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6화 (276/604)

솔직히 부서 발령 첫날부터 사업 기획서를 내놓으란 건 심한 것 같지만, 대강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궁금했다.

특산품이란 아이디어가 그냥 나오진 않았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전문가들의 눈엔 28번째 테라리움에선 무엇이 생산될 수 있다고 보였을까?

분명 28번째 테라리움의 경매가 진행됐을 당시, 우리 테라리움은 농업에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위에 늪이 있고 비옥한 토지가 없다고 했던가?

물론 그땐 경매가를 낮추고 경쟁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마음에 걸리긴 한다.

늪은 바곳이 점령하던 시절의 죽음의 늪을 의식한 것이 분명했다.

확실히 그때 당시의 늪이 계속 존재하고 있다면 인접 지역에서 뭘 키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뭘 키우든 죄다 죽거나 운 좋게 결실을 맺어도 도저히 사람이 먹을 수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지역은 이미 나와 엘더의 합작으로 완전히 정화를 했다. 이제 늪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

농업이 불가능하다면 화훼 쪽으로도 눈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늪이 있던 곳의 이름을 개구리 늪지대… 란 조금 부끄러운 명칭으로 짓긴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저희들은 미리 테라리움 주변을 시찰해 보았습니다.”

오늘 갑자기 정하게 될 줄은 몰랐는지 답하는 세페스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부족해 보였다.

“일단 세계수의 축복으로 인해 뭘 키우든 잘 자랄 수 있는 10번대 테라리움의 지형들과 달리 이곳은 상대적으로 선택 사항이 줄어든다는 것을 염두해 두셔야 합니다.”

농작물마저도 세계수의 축복의 영향을 받는다라….

“토지는 걱정했던 것보단 양호합니다.”

세페스의 평가 근거는 의외인 곳에서 비롯되었다.

28번째 테라리움은 불로 인해 화재 피해를 아주 크게 받은 곳이었다.

그로 인해 풀숲에 잠복하고 있을 해충과 잡초는 죄다 타 죽은 데다 잿더미가 천연 비료가 됐다는 것이다.

마치 옛날 사람들이 수확이 끝나면 겨울의 논밭에 불을 놓는 이유처럼.

타 버린 땅은 완전히 끝을 맞이한 것이 아니다. 자연은 다시 기회를 잡고 순환한다.

“하지만 토양이 질기고 돌과 바위가 많아 억세고 강한 작물들을 선정해야 하는데….”

세페스는 28번째 테라리움의 특산품 개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라고 했다.

첫 번째로 다른 테라리움과 차별화되는 장점을 가진 품종 선정에 들어가는 시간.

과일을 예로 들면, 이미 수없이 많은 테라리움이 달고 맛있는 과일 대부분을 개발해 내 시장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고 했다.

단순히 당도가 높고 맛있는 정도로는 우리 같은 신생들이 자리 잡은 기성들의 파이를 뺏어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랜 시간 시장에서 과일의 품질을 증명해 냈으니까.

더구나 테라리움 외에도 수많은 기업체들이 시장에서 버티고 있었다.

황금 호박 상회의 경우도 상회의 대표 작물이 호박인 만큼, 호박에 한해서 그들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품종을 보유하고 유통 중이었다.

저번에 키르켄이 내게 설명해 주었지.

기업명을 작물 이름으로 할 경우 사업이 풍요롭게 번성한다는 상인들 사이의 속설 때문에 다들 작물 이름을 붙이고 마스코트로 쓴다고.

호박은 물론 당근, 배추 등 이미 유명한 작물들은 대부분의 기업들이 선점했을 테니 품종 선정이 여간 까다로울 것이다. 더구나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를 뽑아내기 위해 강제로 군락지까지 만들어 관리한다고 하니 도전해 볼 마음도 들지 않는다.

두 번째는 우수한 품종을 얻기 위한 인고의 시간.

품종을 가까스로 선정했다 하더라도 대량 생산 및 상품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한 품종이 필요했다.

