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3화 (283/604)

밤마실을 나온 것처럼 느긋하게 걷다 보니 마중 나온 시들링과 로웰라와 합류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센스 있게도 민간 마차를 빌려 놓은 상태였다. 운동 겸 걷는다고 말은 해 놓았어도 31번째 테라리움까지 마차 없이 가는 길은 하루로도 모자랐다.

로웰라는 실새삼에 대한 정보가 생각보다 너무 찾기 힘들어서, 25번째 테라리움의 도서관에 다녀왔지만 건진 정보 중 쓸 만한 건 없다고 한탄했다.

“죄다 농사를 지을 때 실새삼을 주의하라는 말뿐이었어. 한 번 자라기 시작하면 주변의 식물들은 모두 고사한대. 삽화를 보니 엉킨 머리카락 같은 실새삼이 넓은 면적의 밭을 죄다 뒤덮고 있는데 정말 끔찍하더라니까?”

실새삼은 제 이야기가 나오자 자는 척 눈을 감곤 있어도 귀를 쫑긋 세웠다.

로웰라는 잔잔한 라디오처럼 25번째 테라리움의 도서관이 얼마나 크고 멋있었는지 감탄하면서 28번째 테라리움에도 도서관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며 떠들었다.

어느새 별로 얻지 못한 실새삼에 대한 정보는 제쳐 두고 도서관이란 화제에 푹 빠져 언젠간 자기의 모험담도 책으로 만들어 모든 테라리움의 도서관의 책장에 꽂아 놓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로웰라와 함께 도서관에 갔던 시들링이지만, 그 역시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는지 묵묵부답이었다.

“그래그래. 그거 좋네.”

어느새 그녀가 졸음을 못 이겨 꾸벅꾸벅 졸 때까지 적당히 호응해 주며 시간을 태웠다.

난 그들이 없는 28번째 테라리움에서 미미르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온건파 베스탈리스와 연을 맺은 이야기는 꺼낼지 몰라도 미미르가 내게 고백한 일은 나만 알고 있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셋을 실은 마차는 부지런히 달려 날이 한참 밝은 후에야 우릴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다.

소금기 가득한 바다 내음이 오랜만이라며 우릴 반기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 거리를 걸어서 가려 하다니…. 조금 무모하긴 했다.

남들은 잠에서 깨어나 활동할 시간이지만 우린 테라리움에 도착하자마자 여관에 방을 잡고 잠을 청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잠에서 깨어나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내 통보 없는 방문을 용케 알아챈 31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날 찾아왔다.

“오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오실 줄 알았다면 제이 님을 맞이하기 위해 성대한 잔치를 준비해 뒀을 텐데 말입니다.”

“어우, 그러실 필욘 없어요.”

인상이 옅고 웃는 눈이 여우를 닮은 남자였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옷은 산책 나온 것처럼 수수하게 차려입어, 자신 스스로 행정 관리원이라고 밝히지 않았다면 단순히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쯤으로 착각할 뻔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지 주변 누구도 그를 행정 관리원이라고 알아보는 눈치가 아니었다.

“저는 31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플라멘입니다. 끔찍한 해일로부터 저희 테라리움을 구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바닷가 근처의 주민들을 모두 피신시켰어도 멀리서도 확연히 보이던 높은 파도로 예상컨대, 분명 큰 인명 피해와 추측 불가능할 정도의 재산 피해를 입힐 만한 규모였습니다.”

정말 건물 높이의 엄청난 파도가 바다에 둘러진 장벽처럼 일었지.

그때를 다시 생각하면 끔찍했다.

그날이야말로 내 모험이 끝나는 날이 아닌가 싶었으니까.

“그런데도 아무런 피해 없이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제이 님께서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보여 주신 기적은 저희 테라리움은 물론 해안 테라리움의 수많은 생명을 구해 냈습니다. 이는 그 어떤 보상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크나큰 은혜입니다.”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뭐. 제 힘으로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단순히 드루이드 한 명이 보일 만한 기적의 수준이 아닌데도, 내가 피를 줄줄 흘리며 사경을 헤맸던 사실 때문인지 크게 이상함을 못 느끼는 눈치였다.

플라멘은 그 후로도 쉬지 않고 내 업적을 찬양했다.

솔직히 해일을 막아 낸 일이 단순한 선행으로 끝날 일은 아니기에 적당히 얼버무리기가 힘들었다.

어찌나 나에 대한 찬양이 쉴 틈 없이 쏟아지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고 연예인을 본 것처럼 수군거렸다.

“해일을 막아 주신 그 위대한 드루이드분이시라고?”

“세상에! 그 대단한 힘을 사용하고 거의 죽을 뻔하셨다던데.”

“아이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어느새 그날의 진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죄다 몰려와 플라멘의 찬양에 입을 더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지만 이렇게 고조된 분위기는 내 가슴을 새우처럼 작게 졸여 펄떡 뛰게 만들었다.

몰려오는 민망함에 얼굴도 들기 힘들 정도였다.

그 와중에 로웰라는 신이 나서 손을 짤깍짤깍 맞부딪히며 흥을 더해 주고 있었다.

“저희 해안 테라리움 연합은 평생 제이 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제이 님께서 도움이 필요하실 때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플라멘이 말하는 해안 테라리움 연합은 11, 21, 31, 41, 51번째 테라리움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미리 약속이라도 된 것처럼 플라멘이 월렛을 꺼내 무언가를 조작하자 내 핸드폰에 알람이 도착했다.

해안 테라리움 연합으로부터 각각 내 가드너 등급이 4등급까지 올라갔다는 알람이었다.

