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7화 (277/604)

정말 제안했을 뿐인데 부서를 만들어 주더라.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행정 관리원이 지지해 주더라.

앞서 내 면담을 끝으로 부서명을 얻어 간 직원들을 통해 대기 중인 이들에게 좋은 소문이 흐르고 있다고 이리스가 알려 주었다.

중간에 키르켄이 합류하며 면담이 길어진 탓에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부서 발령에 관한 면담은 잠시 미루고 식사 시간을 가졌다.

어차피 난 오늘 내로 모든 일을 해결할 마음은 없었다.

어쩌면 평생 일하게 될 수도 있는 부서 자리를 당장 하루 만에 정하라고 직원들을 닦달할 만큼 내가 모진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리 한국인 성격이 급하다고 해도 말이지.

직원들은 이미 정해진 부서들을 예시로 삼고 좀 더 결정을 숙고하거나, 부서에서 함께 일할 다른 동료들을 포섭할 시간을 충분히 가져도 됐다.

난 그들이 분위기를 타거나 조급해진 마음으로 대충 아무 일이나 정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점심은 길드원들과 같이할 생각이었다. 미미르는 1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왔다 갔다는 소리를 듣고 갑자기 기가 죽어 여관에 콕 박혀 있어서 자리에 없었다.

18번째 테라리움 역시 번호 연계법에 묶여 있는 곳이었다.

그는 혹여라도 38번째 테라리움의 치부가 더욱 위까지 올라가 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덜 떠는 것 같았다.

하긴 난 키르켄을 편하게 생각하더라도 미미르 같은 사람들에겐 까마득히 위에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번호 앞자리가 38번째보다 두 자리나 위에 있으니까.

이제 정식 보좌관도 정했겠다, 그에 대한 처분을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 식당에 길드원들은 물론 보좌관까지 둘을 대동한 내가 나타나자 주변이 금방 어수선해졌다.

내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긴 해도 혼자 행동할 때완 느낌이 달랐다.

완전 유명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관심을 온전히 즐기기에 난 아직 너무 부끄러웠다.

식사를 하다 말고 직원들이 내게 꾸벅 인사를 해 오자 대기업 그룹 회장님이라도 된 모양새였다.

이미 부서가 정해진 직원들은 벌써 자기들끼리 무리지어 행동하고 있었다.

내게 함께 면담을 요청했던 조원 그대로 한 명도 빠짐없이 있는 걸 보면 따돌림 없이 좋은 단합력을 보이고 있는 것 같아서 흐뭇했다.

과수원 근처의 식당은 다른 식당들보다 내부가 넓었는데, 직원들이 다수 몰려 있다 보니 꼭 사내식당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음부터 식사를 과수원으로 배달시켜야 할까…? 내가 있으면 불편해서 다들 체하는 건 아니겠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식당 안쪽에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배달이요?”

“네, 뭐 여기 음식을 포장해서 심부름처럼 과수원으로 가져다주는 거죠. 물론 심부름값은 따로 들겠지만.”

“그거 참 재밌고 편하겠네요. 여태 음식을 가서 사 먹을 생각만 했지, 내가 있는 곳까지 배달시킨다는 건 생각 못 해 봤네요.”

그런가? 음식 배달이란 개념이 여기선 익숙하지 않은 건가?

배달의 민족의 피가 흐르는 나로선 오히려 이리스의 반응이 생소했다.

“음, 그런 서비스가 있다면 편한 일이죠. 거동이 불편한 데다 집에서 요리를 할 수 없는 사람에겐 꼭 필요한 서비스잖아요?”

“편지나 물건을 배달해 주는 경우는 저희도 인지도가 없는 초반 여행 시절 종종 맡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소규모로 적용되는 배달 의뢰는 상상해 보니 재밌네요. 만약 꼭 이 가게의 요리를 먹고 싶은데 지금처럼 사람이 가득한 바람에 못 먹게 돼서 아쉬울 때도 서비스가 있다면 이용할 수도 있고….”

주문한 음식이 나올 동안 재밌는 이야깃거리를 잡은 마냥 이리스가 계속 물고 늘어지자 제퍼가 호응했다.

“요리 배달이라고 하면 테라리움에서 테라리움으로 이동해야 하는 장거리 임무가 아닌 데다 중간에 탈취하려는 도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불의 위협을 막아 낼 필요도 없으니 전투 능력이 꼭 필요한 임무도 아니잖아요?”