“어쨌든 시간이 문제라는 거죠….”

하지만 나란 고과금 게이머, 시간을 다이아로 살 수 있다면 살 인간이었다.

그런데 세페스를 비롯한 직원들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다.

이건 내가 다이아를 아무리 들이부어도 쉽사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하긴 작물이 자라는 시간을 어떻게 다이아로 단축시키냔 말이다.

여긴 농장 시뮬레이션 게임 안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여긴 드라이어드가 활동하는 게임이잖아?

“혹시 재배 관련 사업에 드라이어드의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나요?”

그들이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자 머쓱해진 기분이었다.

“우수한 품종 개발에 잘 성장한 드라이어드의 힘을 빌리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어느 곳에선 일부러 포레스트의 왕급 되는 드라이어드를 직접 초청하거나 드루이드를 섭외하기도 합니다.”

드루이드가 활동하는 분야는 참으로 무궁무진했다.

확실히… 식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 드루이드가 농부로 활동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긴 하지.

“그렇다면 그런 드라이어드가 우리 28번째 테라리움에도 있다면 시간을 많이 앞당길 수 있겠네요?”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흔한 종의 경우는 이미 군락지 단위로 재배에 투입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흔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연 발생할 확률도 높으니까요.”

드라이어드가 도움이 된다. 그 말에 난 오랫동안 고민했다.

드라이어드 이야기를 꺼낸 건 품종 이야기를 할 때 문득 내가 살던 세계의 교잡을 통한 품종 개량 작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밀감과 오렌지가 결합해 당도를 높인 천혜향이나 피망과 풋고추가 결합한 오이고추, 고구마와 호박이 결합한 호박고구마 등이 인기도 많고 잘 팔렸지.

사실 내가 살던 세계에선 흔했지만 이곳은 잘 모르겠다.

자연적으로 태어난 개량종이나 돌연변이들은 세계수의 안배라 여겨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만, 연금탑에서 인공적으로 유전자를 결합해 태어난 인공 개량종들은 인식이 매우 나빴다. 자연에 사람이 관여한 것이 이 세계의 신인 세계수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보니까.

“음… 만약 토마토에서 대추의 단맛이 느껴진다거나 고구마에서 호박의 단맛이 느껴지는… 그런 작물들은 어떤가요?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나요?”

이 세계에도 농업 전문가들의 손에서 태어난 품종 개량종들이 존재할까?

“혹시 세계수에서 새로 태어난 드라이어드들의 모체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만약 자연적으로 그런 특수한 모체가 세계 어딘가에서 발생했고 운 좋게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가 됐다면… 그 드라이어드를 섭외해 올 수만 있다면 이미 과열된 시장에서 크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테라리움 특산품 중 가장 유명하고 독보적인 특산품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없구나. 호박고구마 드라이어드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구나. 내심 기대했는데.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인공적으로 유전자를 결합한 개량종 외에 사람 손으로 교잡을 종용해 태어난, 돌연변이나 다름없는 개량종을 만드는 일도 불법적인 일로 치부되는 걸까? 어쨌거나 자연의 힘을 빌리긴 했어도 결국은 사람 손을 탔기 때문에 안 되려나?

내 위치에서 이러한 일들을 제안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28번째 테라리움에 즐비한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을 이용해서 모험을 해 볼까?

“그렇군요. 전 사실 다이아도 많지만 이 다이아로 세상에서 구하기 힘든 희귀한 것들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습니다. 28번째 테라리움 안에 유독 다른 테라리움들에 비해 주인 없는 드라이어드가 많이 돌아다닌다고 느끼신 적은 없나요?”

“음… 그걸 특이하게 생각하긴 했습니다.”

“그 드라이어드들이 바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계 어딘가에서 발생해 운 좋게 자연 발생한 개량종 드라이어드입니다. 수가 너무 많다 보니 전부 영혼의 연결을 맺을 순 없고 가드닝 스킬을 이용해 테라리움에 묶어 둔 것이지요.”

