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멘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목적지도 정해진 이상 31번째 테라리움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애드너가 뱃사람들이 얼마나 빨리 소문을 싣고 나르는지에 대한 우스갯소리로, 날씨도 좋아 바다 위를 순조롭게 가르고 나아간 배가 지금쯤 해안 테라리움 연합은 다 돌았을 거라는 말까지 하는 바람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플라멘은 행사를 취소하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 말을 그대로 따르기엔 지나치게 고무되어 있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색종이 비를 뿌려 대는 것만이 행사가 아닌 만큼, 명칭만 달리한다면 소수만 불러 모아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도 행사 아닌 행사가 될 수 있었다.
31번째 테라리움의 구원자가 된 내게 다른 해안 테라리움들도 같은 것을 바라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을까?
플라멘이 대외적으로 내 신분을 비밀로 부쳤다 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한 타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 연합을 맺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다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을 대상으로도 유효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31번째 테라리움에 머물고 있을 때, 어쩐지 그들이 감사를 표하며 얼굴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호적인 관계는 좋지만 좀 더 그들과 긴밀히 대화를 나눌 만한 때는, 지금 그들의 간절한 마음이 어느 정도 시간에 희석되어 담백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될 때라고 생각한다.
고로 난 도망갈 거다.
“배를 태워 드릴까요? 41번째 테라리움까지 바닷길로 이동한 후 44번째 테라리움으로 가는 것이 더욱 빠를 텐데요. 물론 이번 여정에는 허브 세이렌들의 유혹이나 집채만 한 해일은 없을 테니 더없이 편안한 여정이 될 겁니다.”
아무래도 마차를 빌리는 과정에서 내가 급하게 테라리움을 뜨려 한다는 소식이 플라멘의 귀에 들어갈 것이 분명하여 망설여지긴 했다.
그런 와중에 애드너가 배를 태워 주겠다고 하니 그녀가 천사로 보일 지경이었다.
“염치없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번에야말로 제 배에 오른 귀한 승객을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고 목적지까지 무사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선원의 말이 사실이었다. 애드너는 아직까지 자신의 배 위에서 내가 쓰러진 일을 마음에 깊이 담아 두고 있었다.
“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이번에도 이 배를 타고 제가 새로운 전설을 만들어 볼게요.”
그녀가 좀 더 영악했다면 해일을 막은 그래프트를 내 배 위에서 펼쳤노라 자랑하고 다녀도 됐을 텐데.
그런 것들을 모두 뒷전으로 하고 오로지 그날의 승객이었던 내 걱정이 최우선이었다니.
바다 위에 수많은 배가 있다 하더라도 고른다면 무조건 애드너의 배를 골라 탈 것이다.
운이 좋은지 앞 번호대로 향하던 바람이 배가 돛을 올리자 방향을 틀었다.
마치 어서 가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불어오는 바람을 피해 돌린 고개가 뒤 번호대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수면 위를 살짝 뒤집어엎을 정도로 잔잔한 파도가 일어나는 적당한 바람이 활기차게 돛을 밀어 주니 배는 날개 단 듯 유려하게 바다 위를 미끄러져 나아갔다.
이번엔 로웰라와 함께 갑판으로 나가 마음껏 바다 구경을 했다.
선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와 배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 일어난 물거품이 보글 끓다 그대로 바다에 스며드는 소리가 한 데 어울려 더없이 평화로운 순간을 연주하고 있었다.
당장은 미지의 섬을 탐방할 목적도, 등 뒤의 적을 피해 숨 가쁘게 도망가야 하는 여정도 없었다.
전에 배를 탔을 때 여유롭게 바다 구경을 못 한 것이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로, 드넓은 바다는 광활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슴 뛰게 만들고 속을 헤아릴 수 없이 가득 찬 물엔 모든 잡념을 내다 버려 머릿속을 텅 비게 만들 수 있었다.
“와, 너무 좋다. 언니, 저길 봐. 섬이 있어! 혹시 바위손들의 섬일까?”
“글쎄?”
실새삼을 구속하는 사명을 마친 바위손들은 더 이상 고립된 섬에 군락지를 틀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바다 위 솟아오른 한 뼘의 섬을 떠나 자유를 찾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계속 그곳에 머물기를 고집했다고 한다.
