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어렵게 태어난 아이다 보니 제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나 보네요. 아이가 저리 철부지가 된 것도 결국 다 제 탓입니다. 미미르를 돌봐 주시느라 그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이는 제가 책임지고 집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아… 네, 뭐….”
“에트나, 미미르가 집으로 끌려간다 하더라도 순순히 약혼을 받아들이진 않을 걸세. 이미 아들 마음에 주인이 있는데 쫓아낼 순 없지 않는가?”
내내 조용히 있던 잉켄이 자상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말했다. 에트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엔 사랑이 가득했다.
“아직 한창 그럴 나이이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오히려 여태 그런 마음을 보이지 않은 것이 이상했지. 하지만 이건 다 미미르를 위해서야. 곁에 붙여 놓으면 달라지겠지.”
“당신이 미미르를 위해 한 일은 죽을 것을 각오하고 샘의 원천을 마신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네. 덕분에 아이가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번 약혼 건은 미미르가 먼저 원할 때까지 잠시 보류하는 게 어떨까 싶네.”
“넵튜누스 가문과 혼약을 바라는 가문은 많아. 시일이 지나도 그들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줄 것 같아? 그 집안의 여식이 무슨 변덕으로 우리 아들을 점찍었는지는 몰라도, 미미르의 마음이 시간이 흐르면 변한다고 믿는 것처럼 그 아이의 마음도 변할 수 있어.”
자식의 장래를 걱정하는 부모들의 대화에 낄 수도 없으니 이 자리가 어색할 따름이었다.
그때 내게 한 줄기 빛이라도 내린 것처럼 핸드폰의 알람이 울렸다.
칼롱의 말벌이 들고 온 메시지였다.
그에겐 미미르와 알력 다툼할 목적으로 관광을 떠난 38번째 테라리움의 자문인들이 간절히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할 마음이 들도록 행동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집으로 향하고 있다는 전보가 왔다.
상당히 악독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칼롱의 방해 공작에도 이 정도까지 버텨 낸 걸 보면 그들은 굉장히 끈질기고 뻔뻔한 인간들임이 분명했다.
가만 놔뒀다면 한 달을 채우는 장기전이 될 뻔했다.
어쨌든 그들이 38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가는 중이라면 미미르도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자문인들이 테라리움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굳이 두 분께서 강제로 데려가려고 하지 않으셔도 미미르는 제 발로 돌아갈 거예요.”
“원래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아이는 현재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이유가 또 있지 않습니까?”
잉켄은 그리 말하며 내게 윙크를 했다.
미미르의 발언이 워낙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지라 너무 얼떨떨한 나머지 무심코 넘길 뻔했다.
“음….”
“그 꼬맹이가 널 좋아한다는 거야?”
엘더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엘더 꼬맹아, 아직 네가 끼어들 타이밍이 아니란다. 제이는 인간 사회의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니?”
좀 전과도 같은 일이 아니라면 메스키트는 내가 대외적으로 활동할 때 드라이어드들이 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티팩트에 있거나 밖에 있는 등 일부러 나에게서 적당한 거리를 둬 주었다.
“덜 자란 게 사람 좋은 건 알아서.”
“나도 내 진리가 좋은데?”
마거리트가 툭 끼어들었다.
“멍청하긴. 드라이어드가 사람 좋아하는 거랑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같을 것 같아? 그 꼬맹이는 제이의….”
슬쩍 손을 들자 메스키트가 엘더를 덥석 들어 올려 방 끝으로 데려갔다.
드라이어드들이 떠드는 통에 에트나와 잉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들은 드루이드가 아니기에 다행히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저를 향한 미미르의 마음이 언제부터 그리 발전했는지 미처 몰랐네요. 절 향한 태도는 단순히 본받고 싶다는 마음에서 오는 줄 알았습니다.”
바보도 아니고 그런 떨리는 눈을 보고도 못 알아볼 내가 아니었다.
“솔직히… 저도 에트나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지금은 제가 잘 대해 주고 근래에 자주 함께했으니 미미르가 그런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어린 시절 동경하던 선생님을 남몰래 짝사랑해 본 경험이 있어서 말씀드리는데 결국은 마음이 변할 거예요.”
