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복지 부서에선 구호 물품 비축이나 휴식처를 제공할 수 있는 공용 건물 관리 외에 어떤 기타 업무를 생각하고 있나요?”
경영 부서도 아닌 복지 부서에서 다이아의 중요성을 토로하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면 다이아를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
“누구나 상시로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일을 테라리움에서 지원해 주는 것입니다. 이건 과수원 직원 채용과는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오늘 행정 관리원님께서 길드원분들과 나누신 이야기로 힌트를 얻었습니다.”
일레이디아는 배달 서비스에 관한 이야기를 내게 꺼냈다.
나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잠자코 있었다.
배달이 어떻게 복지에 도움이 된다는 걸까?
“사실 배달 서비스는 내용보다 그 일이 누구나 특별한 자격 없이 쉽게 상시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서비스는 주요 아이템이 아닌 그저 한 가지 예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28번째 테라리움은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 한해 세금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이주 당시 이 조건을 충족하더라도 후에 어떠한 사정으로 인해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일레이디아는 지적했다.
사고, 병환, 나이, 심리 등 여러 이유로든 하던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사람은 항상 생긴다.
그렇다면 그들에겐 다시 세금을 받을 것인가? 음… 원칙적으로는 맞게 보일 수 있으나 그럴 생각은 없지만….
따로 법으로 지정해 놓은 것이 없었기에 조금 곤란해졌다.
하지만 일레이디아는 그렇게 될 경우 다른 테라리움으로 이주를 해야 하거나 세금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모든 법이 내 무한 다이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단 걸 아예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이 자원봉사를 하는 것과 돈이 무한으로 있는 사람이 게임처럼 일을 벌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기에.
결국 어디선가 발생할 이득과 손해를 자본가 입장에서 그냥 넘길 수 있겠냐는 지적 같았다.
이건 애초에 내가 외부에 무한 다이아가 있다는 것을 밝히지 않는 이상 그 누구에게도 이해 받을 수 없는 사항이었다.
“만약 행정 관리원님께서 후에 조건을 불충족하게 되는 주민분들에 대해 막연히 세금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셨더라도….”
“…….”
‘막연히’라는 단어에 조금 찔렸다.
“이건 박탈감의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개인 혹은 그 개인을 바라보는 타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일레이디아는 배달 서비스를 예로 들어 테라리움의 복지 부서가 운영해야 하는 정책을 설명해 주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테라리움에서 상시 일자리를 제공해 주자는 거였다.
나이 불문, 능력 불문, 누구나 언제든지 지원해서 할 수 있는 간편하고 소소한 일자리.
자립을 도와주는 발판의 마련이었다.
상점들과 제휴를 맺어 상점이 배달 서비스 이용 대금을 정해진 시기마다 테라리움으로 상납하는 대신, 테라리움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점에 대한 홍보와 인력들을 제공해 주고 그 인력들에게 수고비를 지불하는 시스템이었다.
누군가에겐 일자리가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겐 집에서 편히 물건을 받아 볼 수 있는 서비스가 될 수 있었다.
다만 난 이 배달 서비스가 과연 이 세계에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여긴 전화나 인터넷이 없잖아…?
사람들 모두가 벌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집집마다 배달을 원하는 물품과 시간, 장소를 팻말로 걸어 두고, 시간마다 메신저가 순회해서 의뢰를 수락하는 방식이면 될 것 같습니다.”
결국 일차원적으로 사람이 투여되는 거구나. 물론 이것도 일자리 창출의 개념이 되긴 했다.
“이 방법은 후에 연금탑에 조언을 구해 좀 더 체계화를 시키는 것도 좋겠어요.”
나중에 배달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할 때의 보험 문제 등은 이 자리에서 바로 논할 것이 아니라 따로 기획서를 받기로 했다. 테라리움에서 일자리를 제공해 주는 것은 좋다고 본다.
그것이 배달 서비스를 떠나 테라리움 내 환경 미화 등의 여러 간편한 일자리로 파생될 수 있는 것 역시 복지 부서가 결정할 일이었다.
“시도는 나쁘지 않아요. 지원해 줄 테니 열심히 자리 잡아 보도록 해요. 그렇다면 당장 복지 부서가 생각하는 일은 이게 끝인가요?’
내 질문에 일레이디아가 슬쩍 뒤로 물러나고 보나에게 눈짓을 했다.
그녀는 2차 시험장에서 보여 줬던 꽤나 발랄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날 마주하자 조금 떨고 있었다.
그저 합격했다는 기쁨에서 오는 패기였나?
“저는… 집안이 석류금융을 운영하고 있고….”
차분히 기다려 주자 보나는 일레이디아의 안타까운 눈빛을 받으며 긴 자기소개를 위주로 한 서두를 꺼냈다.
“그래서 배운 것을 토대로 복지 부서에서 금융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습… 아니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금융? 복지 부서에서 금융과 관련된 업무까지 맡는다고요? 경영 부서가 아니라?”
“일자리 창출은 솔직히 목마른 식물들에게 방울방울 내리는 이슬비와 같다고 봅니다….”
일레이디아가 어쩐지 주눅이 들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 보나 대신 나서서 말했다.
“긴 시간 동안 비를 내려 주어 갈증을 해소하는 것도 좋지만 당장 죽어 가는 와중에는 크게 한 번 물을 끼얹어 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되겠지요. 그래서 당장 큰 자금 마련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다이아를 빌려주고 상당히 낮은 이자율로 갚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급하게 다이아가 필요한 사람들도 많을 테지만….