해일이 크게 일었으나 다행히 작디작은 그들의 섬이 은둔자의 정원과 함께 가라앉지는 않았다고 한다. 로웰라가 가리킨 섬이 정말로 바위손들의 섬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곳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그들이 부디 진정한 자유를 찾아 행복할 수 있기를.
“항구 근처에 황금 호박 상회 분점이 있으니 그곳에서 마차를 빌리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애드너는 장담했던 대로 무사히 우리를 41번째 테라리움의 항구에 데려다주었다.
“제이 님께서 가시는 모든 여정에 항상 모감주나무의 축복과 행운이 따르길. 모감주나무는 저희 같은 뱃사람들에게 부적과도 같은 나무랍니다. 먼바다를 나뭇잎 배 한 척에 의지한 채 단신으로 나아간 씨앗 하나가 해류를 돌고 돌아 기필코 육지를 찾아내 정박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모감주나무의 축복이 있다면 목적지에 반드시 도달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제이 님도 망망대해에서 기필코 육지를 찾아내는 모감주나무처럼 원하시는 목적을 이룩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녀는 성스럽게 여기는 모감주나무지만, 어쩐지 그 이야기를 듣고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이리저리 굴려지고 있는 왈패 같은 모감주나무의 모습이 떠올라 아이러니했다.
“그렇다면 애드너님의 배엔 항상 엘더 플라워의 행운이 따르길 기원할게요. 알죠? 엘더는 최고의 행운 부적이라 보물섬을 발견하실지도 몰라요.”
“하하, 그렇지 않아도 요즘 신세대들은 모감주나무보다 엘더 플라워의 축복을 비는 추세긴 하네요. 제이 님 영향이죠? 축복 감사히 받겠습니다.”
우리를 배웅하는 애드너의 눈엔 시원하고 후련하단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날은 비록 승객이 온전히 두 다리로 배에서 내리진 못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이 작은 여정이 그녀의 묵은 트라우마를 씻겨 줬으면 좋으련만.
큰 실패는 거듭되는 작은 성공으로도 지워낼 수 있다.
애드너는 겨우 그날의 일에 얽매여 뱃일에 어려움을 겪기엔 아까운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을 나이테에 새기며 자라난 굵은 고목 같은 사람이니 한 때의 거친 바람이 그녀를 흔들어도 결코 부러지지 않을 거라 믿는다.
애드너의 조언대로 41번째 테라리움에 분점을 낸 황금 호박 상회에 들러 마차를 빌렸다.
난 이미 모든 황금 호박 상회에서 유명 인사나 다름없는지 처음 보는 매니저가 금방 아는 척 인사를 해 왔다.
41번째 테라리움도 해안 테라리움 연합에 속해 있기 때문에, 플라멘이 그랬던 것처럼 금방 이곳의 행정 관리원이 날 찾아올 수도 있었다.
빠른 출발을 원하는 날 위해 분점의 매니저는 짐을 싣던 것을 모두 멈추고 일정이 있던 마부를 닦달해 그대로 마차를 몰아 44번째 테라리움을 향해 달려 주었다.
가는 길이 앞 번호대에 비하면 순탄치 않았다.
뒤번대 테라리움이 겪는 어려움을 여실히 보여 주듯 생태계를 씹어 삼킨 불들이 맛있는 먹이를 발견한 것처럼 마차에 달려들었다.
창밖으로 상체를 내민 칼미아가 총을 쏘며 마차에 들러붙은 불을 떼어 내고, 데이지는 줄기를 마차에 묶은 후 매달린 채 공중전을 펼치며 불을 상대했다.
불은 뭘 그리 많이도 처잡수셨는지 잘 익은 과일처럼 통통하고 잘 여물어서 크기도 제법 컸다. 물고기로 치면 저놈들은 필드를 뛰어다니는 월척들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이쯤에서 나에 대한 황금 호박 상회의 신뢰에 대해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위험천만한 길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부 한 명만으로도 마차를 운영해 주었으니까.