학교 다닐 때 말도 한 번 제대로 못 걸어 본 선배를 좋아하거나 자상하고 친절한 선생님을 좋아하는 학생들은 흔했다. 나도 그중 하나였고.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보내니 마주치거나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겉으로 보이는 대외적 이미지는 사람들 누구나 타인에게 좋게 보이려고 치장하니 혹하기에 좋았다.
더구나 대부분 학교 안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 많은 사람들을 보고 겪는 경험이 적은 경우, 눈앞에 놓인 대외적 이미지만을 보고 일생일대의 운명, 다시 보기 힘든 최고의 이상형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착각은 사람을 단순하게 물들이고, 든 물이 넘쳐 흠뻑 빠진 이상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니 그 사람의 좋은 점만 고집스럽게 눈으로 좇게 되는 거다. 빠져든 자신의 마음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미미르는 어쩌면 그의 인생에 나타날 가장 멋진 사람이 나라고 착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난 그에게 행정 관리원다운 최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미미르가 속으로 움츠러들려는 성격을 깨부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지낸다면 깨달을 것이다.
세상엔 나 말고도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미미르는 아직 우물 안이었다. 그 애는 아직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 바다를 가 보지 못했다.
“미미르는 성정이 여려도 착한 아이예요. 지금은 어려서 그렇지, 저희 집안 피가 어디 가지 않으니 성숙해지면….”
에트나의 발화가 묘했다. 그녀는 날 설득하고 있었다.
태세를 바꿨구나. 차라리 내 맘에 미미르를 들이부어 보려는 심산이었다.
“애초에 이곳을 방문한 이유도 그러하니 양쪽의 마음만 맞다면….”
나에 대한 에트나의 첫인상은 좋은 편이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38번째 테라리움을 선물하려고 했으니까.
“음, 미미르에겐 안타깝지만 제 타입은 아니기도 하고….”
타입을 떠나 애가 너무 어리지. 이 세계에선 그 나이대에 모험도 떠나고 결혼도 하는 게 자연스러운 나이 같아 보이지만, 네 살 연하의 궁합도 안 보는 나이 차이라고 하기엔… 내 세계에선 미미르는 새파란 고등학생이었다. 미성년자란 말이다. 잡혀가요, 잡혀가.
“더구나 전 아직 할 일이 많고 저 자신을 챙기는데 바쁩니다.”
“그래도 제이 님의 사정을 알게 된다면 미미르가 귀찮게 굴 아이는 아니에요. 분명 허락만 해 주신다면 아이가 곁에서 열심히 배우고 잔심부름이라도 들면서….”
에트나는 나를 최선의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꽤 끈질겼다.
“미미르는 빠른 시일 내에 떠나는 게 좋을 거예요.”
명백한 거절에 에트나가 침음했다.
“전 테라리움 일을 돌보느라 너무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렀고, 행정 관리원이란 신분보단 드루이드로서의 사명감을 더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즉 이렇게 앉아서 일하는 것이 아닌 세계를 떠돌며 모험하는 것이 제게 더욱 맞다는 거죠. 현재는 제가 장기간 자리를 비워도 테라리움이 잘 운영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강화하고 있었고…. 준비는 모두 끝났으니 내일 바로 테라리움을 떠날 예정입니다.”
사실 내일 바로 떠나는 일정을 잡은 것은 아주 즉흥적이었다.
물론 오늘 미미르의 가족들이 방문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시간에 언제 떠날지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내일이 아니더라도 가까운 시일 내로 출발일을 잡았겠지.
28번째 테라리움은 이제 안정화가 되었다. 보좌관도 뽑아 놨으니 인수인계만 잘해 두면 행정 관리원이 굳이 상주하지 않아도 잘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군요…. 말씀하신 대로 오늘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편하신 대로 하셔도 됩니다. 오신 김에 28번째 테라리움을 관광하셔도 되고요. 미미르의 일을 떠나서라도 여러분들을 앞으로 제게 중요한 파트너가 되실 분들이니 식사나 숙박은 이쪽에서 모두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가족사로 속이 많이 힘드셨을 텐데 푹 쉬고 가세요.”
