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9화 (279/604)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연애를 했단 말인가?

말 한마디로 없던 연애사가 생겨 버린 시들링도 있으니….

어찌 됐든 내가 제대로 잘못 엮인 것이 분명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 혹시 결혼을 준비 중이셨나요?”

“그럴 리가요. 저는 일하느라 바빠서 연애할 틈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나저나 이를 어쩐다….”

날 찾아온 사람들이 미미르의 가족들인 건가?

그렇다면…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이라는 건데.

미미르, 내가 널 그들과 연을 만들기 위해 다리로 사용한다고 했지만 사랑의 오작교로 쓰겠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다가 문득 이 상황이 너무 어이없단 생각이 들었다.

“손님들을 모셔와 주세요. 그리고 다과를 준비해 주세요. 두 분은 그 후 손님들이 나가실 때까지 집무실 방문을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자매들이 나가고 잠시 뒤, 날 찾는다는 손님들이 미미르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왔다.

중년의 여성과 남성 그리고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여성 한 명.

중년의 남성을 제외한 두 여성에게선 내가 처음 메스키트를 만났을 때 느꼈던 것처럼 엄청난 기세와 위압감이 느껴졌다.

미미르는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겠는지 집무실에 들어오는 내내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고를 쳤으면 말이야… 사람이 마음의 준비는 제대로 하게 해 줘야 할 거 아냐?

“안녕하세요,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제이입니다.”

“반갑습니다. 저흰 그저 보잘것없는 회사 하나를 운영하는 경영진들입니다. 여기엔 업무 목적이 아닌 미미르의 가족 되는 신분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막내아들에게 테라리움 하나를 안겨 줄 정도인데 보잘것없는 회사라니?

“전 미미르의 엄마인 에트나입니다. 이쪽은 제 남편 잉켄, 그리고 여긴 제 둘째 딸 포르낙스입니다.”

차례로 소개된 이들이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미미르는 자신의 엄마나 누나완 닮은 점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아빠와 거푸집에 찍어 낸 수준으로 똑같았다.

아마 미미르가 그대로 자라 나이를 먹는다면 미래의 모습이 저러할 것 같았다.

“미리 연락을 하셨다면 준비를 했을 텐데, 보시다시피 전 오늘 일정에 대해 전혀 들은 것이 없어 조금 당황스럽네요.”

미미르, 듣고 있니? 언제까지 땅만 보고 있을 거니?

“그 점에 대해선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미래를 약속한 여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가족들을 속여 온 데다 도통 소개해 주려고 하지 않으니 저희 쪽이 애가 닳아 무턱대고 찾아올 수밖에 없게 되었답니다.”

“미래를 약속?”

“어… 엄마….”

“왜 그러니 우리 아들?”

뭐지? 이 상견례라도 하는 분위기는?

정말 저들은 날 미래의 며느리라고 생각하고 온 거야? 그것도 미미르의 아내? 아•내•?

“음, 일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겠어요?”

손님용 소파는 하나에 세 명이 앉아도 충분할 정도로 넉넉했지만, 미미르는 기어코 제 가족들이 앉은 자리에 구겨 앉으려다 누나인 포르낙스의 손짓에 터덜터덜 내 옆으로 다가왔다.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모습처럼 축 처져 있었다.

같은 공간에 좁혀 앉으니 뭔가 그 주위가 난로라도 튼 것처럼 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등장만으로도 주위를 뜨겁게 달구던 인페르노의 수장인 애쉬가 떠올랐다.

이런 점은 베스탈리스들의 특이성인 걸까?

“제이 님께선 28번째 테라리움을 건실하게 잘 운영하고 계시는군요. 주민들의 표정은 모두 밝고 직원들은 체계가 잘 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낙후된 건물이나 시설도 없고 한 자릿수 테라리움들에 비할 바 없이 풍족해 보여요. 행정 관리원님의 능력이 출중하시니 이토록 테라리움이 잘 돌아가고 있는 거겠지요.”