“맞아요, 마차를 섭외할 필요도 없고. 다리 튼튼하고 몸만 튼튼하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둘은 이게 무척 흥미로운가 봐요?”

“그냥 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동했나 본디….”

헤르마가 혀를 차며 이리스와 제퍼를 바라보았다.

“실은 제이 님이 하고 싶은 대로 부서를 세워 준다는 이야기로 과수원이 떠들썩하니 저희도 분위기를 탔나 봐요. 넌지시 저희에게 조언을 요청하는 직원들도 있었고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하게 해 준다는 제안이 어떤 사람들에겐 기회로 다가오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난감하기도 하니까요. 시키는 일은 잘할 자신 있어도 나서서 해 보라는 일은 어려운 사람들이 있잖아요?”

“맞습니다. 솔직히 이리스는 신나서 자기 꿈을 펼쳐 볼 애지만 헤르마나 노토스에게 해 보라고 하면 스트레스 받을걸요.”

“넌 아니란 것처럼 말하는디….”

이리스의 말을 들어 보니 그것도 맞았다.

하다못해 공부도 그랬다. 자기가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행하는 자기 주도적 학습이 맞은 사람이 있고, 학교에서 묶어 놓고 시켜야 공부를 하는 제도적 학습이 맞는 사람도 있었다.

어쩌면 우리 과수원에 지원한 어떤 부류는 면담을 앞두고 극진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수도 있었다.

시키는 일 하려고 왔는데 대뜸 뭐가 하고 싶냐고 묻고 있으니.

“그래서 설마 과수원에 배달 부서 하나 세우려고요?”

“에이, 이건 뭐랄까…. 아이템이 조금 작죠? 그저 이런 것도 있다니까 재밌을 뿐이에요.”

그건 그랬다. 이건 단순히 사업 아이템이나 다름없어서 굳이 맡자면 무역 및 사업 부서가 맡는 것이 어울렸다.

부서 하나를 파기엔 명분이 작았다.

“그건 그렇고… 혹시 제 부탁 좀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부탁이요? 당연하죠.”

“마스터! 의뢰인가요?”

제퍼가 신이 나 반응을 하는 걸 보니 그동안 몸이 찌뿌둥했나 보다.

“음, 요즘 길드 의뢰를 넣지 않아 다들 심심했죠?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드라이어드 신화에 대해 예전에 열심히 공부했다던 이야기가 떠올라서 그러는데…. 혹시 실새삼에 대해서도 알아봐 줄 수 있나요?”

“마스터네 꼬맹이 말씀하시는 거죠? 그러고 보니 오늘 영 상태가 안 좋네요?”

“그러게요. 이때쯤이면 버릇없이 툭 말을 던질 법도 한데.”

그들은 내 품에 곤히 안겨 있는 실새삼을 궁금하단 눈으로 바라보았다.

확실히 식물로 치면 애 상태가 시들시들하긴 하지.

“성장을 앞두고 있어서 이런 걸 수도 있어요. 왜, 아이들이 크면 성장통 같은 게 오잖아요?”

드라이어드도 성장통이 있나 의문이지만 내 드라이어드가 좋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남이 알아서 좋을 건 없었다.

더구나 무슨 이유로 좋지 않은지 제대로 모르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너무 어리다 보니 제게 털어놓는 정보가 많이 없어서요. 잘 키워야 하는데 이렇게 작은 드라이어드를 키워 봤어야 말이죠. 실새삼에 대한 것이라면 신화나 풍문이라든지 가릴 것 없이 뭐든 알아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겨우 한 줄이라도 실새삼이 연관되어 있다면 뭐든.”

“드라이어드에 대한 정보는 드라이어드가 입을 열지 않는 한 주인 되는 자도 알기 힘들다는 사실은 잘 아시죠?”

영혼의 연결로 드라이어드를 데리고 있어도 모체 신화를 계승하지 않는 이상 드라이어드 자신도 모를 수 있었다. 신화를 계승하는 드라이어드는 대개 왕의 그릇을 타고났거나 매우 특별하다고 하니까.

아니면 우리 데이지처럼 신화를 막 만들어 가는 단계일 수도 있고.

그렇지만 필드의 가디언인 실새삼이니 위대한 만큼 정보도 좀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려운 임무일수록 재밌는 법이죠. 제퍼는 어디 멀리 다녀오라는 의뢰를 기대했는지 몰라도 전 지금 의뢰도 꽤 재밌을 것 같아요.”