“어디까지나 이 금융과 관련된 안건은 복지로 다가가야 하기 때문에 다른 테라리움에서 자본 마련을 위한 토대로 굴리는 일반 은행들과는 조금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사정에 따라 적용되는 단계적 이자율 그리고 그 이자율이 매우 낮다는 것과 보장된 긴 상환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세계의 학자금 대출 같은 거구나.
“그렇다면 금융의 시작 자금은요?”
“이건 월렛이 없는 사람에 한정해, 적금 형식으로 테라리움에 다이아를 맡기도록 장려하고 대출로 발생한 이자를 맡긴 사람들에게 지급해 주는 식으로 할까 합니다.”
월렛이 없는 사람들은 상당히 많다. 월렛을 만드는 비용이 상당하다고 들었던 것도 있지만 만들 수 없는 사정이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는데….
개인이 현물인 다이아를 다량 보유하고 있는 것이 겁난다면 테라리움에 금고처럼 맡긴다. 대신 맡긴 만큼 이자가 발생해서 어찌 보면 돈을 불릴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복지 부서에 자원하는 직원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정하고 왔구나.
그 외 여러 계획들을 들었지만 이미 일자리 창출과 금융 건만으로도 박수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이래서 능력 있는 사람들을 많이 뽑는구나 싶었다.
“당장 구호 물품 마련이나 공동 건물 관리 때문에도 사람이 많이 필요할 텐데 인원은 그걸로 충분하겠어요?”
“마땅히 가고 싶은 부서를 정하지 못한 직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른 부서를 희망하기 전까지 복지 부서로 임시 위임해 주셨으면 합니다.”
할 일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지 제공까지.
복지 부서가 설립된 이후에도 세계수 가지 관리나 기본적으로 내가 과수원에서 경험했던 업무들을 지원하는 직원들도 차례로 면담을 가졌다. 미리 생각해뒀던 홍보나 관광과 관련된 부서도 지원해서 설립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당장 부서를 정하지 못한 사람들을 임시로 복지 부서에 보내 두자 우려했던 것과 달리 하루 만에 부서 발령이 모두 끝이 났다.
과수원은 금방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것을 지켜보고 나니 내가 자리를 비워도 16번째 테라리움 못지않게 잘 굴러가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젠 테라리움 내부 일을 어느 정도 끝냈다는 생각에 홀가분해졌다.
그러다 보니 슬슬 모험 병이 돋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래 한 테라리움에 머물 줄이야….
이제 나가서 불도 때려잡고 그래야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도 찾고 말이야.
당장 급한 불은 껐으니 이제 내 메인스트림을 진행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어느 늦은 밤, 미미르가 비장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찾아와 대뜸 무릎을 꿇었다.
“미미르…?”
“죄송합니다…. 사고 쳤어요….”
대체 어떤 스케일의 사고를 쳤길래?
평소대로라면 울고 불며 덜덜 떨어야 할 미미르가 저런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있을 정도면…. 대체?
갑자기 온몸이 오한으로 떨렸다.
“뭔데? 대체 어떤 종류의 사고길래 그러는 거야? 혹시 다이아를 빚졌다거나?”
“그런 종류가… 아니라… 내일… 이곳에 손님이 방문하실 예정이에요…. 죄송합니다.”
“손님?”
하지만 미미르는 뒤늦게 겁이 밀려오기라도 한 것인지 끅끅 울음을 참으며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전투야? 길드원 소집해?”
“그게… 그게 아니라….”
전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면 일단 한시름 놓이는데.
그런데 미미르의 태도가 묘했다.
내게 자기가 친 사고를 수습해 달라는 도움을 요청한다기보단 통보에 가까웠다.
밤이 너무 늦고 미미르는 도저히 말할 상태가 아니라 일단 돌려보냈다.
무슨 일이 벌어나는지 긴밀히 조사라도 보내고 싶은데 길드원들이 실새삼의 정보를 수소문하러 잠시 테라리움 밖으로 나선 상황이었다.
하다못해 시들링도 놀지 말고 일하라며 이리스가 끌고 나간 터였다.
결국 미미르를 그냥 보내지 말고 멱살 잡고 캐묻기라도 해야 했나 하는 불안감만 안은 채 불편한 잠을 청했다.
“제이 님, 긴밀히 만나고 싶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결국 제대로 잠을 못 자 퀭한 눈으로 집무실을 지키고 있는데, 에이레네가 나를 지목해 꼭 만나야 한다는 손님이 찾아왔다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어디서 왔대요?”
직감적으로 그 사람들이 미미르가 말한 손님들임을 알아차렸다.
“아, 그것보다 미미르 좀 찾아서 데려와요. 이놈이 어제 그 난리를 쳤으면 아침 일찍 내게 달려와 보고라도 해야 될 거 아냐? 그대로 잠적을 타?”
“음, 잠적을 탄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손님들과 제이 님께서 찾고 계시는 분이 함께 계셨습니다. 평범한 관계처럼 보이진 않았습니다.”
“혹시 협박당하고 있었나요?”
“아뇨, 오히려 우호적으로 보였습니다.”
“후…. 일단 방문자 신원부터 파악해 주세요.”
사고를 쳤다며 손님이 방문한다더니 그 손님들이 미미르와 우호적인 관계라….
내 지시에 밖을 나갔다 온 에이레네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그들의 정체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
에이레네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자신이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처럼 주저했다.
“제이 님의…. 차기 남편 되실 분의 가족들이라는… 데요?”
“네?”
남편? 갑자기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