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곳의 숨겨진 정보가 열렸던 시점은 그에게 합성된 다른 식물의 정보가 밝혀지고, 동종의 모든 각시투구꽃 개량종들을 없앤 후 비로소 오리지널이 되었을 때였다.
이렇게 조건만 놓고 본다면 상당히 난이도가 높았다.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을 공략하던 때를 떠올리니 한 번 더 도전하라고 하면 고개가 절로 저어질 정도였다.
만약 정보 해금 조건을 내가 미리 알고 있던 상태였다면… 앞길이 막막했겠지.
그리고 이번엔 실새삼에게 걸린 미확인 정보가 둘….
얜 대체 뭘 해야 정보가 해금될까?
간단히 아침 운동을 끝낸 후 업무를 보기 위해 과수원으로 향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인지 늘 운동하던 자리에 부지런한 로웰라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었다.
정적에 휩싸였던 테라리움의 거리가 내가 운동을 끝낸 후 날이 완전히 밝아지니, 하나둘 사람들이 나와 개장 준비를 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오늘은 어제 뽑은 직원들을 각각 알맞은 부서에 배치하고 정식으로 그들의 출근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실새삼은 내 무릎 위에 고양이처럼 얌전히 앉아 잠든 것처럼 고요하게 있었다.
***
“어라? 마스터, 눈이 다시 바뀌었네요?”
이로써 벌써 세 번째, 일찍 길드 룸을 들른 로웰라와 이리스를 이어 제퍼까지 내 눈이 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냥 금색이 너무 튀는 것 같아서 바꿨어요.”
바뀐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말해서 길드원들을 걱정시키는 것보다 자의로 했다고 둘러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눈이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내게 페널티가 생긴 것은 아니니까.
“오, 연금술을 이용한 건가요? 신기하네. 그거 저도 쓸 수 있나요? 이왕이면 저도 좀 색다른 눈을 해 보고 싶은데.”
“한 3천 다이아쯤 들 건데 소개해 드려요?”
“부모님이 주신 눈을 소중히 여겨야죠.”
제퍼는 후다닥 길드 룸을 나가 한창 꾸며지고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정식 직원들도 뽑았으니 언제까지 길드 룸을 집무실로 사용할 수 없었다.
길드 룸은 온전히 길드원들을 위한 공간이니, 일꾼들과 데이지2를 시켜 빈방 하나를 정식 집무실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준비가 다 됐습니다.”
“직원들이 출근할 시간에 맞춰 끝나 다행이네요.”
자리를 옮기니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방향에 길드 룸에 놓인 것보다 훨씬 크고 넓은 집무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엔 보좌관들이 업무를 볼 수 있는 자리가, 왼쪽엔 방문 손님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오, 명패가 생겼네?”
키르켄의 집무실에서 봤던 것처럼 반질거리는 검은색 돌에 ‘행정 관리원 제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명패가 집무 책상에 놓여 있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물론 집무실에 있는 모든 가구들이 한눈에 봐도 다이아를 많이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고급스러워 보였다.
촉감부터 다른 푹신한 의자에 앉으니 마치 내가 대통령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38번째 테라리움의 방문객들을 선례 삼아 작정하고 집무실을 꾸며 놨구나.
행정 관리원 정도 되는 자리면 남들에게 보여지는 이미지를 얼마나 신경 써야 하는지 그때 깨달았다.
“1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에 납품하는 최상급 품질의 가구들을 저희 황금 호박 상회에서 선점했습니다. 이젠 우선적으로 28번째 테라리움으로 들여올 예정입니다.”
“다이아 꽤나 썼겠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네요.”
“저희 황금 호박 상회는 항상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황금 호박 상회는 우리 테라리움에 분점을 오픈한 이후로 착실히 내 다이아를 소모하고 있었다.
서로 사이가 나빠서 협력의 용도로 구축해 놓은 세 업체를 위한 계약은, 테라리움이 제대로 자리를 잡자 유명무실해졌다.
물론 밖에 나가선 서로 싸울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 테라리움 안에선 황금 호박 상회, 주얼리 콘, 그레이트 빈 연합이 서로 사이좋게 테라리움 발전을 위해 협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이좋게 내 다이아를 열심히 뽑아 먹고 있기도 했다.