“아카데미나 연금탑과 연계하는 건 어떨까요? 저희가 단순히 신화를 알아보려고 책을 들추며 공부했던 것보다, 정식 의뢰 삼아 연금이나 학술 쪽에 저명한 사람들과도 연계해 보는 것이 더 질과 양이 좋을 겁니다.”

“음,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않되 너무 요란하게 굴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실새삼 드라이어드를 데리고 있는 것 자체가 내 전력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들은 내 말을 이해했고 의뢰를 충실히 이행해 줄 것을 약속했다.

이리스나 제퍼가 신나게 토론했던 음식 배달과 관련된 이야기는 단순히 식사 자리에서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그런 아이템을 옳다구나 하며 덥석 문 사람이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난 후 직원 면담을 재개했을 때, 레이디… 아니 일레이디아가 면담을 요청하며 그 아이템을 내보였다. 그리고 같이 모인 이들 중엔 놀랍게도 보나가 포함되어 있었다.

2차 시험 막판에 미미르가 카드를 흔들어 스카우트한 림파 패거리의 아이였다.

“저흰 테라리움의 복지와 관련된 부서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일레이디아는 구호 활동을 하는 단체 출신이라고 했던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 온 사람이니 그런 부서로의 위임을 원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지금 당장은 28번째 테라리움에 굶어 죽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지만 미래에 대비해야 합니다. 사고는 예고 없이 들이닥치니 대비가 없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고통을 받아야 할 겁니다.”

그의 말에 디케와 에이레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일레이디아가 말하는 복지 부서의 필요성에 대해 크게 수긍하고 있었다.

28번째 테라리움은 내 무한 다이아가 버티고 있는 한, 일레이디아가 말하는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모든 것을 일차원적으로 내 무한 다이아에 연결해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엘더와 배 위에서 해일을 막기 위해 펼쳤던, 모든 다이아를 제로로 만드는 스케일의 그래프트가 떠올랐다.

그건 당장 세계수로 인해 내 목숨이 오락가락했지만 이젠 내 무한 다이아에 묶여 있는 운명이 한둘이 아니게 됐다.

테라리움의 모든 행정은 물론 복지가 내 무한 다이아에서 나오고 있었다.

주민들이 세금 없이 테라리움에서 살아가고, 직원들이 높은 임금을 받으며 일할 수 있는 이유 등 그 모든 것은 내게 끝도 없이 생산되는 다이아가 있기 때문이다.

“복지는 단순히 어려운 사람이 없도록 돕는다는 측면에서 다가갈 수도 있지만 저흰 좀 더 다방면으로 관리하고 싶습니다. 28번째 테라리움은 제이 님의 능력 덕에 세금이 없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물 교환만으로도 풍족한 삶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사람들에게 당장 물리적 화폐인 다이아가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네, 그건 너무 일차원적인 단면이죠.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결국 다이아가 필요하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인력을 제공하고 물물 교환하는 수준으로도 세상이 유지됐다면 그들이 왜 약속된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겠는가. 더구나 28번째 테라리움은 폐쇄된 환경이 아니었다.

외부에서도 끊임없이 사람과 업체가 들어오며 교류를 하는 공간이었다.

만약 누군가 사업을 위해 건물을 짓고 싶다 했을 때, 지금은 테라리움이 세워 주며 지원을 하고 있지만 그건 단순히 초반 성장을 위해서였다. 아무것도 없는 빈 땅에 자립할 수 있도록 내가 해 주는 지원.

하지만 당장 먹고살 어려움을 해소하고 숨이 트인 후 더 크게 되고 싶다고 욕심이 생겼을 때, 그때도 테라리움에 손을 벌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단순히 28번째 테라리움 사람들을 데리고 건물 타이쿤 게임을 하는 건 아니니까.

또한 모든 이들이 가업을 잇지는 않을 것이고 가족은 커지고 자식들은 분가할 테고. 테라리움은 빈 땅이던 시절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북적거리겠지. 사회는 점차 복잡해져 갈 것이다.

건물을 지을 인력과 재료, 이 모든 것을 등가 교환할 수 있는 개인의 인력과 물품은 없다.

또한 단순히 28번째 테라리움 안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간 기업체를 운영하고 싶어질 테고 다른 테라리움과의 거래를 바랄 수도 있었다.

결국 다이아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일레이디아는 신처럼 내가 다 관여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의 자립을 목적으로 복지 부서를 설립해야 될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