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떠나야 하는 미미르가 무슨 말을 할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그리고 난 이미 미미르가 하려는 말을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그래? 무슨 말인데?”
그렇다고 듣기도 전에 미리 거절할 순 없으니 기다려 주었다.
“제이 님은 제가 꿈꿔 왔던 롤 모델이세요. 누구에게나 당당하시고 친절하게 대해 주시죠. 테라리움을 돌봐야 하는 행정 관리원직은 부담이 큰 자리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잘하고 계셔서 자문인들에게만 의지하려고 했던 제가 너무 부끄러워졌어요. 지켜보는 내내 제이 님께 많이 배웠고 그런 제이 님을 누구보다도 닮고 싶었어요.”
“내가 롤 모델이 되었다니 영광이야. 난 사실 누군가에게 그런 대상이 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그래도 너에게 최대한 좋은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잘 비춰져서 다행이야.”
미미르는 푹 고개를 숙였다. 밤색 머리칼이 복슬복슬하게 덮인 정수리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그저 닮고 싶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래선 안 되는 건 알지만…. 이대로 38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행정 관리원직도 버리고… 임시 보좌관이란 신분도 좋으니 그대로 남고 싶었어요.”
“…….”
누군가에게 고백 받는 일은 항상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왔다.
한껏 달아오른 술자리에서도 그랬고 제출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조별 과제를 진행하다가도 그랬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데면데면한 사이에서 대뜸 장문의 톡이 단체 채팅방에 날아온 경우도 있었고, 학과생들이 전부 바라보고 있는 장기 자랑 시간에 내 이름이 들어간 세레나데가 울려 퍼진 일도 있었다.
그건 솔직히 고백이라기보단 다수의 시선을 방패 삼아 쉽게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낸 후, 사회적 평판이라는 볼모를 붙잡은 채 내게 던지는 공격이나 다름없었다.
그땐 차라리 쪽팔림과 분노가 원동력이 되어 거절하는 일이 쉬웠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담백한 상황에 상대방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보니 더 어렵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미미르가 너무 저자세로 나오고 있었다.
“…….”
“저도 모른 사이 제이 님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제이 님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한 저이지만 그래도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어요. 다른 사람과 결혼해야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견딜 수가 없어서… 아무리 가문을 위한 일이라지만 평생을 함께해야 할 다른 사람에게도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상태에서 결혼하는 건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
가까스로 울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도망치고 싶어요. 테라리움도 집안도 전부 버리고. 제가 평생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제이 님이에요. 제가 결혼하면 제이 님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거잖아요? 제이 님께로 도망치고 싶어요….”
내게로 도망치고 싶은 걸까? 미미르를 옭아매는 수많은 부담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걸까?
“음… 일단은 미안해. 네 마음을 받아 줄 순 없어.”
“…….”
미미르는 크게 충격 먹은 표정을 했지만 이내 예상했다는 것처럼 체념하는 얼굴이 되었다.
이래서 어렵고 안타까웠다.
무척 소심한 그가 비로소 힘들게 낸 용기였다.
용기를 내서 나서는 행동은 쉽지 않을 텐데, 그 행동을 거절해야만 했다.
트라우마가 있는 그에게 내가 한 거절은 또 다른 트라우마가 될 수 있었고, 앞으로 용기를 내야 하는 다른 일에 주춤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처럼 극복해 내고 또 다른 도전을 하기엔 미미르의 심성은 너무나 여려 모래 위에 지어진 성과 다를 바 없었다.
미미르는 내 거절을 한때의 잠깐 내리는 비가 아니라 거친 해일로 받아들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모래성을 와르르 무너뜨릴 풍파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려야만 할 텐데.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부 고친다면… 더 나아지도록 노력한다면… 제이 님이 원하는 대로 전부…. 그러면 받아 주실 수 있나요?”
“내가 원하는 건, 아니 네게 필요한 건 내 눈에 들기 위해 널 개선시키는 게 아냐. 너 자신을 위해 나아져야지. 도망치고 싶다고? 그럼 네가 손에 쥐고 있는 38번째 테라리움은 자문인들에게 그대로 넘길 거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당장 내가 보기에도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있는데 그 안의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볼 순 없을 것 같아. 그런데 너마저 떠나 버리면 그 사람들은 어떡하니? 넌 내게로 도망치겠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나란히 함께 서고 싶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해. 난 연애를 한다면, 누굴 내 밑으로 거두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가 되는 게 좋아.”
“…….”
“아무것도 몰랐던 나도 테라리움을 맡게 된 이상 좋은 행정 관리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그리고 넌 내 이런 모습을 보고 좋아했다며? 그런 내가 고작 내 눈에 들기 위해 당장 네 손에 맡겨진 테라리움도 버리겠다는 널 좋게 볼 수 있겠니?”
“죄송해요.”
“내게 네 마음을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를 냈는지는 잘 알아. 그래, 미미르. 많이 어려웠지?”
미미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뚝뚝 흘리는 눈물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이 네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를 낸 거라면 네가 38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가 자문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용기를 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거란 생각이 들어. 돌아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내게서 많은 걸 배웠다는 너의 말이 거짓이 되겠지.”
