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4화 (284/604)

광장을 벗어난 우리는 바닷가로 향했다. 아직까진 생태계가 변화했음을 확인할 만한 무언간 보지 못했다. 전에 왔던 것처럼 평화로워 보이는 바다 마을일 뿐이었다.

모래사장을 따라 조금 걷자 방파제가 무너진 곳이 보였고, 그 근방에 전에 없던 돌담이 둥글게 쳐진 곳이 나타났다.

벌레가 파먹은 나뭇잎처럼 해안선 안쪽을 둥글게 파고든 모양새의 지형엔 호수처럼 물이 가득 고여 있었고 돌담과 더불어 넓은 호숫가에 있을 법한 나루터와 바다를 항해하기엔 걸맞지 않은 작은 나룻배 여러 척이 정박되어 있었다.

나루터 주위엔 벽이 삼면만 존재해 안의 사람들이 바쁘게 요리를 하거나 물건을 나르는 모습이 보이는 작은 상점들이 덕지덕지 몰려 있었다. 관광지로 유명한 장소에 방문한 느낌이었다.

“저긴 어떻게 된 거죠? 전에 못 보던 장소 같은데.”

“그날 이후로 이곳에 호수가 생겼습니다. 호수 이름은 엘더 레이크입니다.”

“네? 바다 바로 옆에 호수요? 거기다 엘더 레이크라니….”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회색빛의 바닷물과 확연히 다른 푸른빛의 물이 찰랑이고 있었다.

호수의 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구역은 마치 물과 기름을 보는 것처럼 서로 섞이지 않고 확연히 경계가 나눠져 있었다.

“이 엘더 레이크의 물은 소금기가 없는 민물입니다. 해일이 테라리움을 덮칠 뻔한 그날, 하늘에서 거대한 물의 장막이 쏟아지고 나서 바다 위엔 기름막처럼 거대한 물이 뒤덮였습니다.”

호수 주변엔 강가에서 볼 수 있는 풀들이 빼곡히 자라고 있었다.

심지어 바다 위에선 자랄 수 없는 부평초들까지 떠다니고 있었다.

큰 잎이 탐스러운 연꽃도 꽃봉오리를 오므린 채 군데군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바다 위를 뒤덮은 물은 그대로 바닷물과 섞이지 않고 바람을 타고 흘러 이곳에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범상치 않은 수질에 이 구역이 오염된 것이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물이 고인 곳에 담수에서 자랄 법한 식물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지요. 연금술사들은 물론 물에 일가견이 있는 넵튜누스분들을 섭외해 이 호수에 파견했습니다.”

오염되었다고 보기엔 호수는 유리로 덮인 것처럼 맑고 깨끗했다.

더구나 영롱한 푸른빛을 띠고 있어 보석을 녹여 만들었다고 생각할 만큼 진귀하고 아름다운 호수로 보였다.

잠깐만… 보석을 녹여? 설마?

“그들은 하나같이 이 호수의 물이 1번째 테라리움에서나 볼 수 있는, 세계수 바로 아래의 수액이 함유된 생명의 호수와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정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지요.”

의심은 실체가 되었다. 이 호수는 엘더와의 그래프트로 내린 빗물이 모여 생긴 것이었다.

다이아가 녹아 들어간 물이니 푸른빛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저희 31번째 테라리움은 항상 담수가 부족했습니다. 바다 근처인 탓에 지하수를 퍼 올려도 염수가 섞여 있어 별도의 정화과정을 거쳐야만 했지요. 아니면 멀리 32번째 근처의 수맥을 터 이쪽까지 물길을 끌어와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테라리움의 유지 비용 중 상당수가 담수를 만드는 데 사용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염수와 섞이지 않는 호수가 생기다니. 더없이 축복받은 기적이지요. 물론 아까워서 차마 식수로는 사용하지 못하고 소중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곧바로 기절해 버려서 그래프트의 스케일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었는데… 해안 지형을 바꿀 정도였다니.

호수 근처엔 민들레 군락지에서 봤던 것처럼 어린 드라이어드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그들에게 장식된 꽃을 보아하니 호수에서 피어난 식물에서 자연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묘목들을 바라보고 있는 내 시선을 느낀 플라멘이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션 필드에서 리버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만하면 생태계를 완전히 바꿔 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만간 과수원의 영역을 확장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드라이어드 포트에 필요한 성수를 이렇게 쉽게 공급받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내 다이아가 28번째 테라리움에선 수액 분수를 터뜨리고 31번째 테라리움에선 드넓은 호수를 만들어 냈다.

