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0화 (280/604)

“제이 님을 의심하지 마…. 엄마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분이 아니야. 제이 님께서 배려해 주셔서 이곳에 오랫동안 지낼 수 있었던 거고… 곁에서 행정 관리 일을 지켜보며 배울 수 있도록 기회도 주셨어.”

호기롭게 소리쳤지만 막상 나오는 목소리는 개미가 기어가는 수준이었다.

난 2차 시험에서 흑화했던 미미르의 모습을 다시 보는 건가 기대했지만, 아무래도 어떠한 동기가 없다면 쉽사리 끌어낼 수 없는 모습이었던 건지 아쉬웠다.

“왜 38번째 테라리움은 버려두고 여기서 지내는 거니? 네 의지가 맞아?”

그들은 혹여나 내가 미미르를 붙잡아 두고 떠날 수 없도록 한 게 아닌지 의심하는 듯했다.

납치에 감금, 협박이라…. 갑자기 희대의 악당이 된 기분이라 불편했지만, 이 오해가 지나치게 깊어지기 전에 풀릴 것 같아 어느새 해탈한 마음으로 미미르가 말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솔직히 오해를 받는 것이 기분 나쁘긴 해도 나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으니 꿀릴 것이 없지 않겠는가?

“그런 거 아니래도!”

미미르는 자신이 38번째 테라리움에서 자문 위원회로부터 받고 있는 무시와 그로 인해 겪고 있는 곤욕 그리고 28번째 테라리움에 장기 숙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어쩐지 분위기로 미뤄 볼 때, 이 주제를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제 스스로 치부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왜 네가 그런 일을 겪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니?”

“아카데미를 자퇴해서 가족들을 실망시켰으니까…. 이번만큼은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 내가 테라리움을 잘 운영해서 어엿한 어른이 되는 걸 다들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말해도… 우리 가족들은 테라리움의 일에 직접적으로 상관해선 안 되잖아. 만약 지금처럼 화가 난 엄마가 개입이라도 한다면… 1번째 테라리움이 가만두고 볼 리가 없고….”

분명 미미르 뒤에 든든한 배경이 있는데 왜 그를 방치하나 궁금했었다. 솔직히 직접적으로 개입은 불가해도 저 정도 사람들이라면 사람을 심든가 해서 간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았나 싶으니까.

하지만 이 자리에서 확인한 결과, 그들은 미미르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곤 해도 이토록 철저하게 무시받으며 지내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는 눈치였다. 정말로 전적으로 미미르에게 전부 맡겨 둔 후 그 주변에 어떠한 눈과 귀도 붙이지 않았을 줄은….

이건 그들의 아들 사랑으로 비롯된 강한 믿음 때문인 걸까? 아니면 그만큼 1번째 테라리움이 매우 두려운 존재라 어떠한 후환도 두지 않으려는 처신이었던 걸까?

“내겐 제이 님이 희망이었어. 제이 님께 배워서 38번째 테라리움을 다시 제대로 운영해 보려고 했었어.”

“자문 위원회라고 했지? 이 태워 죽일 놈들…! 감히 내 아들을…!”

주변이 다시금 후끈 달아올랐다. 순식간에 한여름의 낮에 그늘 하나 없는 땅에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분위기는 심각했지만 그래도 슬슬 오해가 풀리는 듯해 나는 ‘베스탈리스는 겨울에 추위를 타지 않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제 아들을 이토록 친절하게 보살펴 주고 계시는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들이 이리 힘들어할 동안 가족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무척 부끄럽네요. 더구나 힘들 때 집안의 사정 때문에 아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지도 못하고….”

“저도 죄송합니다. 미미르는 알고 계시다시피 저런 유한 성격 때문에 아카데미 시절에도 이용해 먹으려는 인간들이 많아서 저도 모르게 날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동생에게 접근해 구슬려서 다이아를 뜯어내기도 하고 수상한 계약에 공증인으로 쓰는 등 참 조악한 수를 많이 썼어요. 친한 친구라며 소개해 줬던 아이가 생일 선물이란 명목으로 땅문서를….”

에트나와 포르낙스가 차례로 내게 사죄했다.

학창 시절 이리저리 삥을 뜯기던 아이, 그게 미미르였던 것이다.

“그…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돼!”

미미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미미르가 좋지 못한 학창 시절을 보낸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이가 워낙 큰 수모를 당했으니 가족분들께서 지레 의심하실 수도 있다고 봐요. 보여 주신 행동들이 어떠한 인과로 발생한 것인지 전부 알고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오해를 풀고 사과를 받았으니 전 괜찮아요.”

그저 작은 해프닝이었다. 미미르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분위기는 좀 더 험악해졌겠지만.

“집에 올 때를 제외하고 좀처럼 38번째 테라리움을 떠나지 않던 아이가 갑자기 장기간 자리를 비운 데다 이유도 말해 주지 않으니 걱정됐답니다. 더구나 묵고 있는 장소도 계속 알려 주지 않아 결국 사람을 보내 이곳 28번째 테라리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현재 자문 위원회와의 기 싸움이라는 수치스러운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묵고 있으니 이유를 설명하기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약혼을 위한 양가 상견례가 곧인데 연락을 자꾸 피하니 저희 쪽에선 정말 당혹스러웠답니다.”

“약혼?”

“엄마!”

미미르가 약혼을 한다고? 저렇게 어린애가?

너무 놀라서 입만 벌린 채 미미르를 바라보니 그가 엄청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좋은 넵튜누스 가문에 혼처를 알아보고 있는데 마침 갑자기 그쪽에서 먼저 만남을 주선해 주셨답니다.”