그들이 내미는 계산서를 볼 때마다 아주 흐뭇해질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내 다이아에 빨대 꽂은 세계수의 발끝 정도는 따라간다고 해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제이 님, 슬슬 직원들이 출근하고 있습니다. 한 분씩 만나 보실 건가요?”
일찍 출근한 보좌관 자매들이 서류를 한 뭉텅이씩 안은 채 내게 말했다.
얼핏 서류를 보니 셀럽 킬링을 한 바소르에 대한 복수는 착실하게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부서가 유동적으로 정해질 거란 사실은 다들 전해 들었죠?”
“네, 28번째 테라리움에선 직원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해 줄 거란 사실을 직원 숙소와 과수원 입구에 안내문을 붙여 전해 두었습니다. 다들 인지했을 거예요.”
난 황금 호박 상회의 매니저에게 질문했다.
“직원 휴게실도 준비가 끝났나요?”
“네, 과수원의 모든 직원들이 쉬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자리를 준비했으며 음료와 다과들도 배치해 놓았습니다.”
“훌륭하네요. 휴게실의 군것질거리들은 모쪼록 떨어지는 일 없도록 신경 써 주세요. 이제 나가 보셔도 돼요.”
“네, 과수원 물품 담당 직원이 매일 체크할 예정입니다. 그럼 이만.”
매니저가 떠난 후 다시 디케에게 말했다.
“일단 출근하시는 분들은 모두 휴게실에서 대기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한 명씩 면담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부서를 희망하는 직원들은 조를 이루게 한 후 조별 면담을 진행할게요.”
“알겠습니다. 직원들에게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준비가 된 직원들은 언제든지 절 찾아와도 좋다고도 전해 주세요.”
“네, 키르켄 님은 언제 모셔올까요?”
“이번에 부서를 정하며 무역과 사업 관련 일을 배제할 순 없으니 지금 모셔오면 좋을 듯하네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좌관들이 직원들에게 말을 전달하러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들이 하나둘 집무실에 방문했다.
“전 과수원의 경영 부서를 목표로 관련 학원을 다녀 모든 과정을 이수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경영 부서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산하엽처럼 투명하게 테라리움의 재산을 관리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온 부류는 애초에 입사 목표가 확고한 자들이었다.
오르가 2차 시험장에서 캐치해 낸 대로 회계 학원을 다녔다는 직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영을 관리할 부서가 있는 건 중요하죠. 이건 지원자가 없더라도 반드시 설립되어야 하는 부서였는데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의 이력서는 미리 확인했고 능력도 모자람 없이 훌륭하단 건 알고 있습니다.”
내 칭찬에 다들 뿌듯한 얼굴이 되었다.
“좋아요, 그럼 모두 경영 부서로 배정하겠습니다. 에이레네, 되도록이면 집무실과 가까운 곳이 좋을 것 같은데요.”
“네, 집무실 바로 옆 방을 경영 부서실로 배정하겠습니다.”
“오늘부터 배정된 곳에서 일하시면 됩니다. 제 레드 데이지 드라이어드가 그동안 관련 업무를 맡고 있었으니 인계받으시면 됩니다. 앞으로 업체들의 계산서는 그쪽으로 발행하도록 할게요. 아, 한 가지 주의하실 것이 있다면 28번째 테라리움은 절대 다이아가 아쉬운 곳이 아니라는 거예요. 예산 신청이나 지원 등에 너무 박하게 굴지 않아도 돼요. 잘못 쓰이거나 낭비되는 일들엔 주의해야 하지만.”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테라리움들에 비해 일이 편할 것 같네요.”
다음은 벤에플을 선두로 한 조였다. 그녀는 들어올 때부터 싱글싱글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어라? 눈이 바뀌셨네요.”
“그냥 기분 전환이에요. 그나저나 마술사들을 모아 거대한 쇼를 만드는 것이 꿈이셨다고 했죠.”
“네, 하지만 저 혼자 마술사를 위한 부서를 만들기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들을 모았습니다.”
하긴 모인 사람들이 모두 마술 부서 같은 것을 만들 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저흰 공연과 예술, 창조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섭외 및 지원하고 육성하며 이를 관리하는 부서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28번째 테라리움을 2번째 테라리움에 못지않은 문화 테라리움으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그거 좋네요. 에이레네.”