날 바라보는 에트나의 눈은 그녀의 기세를 파훼해 버릴 만큼 나에 대한 호의로 가득했다.

그녀와 달리 잔잔한 호수와 같은 분위기를 가진 잉켄은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고, 포르낙스는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사람처럼 집요하게 날 살펴보고 있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저는 그저 함께 일하는 분들의 덕을 많이 보고 있을 뿐이죠.”

황금 호박 상회에서 파견되어 이곳에 상주하며 과수원 내 모든 식품을 취급하는 직원들이 빠르게 다과를 세팅하고 나갔다. 찻잔을 바라보는 에트나의 눈빛엔 호의가 더욱 짙어졌다.

뭔가 이런 장면은 드라마를 통해서만 봤는데, 직접 주연 배우가 되어 그 장면 속에 앉아 있으니 기묘한 기분이 날 부채질했다.

“미미르가 정말 말재주가 없는 아이였군요. 이렇게 대단한 분을 간단히 멋진 사람이라고만 축약하다니.”

이 어이없는 상황 속에서도 천천히 사건을 정리하며 머리를 굴리는 나와 다르게, 미미르는 툭 건들기만 해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이 봉숭아 꽃망울처럼 움츠리고 있었다.

그가 직접 나서 상황을 정리하는 걸 바라긴 글렀다 싶었다.

“지참금으론 미미르가 소유한 38번째 테라리움을 통째로 제이 님께 인도할 생각입니다. 못난 아들을 대단한 분께서 친히 거둬 주겠다고 하시니 더 챙겨드려야 할 텐데, 아직 재산 정리가 끝나지 않아 미미르 앞으론 38번째 테라리움이 전부입니다. 결혼식만 제대로 올린다면 차후 천천히 미미르 앞으로 상속을….”

지참금이요? 아무렇지도 않게 38번째 테라리움을 통째로 내게 넘긴다는 말에 머리가 띵 해지는 기분이었다. 작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음, 말씀드렸다시피 저와 미미르 사이에 큰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많이 부족한 아이지요. 물론 아직 아이가 어려 결혼 이야기가 오가기엔 이르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어려도 너무 어리지 않나요? 제 세계에선 미미르는 새파란 고딩이라고요! 저는 애새끼에 전혀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적정 나이가 되기 전에 아이가 어엿한 한 사람분의 몫을 할 수 있도록 행정 관리원 직에 무리하게 앉혔더니 곤욕을 치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희 집안 아이답지 않게 심성이 많이 여리고 눈물이 많다 보니 책임감이 막중한 자리를 버티지 못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마침 이렇게 그 자리를 지도해 주실 수 있는 좋은 분과 만나고 있다고 하니 아이가 기는 약해도 운은 강하게 타고난 것 같습니다. 저희 집안은 이전부터도 그랬고 앞으로도 38번째 테라리움의 운영에 대해 일절 터치하지 않을 테니 제이 님께서 아이가 적령기가 될 때까지 가르치고 키워 주신다면….”

“전 미미르와 사귀는 사이가 아닙니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는 더욱 아니에요.”

“그럼 제 동생을 가지고 놀고 계신다는 건가요?”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포르낙스의 기세가 한층 험악해졌다.

나를 향해 살기와 같은 부정적인 반응을 비추는 것은 좋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이 베스탈리스임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한 진득한 불의 기운은 더욱.

쾅!

거대한 방패가 우리 사이의 시선을 차단했다.

내 드라이어드들이 내 안전에 대한 것이라면 뭐든지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메스키트는 적을 상대하는 얼굴로 미미르의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속속 아티팩트에서 튀어나오는 내 드라이어드들은 굳은 표정으로 날 둘러쌌다.

“드루이드셨군요.”