“아니에요. 이곳에 오래 남아 봤자 아이의 마음만 괴로울 것 같네요.”
에트나와 잉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뛰쳐나간 아들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그들을 과수원 입구까지만 배웅해 주고 난 내 일을 보기 위해 움직였다.
바로 내일 테라리움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니 모두에게 부재를 알리고 준비를 해야 했다.
차라리 잘됐다.
이런저런 이유로 계속 테라리움에 남아 있으면 생각지도 못한 일이 내 발목을 붙잡을 수도 있었다.
기왕 마음먹은 거 얼른 자리를 떠야지.
벌을 이용해 길드원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정말 내일 떠나려고?”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은 물론 다른 가디언들도 찾아야 하고, 태초의 군락지도 찾아서 장비 강화도 해야 하지. 그리고 너희 포레스트도 일궈야 할 것 아냐? 아이고. 할 일이 너무 밀려 있네. 정말 내가 계속 테라리움에만 머무를 때가 아니었잖아?”
문득 오늘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아서 집에 고이 눕혀 두고 온 실새삼이 떠올랐다.
실새삼에 대한 정보도 계속 알아봐야겠지.
아무래도 길드원들에게 맡겨 놓는 것보다 내가 직접 발로 뛰어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윙윙, 벌의 날갯짓 소리가 폰에서 울렸다.
시들링과 로웰라의 메시지였다.
의뢰를 그대로 수행하겠다는 다른 길드원들과 달리 둘은 테라리움에 돌아오겠다고 답했다.
같이 여행을 떠나자는 거겠지.
한창 성장할 나이인 로웰라는 정보 수색 의뢰보단 나와 같이 경험을 많이 해 보는 것이 중요했고, 시들링은 애초에 떼어 놓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럼 둘이 도착할 동안 여행 준비물 좀 점검해 볼까?”
비상식량은 몇 년을 밖에서 나돌아도 먹고살 수 있을 만큼 충분했지만, 다른 지형을 대비한 준비가 부족했다.
스노우 필드나 데저트 필드처럼 극단적인 환경에서 버티기 위한 준비와 거친 지형을 오르내릴 때를 위한 대비.
저번에 미끄러질 뻔했으니까 산악 용품 같은 것을 알아볼까?
“양성소 쪽은 많이 신경 쓰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쉽긴 한데….”
그곳의 총책임자는 이리스 파티와 같은 길드 출신인 스코풀루스가 맡게 되었다. 무척 책임감 있고 실력이 출중한 사람이니 잘해 줄 것이다. 더욱이 이리스가 자부하는 사람이니 믿을 만했다.
양성소 직원들에겐 차후 테라리움 전속 길드인 가이아에 가입해 줄 수 있는지 선택적 제의를 해 둔 상태였다.
다른 길드원들과 다르게 그들은 양성소가 제대로 자리 잡고 장기 근속하게 된다면 가입할 수 있다는 조건이 걸려 있었다.
실력 있는 드루이드들이라 욕심이 나긴 해도 전속 길드다 보니 대외적으론 문턱이 높아 보여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 길드 가입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니 예비 길드원들이나 다름없었다.
과수원과 더불어 양성소 역시 안심해도 될 것이다.
아직 28번째 테라리움을 떠나지 않은 루프와 필라에게 부탁해 평범한 말벌을 구해 와 보좌관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루프에게 파필리온에게 전해 줄 말벌을 부탁해 두었다.
파필리온과 계속 편지만 주고받을 순 없으니까.
내가 떠나기 전 은둔자의 정원 출신 보좌관을 한 명 더 뽑고 싶었는데, 사람을 알아봐 주겠다고 한 촌장 아세르가 영 감감무소식이었다.
많이 어려운가? 아무래도 다음에 28번째 테라리움을 방문했을 때나 새로운 보좌관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보좌관 일은 디케와 에이레네가 잘해 주고 있으니 그리 급한 것은 아니었다.
차곡차곡 떠나기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제이 님….”
이미 가족들과 돌아간 줄 알았던 미미르가 여태 도망 다닌 것인지 내 앞에 나타났다.
“테라리움을 떠나기 전에 제이 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발개진 볼로 우물쭈물하는 행동에 어쩐지 머리가 조금 아파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