“맞아요. 그런데 대뜸 미미르가 자신은 미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포르낙스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미미르를 바라보았다.

“미래를 약속?”

“그… 그런 뜻이 아니었어! 내 미래를 위해 도와주실 고마운 분이 있다고….”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결혼은 못 하겠다고 했잖아?”

“그게 아니라 지금은 결혼보단 좋은 분께 가르침을 받아 공부해야 될 마음뿐이라고….”

“곁에서 항상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라며?”

미미르의 얼굴은 갈수록 붉어졌다.

“내가 곁에서 항상 따라다녀야 전부 배울 수 있으니까…!”

“네 모든 걸 다 주고 싶다며?”

“당연히…! 내게 큰 도움을 주시니까 보답해야지….”

내가 어쩌다 미미르의 미래 아내로 찍혔는지, 그 오해가 굳어지는 과정이 술술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통 미스가 불러일으키는 폐단이 이렇게 극적일 줄은… 좀 재밌기도 했다. 아주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네.

결국 미미르는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내 임시 보좌관으로서 일하게 된 경위를 털어놓게 된 듯한데, 그 과정에서 가족들이 다른 방향으로 이해하게 된 듯했다.

만약 이 자리에 이리스나 제퍼가 있었다면 신이 나서 날 놀렸을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전에 시들링 전남친 사건 때처럼.

“후, 이런 가족사에 완전 남인 제이 님께서 원치 않게 연관되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젠 미미르와 완전히 남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죠. 테라리움의 번호 연계법은 굳건하니까요. 곁에서 지켜보니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진심으로 38번째 테라리움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처음이 좋지 않았지만, 강경파 베스탈리스에 대한 건은 제이 님께서 미미르를 도와주신 연도 있으니 저희가 최대한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언제가 됐든 정식으로 자리를 마련해 주신다면 응하겠습니다.”

어찌 됐든 결국 바랐던 대로 온건파 베스탈리스들과 연을 트게 된 건가?

좀 더 시간과 과정이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미르, 네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비우고 계속 여기 있어선 안 된단다. 약혼 건도 있으니 이만 돌아가자꾸나.”

“그래, 결국 네게 다른 연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네 미래를 위해서라도 좋은 넵튜누스 가문과 결혼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가 아무리 과거를 지우려고 해도 흰 종이에 떨어진 잉크처럼 끝까지 오점으로 남겠지. 그러니 넵튜누스와 지속적으로 연을 맺어 지우진 못해도 잉크 위에 종이를 덮는 방식으로 오점을 가려야 해.”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으로 인해 결국 베스탈리스들은 자신의 운명을 오점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들의 입을 통해 대놓고 들으니 가슴 한쪽이 저릿해졌다.

이건 꼭 내가 선택 없이 드루이드가 된 것처럼, 베스탈리스 역시 선택 없이 그렇게 태어났을 뿐인데 오점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

미미르는 가족들의 설득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찌 됐든 결혼이 먼저가 되겠지만 함께 오래 살다 보면 정이 들고 사랑도 싹틀 거란다.”

“그래, 지금부터라도 상대방을 좋아하려는 마음을 가져 보렴. 다행히 네가 아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얼굴과 이름은 익히 아는 여자아이란다. 너와 같은 아카데미 출신으로 성적도 좋고 똑똑하다고 하니 곁에서 많이 의지할 수 있을 거야.”

“그래그래, 지금 네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지. 연애가 뭐 별거니?”

마음에도 없는 정략결혼이라.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집안을 위해 희생해야 되는 미미르가 딱하긴 했다.

더구나 베스탈리스 출신이라는 집안 입장상 상대 쪽 넵튜누스 집안에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모양이니 더욱 안타까웠다.

그래도 에트나와 포르낙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꽤 반듯한 아이가 미미르의 짝이 될 모양인데, 그렇다면 38번째 테라리움의 운영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소심하고 유약한 아이에게 야무지고 똑똑한 짝이 붙으면 자문 위원회도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이리스는 내가 미미르를 도와주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굳이 내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아도 개선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듯한데….

“약혼도… 결혼도… 못 해! 안 할 거야!”

미미르는 톡 터진 봉숭아꽃처럼 울분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소리니? 언제까지 너의 어리광을 내버려 둘 순 없단다. 38번째 테라리움의 상황을 봐서라도 네겐 좋은 선택이 될 거야.”

“좋아하는 사람 있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데 어떻게 모르는 사람이랑 결혼을 해.”

그렇게 외친 미미르의 얼굴이 데이지의 머리색처럼 붉어졌다.

“뭐? 다 오해였다며.”

“말벌로 주고받은 메시지는 전부 오해였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너! 겨우 약혼 자리를 피하기 위해 하는 거짓말이라면 아무리 널 사랑하는 나라도 크게 화낼 수밖에 없단다.”

미미르를 바라보는 에트나의 얼굴이 매섭게 변했다.

그녀는 철부지 아들을 엄벌하려는 엄마의 모습으로 미미르가 무슨 핑계를 대든 혼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미미르가 터지기 직전의 홍시 같은 얼굴로 대뜸 날 바라보았다.

넘치기 직전의 온갖 감정을 간신히 갈무리한 것처럼, 요동치는 감정의 여파로 인해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곤 그는 팽하니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미미르!”

포르낙스가 부리나케 그를 뒤쫓았고, 미미르의 마지막 시선이 멈춘 곳을 알아차린 에트나는 열에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눅눅한 얼굴을 했다.

방금 뭐야? 뭔데?

“허허허….”

정적이 휩싸인 방 안에서 잉켄의 푸근한 웃음소리가 유유히 헤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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