포르낙스와 달리 에트나는 공격 태세인 내 드라이어드들을 보고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네, 여긴 제 드라이어드들입니다. 보시다시피 매우 충실한 나머지 저에 대한 위협을 아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난 괜찮으니까 그럴 필요 없어. 이건 그저 사람들 사이의 소통 미스가 빚어낸 오해일 뿐이야.”

메스키트는 천천히 방패를 치우며 힐끔 날 바라보았다.

“내 주인, 제이. 이들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 거겠죠?”

“저들 중에 베스탈리스가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우리가 저번에 상대했던 것처럼 다짜고짜 불로 공격하는 성정의 사람들은 아냐.”

“베스탈리스에 대해 알고 계시는군요….”

시종일관 침착함을 유지하며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던 에트나의 기세도 달라졌다.

“메스키트, 그만. 자꾸 이렇게 위협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면 상대도 날이 설 수밖에 없어. 난 지금 행정 관리원으로서 그들을 대하고 있어. 저들은 과거 신분 때문에 테라리움과 척을 지는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없으니 날 공격 못 해.”

“그것도 아주 잘 알고 계시고요.”

날 보는 에트나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다.

메스키트는 방패를 치우고 멀찍이 떨어졌다.

그녀는 내 지시에 한 발 물러섰다곤 해도 언제든지 날 지키기 위해 뛰어들 것처럼 벼르는 얼굴이었다.

“네, 미미르의 가문이 온건파 베스탈리스라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전 과거에 강경파 베스탈리스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인페르노와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으며 그들이 소유한 16번째 테라리움을 빼앗음으로써 완전히 척을 졌어요. 더구나 그들의 주요 인물인 파필리온을 제 보좌관으로 부리고 있고요. 여러분들에 대한 정보는 파필리온에게 얻었습니다.”

난 숨길 것 없이 낱낱이 그들에게 고했다.

어차피 다 같은 베스탈리스들이니 숨길 것도 없었다. 난 그들에게 후에 협력을 구할 마음이 있기도 했다.

파필리온이 내게 알려 준 정보에서 미미르를 알고 있다고 한 걸 보니 베스탈리스들의 사회는 생각보다 좁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뒷조사했다는 것보다 차라리 정보 제공자의 이름을 밝혀 신뢰를 얻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나비 자식이….”

그리고 저들이 파필리온의 이름을 알 거란 판단이 맞았고, 그가 얼마나 방정맞게 굴었는지 사방이 그를 나비 자식이라고 부르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우리 아들에겐 무슨 연유로 접근하신 건가요?”

“28번째에 이어 16번째 테라리움까지 소유하고 계시다고요? 목적이 38번째 테라리움인 건가요?”

누굴 애 데리고 수작 부리는 악의 축으로 보는 거야?

“접근이라뇨? 엄밀히 따지자면 절 찾아온 건 미미르였습니다. 38번째 테라리움과 관련된 일로 그쪽에서 제게 물의를 빚어 사과 차원으로 행정 관리원인 미미르가 방문했습니다. 38번째 테라리움의 상태를 파악하다 미미르의 배경에 대해 알게 된 것이고요.”

“엄마….”

“아가, 잠깐 넌 가만히 있어 보렴. 그렇다면 후에 정보를 알게 됐으니 저희 아들을 이용하실 생각인가요?”

“미미르가 집안에서 사랑받는 막내아들이기에 여러분들께서 과하게 반응하시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 이상 제게 도를 넘는 추궁을 하신다면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습니다. 전 말씀드렸다시피 강경파 베스탈리스와 척을 진 상태이므로 온건파 베스탈리스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은 있었으나 미미르를 미끼 삼아 협박하거나 강압하는 식으로 연을 맺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미미르의 테라리움은 저희 테라리움과 번호 연계법으로 엮여 있으니 도움을 주며 자연스럽게 좋은 관계를 맺고 후에 가문을 소개받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엄마!”

갑자기 미미르가 벌떡 일어나 큰 소리를 냈다.

그러자 모두가 그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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