“꼭… 테라리움이 거대한 진열장처럼 들리네요.”

“물론 전 드라이어드들을 물건처럼 생각하진 않아요. 그들을 드라이어드로 잘 대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 연이 닿는 드루이드가 있다면 기꺼이 내줄 생각도 하고 있고요. 드라이어드들은 본래 불을 퇴치하고 세계수를 지키는 사명이 있으니 테라리움에만 가둬 둘 순 없는 노릇이죠.”

난 데이지2가 손수 만들어 둔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 리스트를 꺼냈다.

데이지2가 28번째 테라리움에 드라이어드들이 비처럼 쏟아질 때 전부 리스트화를 해뒀다고 했지.

그 꼼꼼한 성격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역시 걘 전투보다 사무파야.

“여기 28번째 테라리움은 물론 근방에 자리를 튼 개량종 드라이어드에 대한 리스트입니다. 다만 메인이 되는 식물 이름으로 적혀 있어요. 여기 엉겅퀴 드라이어드를 예로 들면 그 드라이어드의 주된 모체는 엉겅퀴이지만 다른 어떠한 식물이 ‘자연적으로’ 섞여 들어갔을 수도 있어요. 리스트에서 품종으로 삼을 만한 드라이어드를 고른다면 제가 추가 정보를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여기 있는 드라이어드들은 연금탑에서 만들어 낸 인공 개량 품종 중에서도 초엘리트들이었다.

번개를 견뎌 내 1차적으로 선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파필리온 직속 전투 부대로 활동했던 드라이어드들이었으니까.

바곳의 경우도 각시투구꽃을 메인으로 백부자와 갈풀의 장점만 골라 섞여 있는 인공 개량종이었다.

덕분에 갈풀의 질긴 생명력을 기반으로 생명력이 떨어지면 오히려 공격이 강해지는 필살기도 얻었다.

만약 이 중 바곳처럼 갈풀과 같은 종이 섞인 드라이어드가 있다면,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질긴 토양을 이겨 내고 피어날 만큼 강한 생명력을 가진 작물을 재배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은 내가 사기만 잘 치면… 치트 키나 다름없었다.

최고의 두뇌파 인력들의 지식이 집대성한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은 따지고 보면 우리 세계에서 우수한 연구원들이 오랜 연구 끝에 만들어 낸 작품인 것이다.

난 이미 만들어진 결과물을 어부지리로 획득한 행운아고.

세페스를 비롯한 직원들은 내가 건넨 드라이어드 리스트를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꼭 작물이 아니어도 될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장미 향이 나는 백합이라든가…. 그런 꽃이 있다면 화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당연하죠! 이쪽에서 꽃말을 재해석해 상품화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연인들의 기념일에 필수로 오가는 선물이 될 거예요.”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이젠 무를 수도 없었다.

인공 개량에 대한 비밀은 아직까지 길드원들만 알고 있는 것이 나을 테니까.

“이건 기업 비밀이에요. 아시죠? 다른 테라리움에 흘러가면 안 돼요.”

“철저하게 비밀 엄수하겠습니다. 이 리스트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가치가 있어요.”

확고한 직원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비밀이 새어 나가는 것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 보좌관들을 예산 책정 및 지원 등의 이유로 부서에 자주 방문하도록 해야겠다.

“그럼 오늘은 이 리스트를 살펴보는 걸로 무역 및 사업 부서의 일을 시작하도록 하죠. 이만 가 보셔도 좋아요.”

첫날부터 빡세게 굴리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들은 무척이나 의욕적이었다.

그들이 모두 나가고 난 후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두근거려서 혼났다.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의 또 다른 쓸모를 위한 모험… 잘 결정한 거겠지?

그런데 앞서 내가 시간은 다이아로 살 수 없다고 했던가?

아니 따지고 보면 결국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을 데리고 있는 것도 다 내 다이아가 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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