4등급은 내가 28번째 테라리움을 불 보스로부터 지켜 내는 퀘스트를 완료한 후 26번째 테라리움에서 받았던 등급과 같았다.

외부인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로 높은 등급이 4등급이었다.

사업을 위해 연합을 발촉한 10번대 테라리움에 이어 해안 테라리움 연합까지.

테라리움 단위의 커다란 세력이 내게 우호적이라고 하니 이보다 든든할 수 없었다.

거대한 세력인 인페르노를 상대하는 나로서는 이를 반길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인페르노와 악전이 고조될 때, 내가 그들의 테라리움을 뺏었듯 내 테라리움을 노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특히나 내 손으로 직접 일군 28번째 테라리움은 더욱 타깃이 되겠지.

전쟁을 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런 때에 다른 테라리움들이 지원을 해 준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각지의 해안 테라리움 연합의 행정 관리원들에게 소식을 전달하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제이 님을 위한 행사를 열어야겠습니다.”

감사패를 수여하겠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내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들고 위인전을 편찬하겠다는 등, 신화 속 위대한 영웅이 세운 업적을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는 온갖 방식이 내게 떠밀어지고 있었다.

말로 하는 칭찬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어도 이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떤 게임은 높은 전투력이나 PVP 전투의 승률로 순위를 매겨, 최고 순위의 게임 캐릭터를 유저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맵에 동상으로 세워 놓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소위 말해 네임드 유저였다.

NPC급으로 유명한 유저들.

게이머라면 한 번쯤 꿈꿔 볼 만한 자리지만, 아무리 게임 속이라 하더라도 나를 대체하는 아바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직접 어느 곳에 박제가 된다고 하니 쪽팔리기도 하고 민망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전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무릇 세계수의 대리자가 되기로 한 몸, 저는 세계수의 뜻을 널리 전파하여 세계를 이롭게 하려는 순례자의 길을 걷는 한낱 드루이드입니다. 이런 길을 걷는 드루이드는 과한 영광과 보답을 경계해야 합니다. 명예에 도취되면 분명 잘못된 길을 걸을 수도 있으니 말씀하신 모든 것들은 저를 위해서라도 삼가 주세요.”

TV에서 봤던 도를 닦는 수도승에 빙의하여 속세를 거부하는 연기를 했다.

어째 가면 갈수록 내 연기력이 늘어나는 느낌이다.

데이지를 속였던 철모르는 부잣집 자제부터 등 뒤에 거대한 조직이 버티고 있는 간부급 역할까지.

그래도 한순간의 쪽팔림으로 평생의 쪽팔림을 막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있었다.

아예 틀린 말도 아니고 도저히 거부할 만한 명분을 찾기 힘드니 순례자를 들먹였다.

그러자 참된 드루이드라든가 인간 세계수 그 자체라는 등 2차전이 시작됐지만 행사는 겨우 무마되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을 잃을까 봐 걱정했습니다. 그날의 제이 님은 도저히 의술의 힘으로 감당하지 못할 만큼 큰 상처를 입고 계셨거든요. 그래도 이렇게 멀쩡하게 잘 계시는 모습을 보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듭되는 내 거절 의사와 부담스러워하는 행동 때문에 플라멘은 몰려든 사람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그는 우리가 식사를 마저 끝낼 수 있도록 기다리며 그날을 회상했다.

“그러고 보니 이 일대의 생태계가 많이 달라졌다는 말을 들었어요.”

엘더와의 그래프트는 잠깐 비를 내리는 것만으로도 그 지역을 성지로 변화시킬 정도로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해일과 맞서며 바다에 거대한 벽을 두르는 수준으로 그래프트를 펼쳤다.

무려 내가 가진 다이아 수를 제로로 화한 스케일로.

“네, 그렇습니다. 마치 세계수가 변덕을 부린 것처럼 놀라운 변화였죠. 그런 자연 재해를 맞설 수준의 기적이 행해졌으니 오히려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면 더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말씀이 나오신 김에 한번 둘러보시겠습니까?”

대체 어떻게 변화한 걸까?

식사를 끝낸 우린 플라멘의 안내를 받아 움직였다.

그런데 광장을 지날 때였다.

너무나도 눈에 익은 모습에 차마 못 본 척 지나칠 수 없는 무언가가 광장 중앙에 우뚝 세워져 있었다.

백옥처럼 하얀 석상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작은 꽃이 수북한 스태프, 펄럭이는 후드 로브, 눈이 있어야 할 곳에 박힌 반짝이는 에메랄드 보석….

“어… 언니, 저거 엘더 플라워 아냐?”

“바로 알아보셨군요! 그날 해일을 막은 기적을 행한 제이 님의 드라이어드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제이 님께선 초상권이 있다 보니 허락 없이 동상으로 제작할 순 없고, 큰 시련을 이겨 냈다는 사실로 주민들을 고무시킬 장치가 필요했거든요. 반면 드라이어드는 공공재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석상으로 조각했습니다.”

그렇다. 석상은 엘더가 하얀 돌로 굳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똑 닮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광장의 가로수 역시 너무나도 낯익었다. 달콤한 향기를 흩뿌리는 하얀 꽃나무.

“이곳은 엘더 플라워 광장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테라리움의 대표 꽃을 엘더 플라워로 지정했죠. 해안 테라리움 연합은 그날을 기리며 공통적으로 대표 꽃을 엘더 플라워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먼 옛날부터 행운의 부적으로 사용되기도 하니 마침 뱃사람들에게 좋은 꽃이기도 하죠.”

이 모습을 보면 과연 엘더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으스대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니 엄청 좋아할 것 같은데.

절대 아티팩트 밖으로 꺼내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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