“2층 201호실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곳을 예술 부서실로 할게요. 28번째 테라리움은 그림, 글, 음악, 공연 등 모든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들의 이주에 대해서도 세금을 받지 않고 있어요. 이곳을 예술적인 테라리움으로 꾸미는 것에 저 역시 지원을 아끼지 않을 예정이니 열심히 해 주세요. 아트 홀이나 공연장은 다른 테라리움들에 비할 바 없이 크고 화려하게 짓고 싶은데 이름뿐인 건물로 남게 둬선 안 되겠죠?”
“사용 예약일이 내년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바쁘게 굴려보겠습니다.”
그들에겐 미리 작성해두었던 관련 조항이 담긴 서류를 전달해 준 후 부서 위임을 끝냈다.
다음은 58번째 테라리움에서 목장을 운영하다 온 세페스가 선두로 들어왔다.
그녀가 포함됐던 조가 2차 시험을 1등으로 합격했었지?
“전 목장 운영 경력을 활용해 28번째 테라리움의 특산품 사업과 관련된 부서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역시 비슷한 경력을 가지신 분들입니다.”
똑똑.
그때 집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 님, 키르켄 님이십니다.”
“아, 마침 잘됐어요. 함께 논의해야 할 사항이거든요.”
사업 및 무역 부서 설립을 앞둔 와중에 타이밍 좋게 키르켄이 도착했다.
“이분은 1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신 키르켄 님이세요.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은 앞으로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사업 및 무역 부서 일을 맡으실 분들입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왔군요.”
이번 부서에 대해선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기에 손님용 테이블에 모두 몰려 앉았다.
“전 28번째 테라리움 이외에도 16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기도 합니다.”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굳이 발설하고 있지 않던 사실을 말하니 키르켄을 제외한 모두가 놀란 얼굴이 됐다.
“16번째 테라리움에선 10번대 테라리움들과 공동 사업을 진행할 예정인데 여기에 28번째 테라리움도 추가시킬 거예요. 하지만 28번째 테라리움이 독보적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것도 염두해두고 있습니다.”
키르켄은 10번대 테라리움들을 잇는 일직선 경로상에 있는 거대한 평야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이 평야를 확장시키고 개간해 테라리움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며 불을 내쫓고 면적 대비 수확량 가치가 높은 농작물을 재배할 예정이라고 했다.
“불로 인해 식량값이 갈수록 폭등하고 있지요. 건물을 세울 수 없어 놀고 있는 땅을 이용해 농사에 뛰어든 뒤 번대 테라리움들이, 날이 갈수록 불의 영향으로 인해 그 농작지가 축소되어 곤욕을 겪고 있습니다. 이젠 농작지를 관리하는 사람들을 부릴 인건비보다 불을 퇴치할 사람들을 쓰는 인건비가 더욱 커지고 있고요. 앞으로 식량 값은 더욱 솟아오를지언정 낮아질 일은 없을 겁니다.”
키르켄은 밀, 옥수수 등의 농작물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난 문득 미국의 거대한 옥수수 농장을 떠올렸다. 한국 땅덩어리보다 면적이 넓을 정도로 워낙 커서 옥수수 농장 안에서 조난당하는 사람들도 생긴다고 했었지.
“그럼 10번대 테라리움 라인엔 노란 농작지 라인이 그어지겠네요?”
공동 사업 규모에 놀란 세페스가 말했다.
“지금까진 10번대 테라리움들이 각자 따로 진행하기엔 나눠 관리하는 평야의 크기가 애매하고, 비용 경쟁 등으로 사이가 나빠질 것을 우려해 거대한 농작지를 운영하는 일만큼은 서로 보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식량은 수입해 오는 편이 여러모로 나았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 공동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된 계기, 그건 나였다.
“사업 실패로 인한 페널티를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다이아가 흘러나오는 투자자가 여기 있네요.”
“네, 16번째 테라리움 자체는 농작지 공동 관리 영역이지만 제이 님이 계셔야 시작할 수 있죠. 수확 후 상품화가 진행된다면 투자금을 모두 회수하고도 남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