이쯤 되면 난 드루이드뿐만 아니라 넵튜누스라고 불러도 되는 거 아냐?

내가 바로 물을 부리는 사람이다, 이 말이야.

“그… 세계수의 수액이 함유된 호수라면… 증발이 염려되진 않나요? 호수가 나중에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비가 쏟아져 내려 호수가 생겼다고 하지만 이 호수는 말 그대로 고인 물이니 들어오는 물이 없다면 오랫동안 유지될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일이 있고 난 후 한 달이 훌쩍 지났음에도 넓은 지역에 물이 찰랑거리는 건 이상했다.

더구나 다이아로 뽑아낸 물이니 더욱 증발이 우려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드라이어드와의 그래프트에 다이아를 쓰는 드루이드는 나밖에 없을 것 같아서 차마 이 점은 지적하지 못했다. 보통은 드루이드의 생명력을 태우는 것이 정설이니까.

“처음엔 아무래도 이 호수가 생긴 이유가 드라이어드의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어 시간이 지나면 금방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비가 내려 호수에 담수가 공급될 때면 놀랍게도 물이 정화되어 유지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뭄이 오지 않는 한 엘더 레이크가 마를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 추정 중입니다. 1번째 테라리움의 생명의 호수도 그렇게 유지되고 있으니까요.”

세계수의 수액에… 그런 기능이 있었다니. 물을 잡아먹는 물이라….

그 후로 플라멘은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주민들이 호수 덕에 소소하게나마 작물 재배에 눈을 돌리기도 하고 갑자기 생긴 제2의 생명의 호수를 구경하기 위해 방문하는 관광객들로 인해 관광업도 활발해져 살기 좋아졌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마치 신이라도 만난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은 진귀한 보물을 앞두고 너무 소중해서 어쩔 줄 모르는 눈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이 님은 정말로 31번째 테라리움에 찾아온 귀인이십니다.”

그는 덧붙여 엄청난 그래프트를 펼친 드루이드에 대한 소문이 쫙 퍼져 날 만나 보고 싶어 한다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아졌다고 말해 주었다.

무려 한 자릿수 테라리움의 전속 길드가 날 스카우트하기 위해 날마다 플라멘을 닦달하고 있다고 했다. 더구나 엘더 플라워를 부리는 드루이드는 죄다 수소문하고 있다고 하니….

당분간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엘더를 꺼내는 것도 조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제이 님께서 불편해하실 것을 우려해 제이 님에 대한 신상은 철저하게 비밀로 부치고 있습니다. 만약 알려졌다면 28번째 테라리움에 수없이 정보꾼들이 드나들었겠지요. 제이 님의 능력은 아주 큰 선행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이를 좋지 않게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악용되면 그만큼 큰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무려 이곳의 생태계를 바꿀 정도로 큰 힘이니까요.”

문득 인페르노 수장이 스케어크로우를 노리던 것이 떠올랐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스케어크로우를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이용하려고 했었지.

어떻게 이용할 생각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녀는 결국 잔혹한 단체의 타깃이 되었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다 보니 제이 님이 그래프트를 펼친 후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몇은 피로 뒤덮여 실려 가는 제이 님의 모습을 보았으니 도저히 살아날 수 없다고 본 거겠지요.”

그래프트는 드루이드의 생명력을 소모하니 그렇게 오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8번째 테라리움을 그래프트의 힘으로 통째로 가둔 스케어크로우는 생명력을 모두 소모하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지금까진 제 판단으로 소문이 어떻게 퍼지든 내버려 두었지만 앞으론 제이 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겠습니다. 비밀을 풀고 제이 님의 정체를 밝힌다면 그 명성이 널리 퍼질 것입니다. 하지만 순례자의 길을 걷기에 이러한 겉치레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비밀을 유지하는 것을 선택하시겠지요.”

“죽었다고 생각하는 소문도 굳이 정정할 필욘 없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전 이곳저곳 떠돌아다녀야 하는데 보는 눈이 많으면 제약이 생기니까요. 지금처럼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플라멘은 그 후로도 달라진 31번째 테라리움을 자랑하며 내 공을 찬양하다가 겨우 날 놓아주었다.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그는 떠나기 전 꼭 과수원을 방문해 달라고 부탁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이대로 떠나고 싶었으나….

“아, 여기 계셨군요. 저희 선장님께서 제이 님을 무척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바닷가를 거닐 때 유독 배 위의 사람들이 날 힐끔거린다 싶었는데 그새 애드너에게도 소문이 들어갔나 보다.