마차는 내열성 소재로 만든 것인지 열기에 제법 잘 버텼지만, 오랜만에 무방비하게 달리는 먹잇감을 놓치기 싫은 것인지, 주변에 모이는 불들이 점점 많아졌다. 불이 어느새 맹수 떼처럼 진을 치고 마차 앞을 가로막으니 중간중간 내려서 소모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전투는 로웰라에게 좋은 훈련이 되었다.
사실 달리는 마차에서 상대하는 것이 까다로울 뿐, 내리면 나와 시들링이 버티고 있는데 겨우 허리께나 오는 불 따윈 상대가 되지 못했다.
생태계의 최강자를 모방하여 갖가지 모습으로 변모한 불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땅에서 솟아올라 공격을 가했지만, 로웰라는 새로 영입한 레몬밤의 능력을 능숙하게 다루며 메인 딜러인 엉겅퀴가 착실히 불을 해치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엉겅퀴, 바로 그거야! 다 때려 죽여 버려!”
뜬금없이 드라이어드를 삼킨 어나더 레벨의 불이 등장해 난전으로 번질 일은 없었기에 마차를 가로막던 모든 불은 로웰라의 경험치가 되어 사라졌다.
우린 필라의 고향인 42번째 테라리움을 지나쳐 드디어 특이한 전당포가 있다는 44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구부터 기묘한 느낌이 드는 테라리움이었다.
앞 번호대의 테라리움들과 공기부터 다른 느낌이었다.
테라리움을 두른 울타리는 그동안 숱하게 불의 침입을 받았는지 검댕 칠로 가득했다.
외곽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얼굴엔 시름과 고통이 가득해 보였고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은 억세고 강직해 보였으며 하나 같이 큰 고민을 하는 것처럼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그래도 30번대 테라리움까지는 평범하게 사람 사는 마을이란 느낌을 받았지만, 이곳은 전쟁터와 다름없이 느껴졌다.
불이 침입할까 두렵지, 인심은 야박해져 서로를 믿을 수 없지, 먹고살 음식과 물은 부족하지. 이 모든 걱정이 앞 번대 테라리움에선 선택적 어려움이었더라도 여기선 불가피한 것들이었다.
어느 하나 돌파구가 없는 암담한 현실은 세계수에서 멀어질수록 구정물이 가득 담긴 늪이나 다름없어, 한번 빠진 사람들을 아득한 밑까지 끌어당기며 옭아맬 것이란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어이, 이봐! 그래 너희들. 앞 번호에서 온 놈들이냐?”
환영 인사도 차원이 달랐다.
첫인상만큼은 시들링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험악한 사람이 막 마차에서 내린 우리를 반겼다.
“꼴을 보아하니 드루이드인데. 어디, 일자리를 찾고 있나? 얼마면 되나? 몸값을 불러 봐라. 귀한 인간들이 앞 번호에서 온 드루이드라면 환장하고 값을 치러 주니 여비를 마련하기엔 딱 좋을 거다.”
나름대로 곱게 자라 사회에 첫걸음을 디딘 로웰라는 많이 당황스러웠는지 할 말을 잃은 채 저도 모르게 내 뒤에 숨고 말았다.
“고향이 20번대 안이면 그 두 배를 쳐주고, 유명한 길드 소속이면 세 배를 쳐주마. 등급이 높은 드라이어드가 있다면 수대로 셈을 쳐주고 유니크나 스페셜이 있다면 열 배를 쳐주마.”
무슨 일을 맡기려는지 말도 해 주지 않고 다짜고짜 몸값을 불리기 시작하는 사람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상대가 저렇게 나오니 나 역시 뻔뻔하게 맞서 주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내 모습을 더욱 마음에 든다는 것처럼 그는 씨익 웃어 보였다.
“거 배짱 하난 좋구먼. 귀하신 분들이 환장할 타입이야. 별거 없다. 대단한 드라이어드들을 잔뜩 밖에 내놓고 그분들의 호위를 해 주면 된다. 선수금을 받아 옷을 멋지고 화려하게 차려입으면 태가 살겠군. 나와 계약하는 게 어떤가?”
“어이! 저 녀석 말고 나와 이야기하자꾸나. 난 저 녀석이 부른 것보다 반을 더 쳐주마!”
44번째 테라리움은 정말 이상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