“아니에요, 정말 많이 배웠어요!”
“그렇다면 네가 할 일은 도망이 아니라 책임에 따른 의무를 행하러 돌아가는 거야. 말했듯이 난 동반자를 원해. 네가 어엿한 행정 관리원이 되어 최고의 테라리움으로 만들어 봐. 널 허수아비 삼는 자문인들을 물리치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살기 좋은 테라리움이 되는 거야.”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난 내 28번째 테라리움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게 만들 거야. 네가 내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면 적어도 내 테라리움의 위명에 비견될 정도는 되어야 하지. 넌 나처럼 드루이드가 아니니 드루이드로서의 위명을 떨칠 순 없고 비슷한 조건을 맞추려면 적어도 행정 관리원으로서 잘해야 하겠지? 넌 미처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내 운영 방식은 네가 할 수 있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거야. 이미 봤잖아? 난 튼튼한 자금력을 이용해 테라리움을 운영해.”
미미르는 집안도 좋고 다이아도 많으니, 비록 내 무한 다이아에 비할 바는 못 돼도 다이아를 벌어들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다른 행정 관리원들과는 사정이 다르지.
행정 관리원의 월렛이 풍족하면 테라리움도 풍족해진다. 이건 내가 28번째 테라리움을 운영하며 느낀 진리였다.
“다이아를 옳은 방식으로 쓴다면 지금의 자문인들보다 좋은 인재들을 곁에 둘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무턱대고 다이아를 쓴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니니 제대로 쓰는 방법을 아는 것도 중요하겠지. 넌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네가 가진 장점을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해. 물론 지금처럼 스스로를 과하게 비난하는 태도는 버려야 하겠지만.”
“그럼 제가 38번째 테라리움을 제이 님의 테라리움처럼 잘 운영하고 유명해지게 만들면… 그땐 제이 님의 곁에 있을 수 있나요?”
“뭐… 그때 봐서야 알겠지만….”
미미르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럼 노력할게요! 결혼도 집안을 설득할게요. 제이 님의 말처럼 제가 보여 드릴게요!”
솔직히 넌 어려서 예선 탈락이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나이는 스스로가 노력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 미미르에게 큰 패배의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내 말을 기회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건 거절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미미르가 다이아가 많아도 내 무한 다이아를 이길 수 없으니, 우리 테라리움에 비견될 만큼 꾸린다는 것은 내 생각에 불가능에 가까웠다.
따라잡으려고 아등바등 노력한다면 그 변화는 미미르에게 유익할 것이고, 그렇게 테라리움을 꾸리다 보면 언젠간 다른 좋은 사람이 눈에 들 것이다.
또 일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레 연심은 점차 희석되겠지.
“그래, 열심히 노력해 보렴.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미미르는 눈물을 닦으며 밝게 웃어 보였다.
내 생각은 전혀 모르고 희망을 가진 그에게 씁쓸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미르와 헤어지고 난 후, 그의 가족들이 당장 테라리움을 떠나지 않고 좀 더 묵고 갈 것이란 연락을 받았다.
아무래도 미미르가 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약혼을 위한 양가 상견례를 앞두고 있었다는데 출발을 늦춘다는 것은 약혼에 대한 결정이 바뀐 것일 테니까.
어쩌면 미미르가 하루라도 더 내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에 테라리움에 있고 싶어 하는 걸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난 오늘 밤,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날이 밝은 후에 출발하는 게 낫지 않아?”
은은한 가로등만 어둠을 밝히는 거리를 걸으며 엘더가 물었다.
“중간에 시들링과 로웰라와 합류할 거야. 31번째 테라리움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기로 했어.”
“그럼 마차라도 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운동 겸 걷는 게 나아.”
“너 걷는 거 싫어하잖아? 아침에 운동도 하더니… 많이 변했네.”
걷는 건 싫어하고 산을 오르는 것은 죽도록 싫지.
하지만 계속 게으르게 있다간 사상 최초로 운동 부족으로 죽는 드루이드가 될 수 있는데 노력해야지.
뉴비라고 생각했던 로웰라도 이런 점에선 나보다 뉴비라고 할 수도 없었으니까.
더구나 세계수가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이후로, 내가 운동할 때마다 체력이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확연히 느끼게 되니 욕심도 났다.
정말 게임처럼 내 육체의 레벨이 오른다는 기분이 드니, 게이머로서 만렙을 향해 달려야 하지 않겠어?
“너 혼자 밤은 위험해. 그 녀석들은 어디서 만나는데?”
“31번째 테라리움에 용무가 있어서 들러야 하니 그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은 31번째 테라리움에서 방향을 잡아 볼까 생각 중이야.”
곁에 다른 이들이 없으니 내 드라이어드들은 아티팩트 안에 있는 대신 내 옆에서 발맞춰 함께 걷고 있었다.
일행 없이 나 홀로 드라이어드들과 걷고 있으니 어쩐지 첫 여행이 떠오르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