애드너의 배 위에서 봤던 선원 중 한 명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날 불러 세웠다.

그는 은둔자의 정원에 가까워졌을 때, 드라이어드의 힘에 취해 갑판에 대자로 드러누웠던 선원 중 한 명이었다.

“애드너 님은 잘 계시나요? 그렇지 않아도 안부 인사를 먼저 드렸어야 했는데.”

“아휴, 말도 마세요. 제이 님이 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지셔서 배 위는 말 그대로 전쟁이었습니다. 해적을 만났을 때보다 더 빠르게 전속력으로 배를 몰아 육지로 돌아갔습죠. 아무리 바다 위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신 선장님이시지만 그날 일은 충격이 정말 크셨는지 요즘도 종종 주무시다 깨어나십니다. 바다에 산처럼 생긴 파도와 죽음을 앞둔 일 그리고 크나큰 은인이나 다름없는 제이 님이 죽기 직전의 모습으로 배 위에 쓰러지셨는데 그때문에 트라우마가 크셨나 봅니다.”

만약 애드너의 배가 아닌 다른 사람의 배를 탔다면 어떻게 됐을까?

애드너는 굉장히 대처를 잘해 주었지만 그녀에게 좋지 못한 기억을 남긴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31번째 테라리움에서 제이 님의 마지막은 출혈이 멈추지 않는 모습으로 28번째 테라리움으로 실려 가는 모습이었으니… 배를 좀 더 빨리 몰아 의료진에게 제이 님을 맡겼다면 더 빨리 치료할 수 있었을 거라고 자책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애드너 님은 최선을 다해 주셨어요. 무엇보다 전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그래서 다행이긴 하지만… 신기하기도 합니다. 전 정말 제이 님이 그 자리에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워낙 상태가….”

세계수 가지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면 가망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선원의 안내를 받아 애드너를 만났다.

그녀는 한달음에 내게 달려와 날 꼭 껴안았다. 근육이 튼실하게 자리잡힌 굵은 팔이 나를 숨 막히게 조여 왔다.

꼭 안긴 채로 코를 박으니 그녀에게서 짭조름한 바다 냄새와 시원한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예의를 떠나 얼마나 날 걱정했는지 알 수 있는 행동이었다.

“이런… 저도 모르게…. 무사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애드너의 배에 올라 선장실에서 그녀와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니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시들링과 로웰라도 그러한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그날을 회상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동안 그간의 안부를 나누다 보니 애드너도 마음이 놓였는지 본래의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제게 은둔자의 정원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신 것도 애드너 님이셨죠. 혹시 다른 소문들도 알고 계실까요?”

“드넓은 바다 위를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인적이 드문 장소도 가 봤으니 육지 사람들보단 해괴한 소문을 많이 알고 있긴 합니다.”

그녀는 크게 걱정하는 얼굴이 되었다.

또 내가 은둔자의 정원 같은 곳을 찾아가 잘못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혹시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대해 아는 건 없으세요? 지상 낙원이라 불린다는데 암암리에 회원제로 운영되어서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라 하더라고요. 온갖 희귀한 꽃들이 있다는데. 그곳은 공개적으로 물어서 찾기엔 조금 위험한 곳이긴 해요. 좋지 않은 단체가 엮여 있어서.”

“듣는 것만으로도 구린 구석이 있는 곳이군요. 또 어떤 위험한 모험을 하시려고 그러시는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들은 것이 없습니다. 허브들의 지상 낙원인 은둔자의 정원도 있었는데, 세상엔 참으로 지상 낙원이 많군요?”

기대했지만 애드너는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일부러 모른 척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곳이라면 정보를 얻을 만한 곳이 있긴 합니다. 혹시 44번째 테라리움에 방문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뇨, 아직 방문한 적은 없어요.”

“그곳에 온갖 물품을 취급하는 전당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희귀하고 비밀을 가진 물품일수록 값비싸게 쳐준다고 하지요. 전당포라면 앞 번호의 테라리움에도 많이 있지만 사람들이 44번째까지 내려가 그곳의 전당포를 방문한다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쩌면 제가 찾는 단체의 사람들이 그곳에 방문했을 수도 있겠네요?”

“비밀로 유지되는 곳이라지만 이렇게 제이 님이 존재를 알아차리지 않으셨습니까? 규모가 클수록 새어 나가는 비밀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44번째 테라리움의 전당포라…. 다음 목적지가 정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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