 숙였다.

쟁반 위에 다이아를 왕창 쏟아 내고 실랑이를 벌이던 사람들을 가리켰다.

“뭐, 위로금이라고 나눠 줘요. ‘배려’해 줘서 고맙다고도 전해 주고.”

“네, 알겠습니다.”

내가 하는 연기는 단순했다.

그들을 파악한 바론… 그저 다이아를 싹수없게 쓰면 되는 것이 분명했다.

워낙 전당포 주인들에게 퇴짜를 많이 맞아서인지 심기가 잔뜩 꼬인 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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