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1화 (271/604)

아직까지 다른 드라이어드를 불러와 개입시켜야 할 만큼 위험한 상황은 오지 않았다.

물론 데이지2가 느끼기엔 다르겠지만.

그는 현실을 부정하던 것을 멈추고 어떻게든 제대로 된 전투를 해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반면 마거리트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혼란스러워하며 자신감을 잃어 갔다.

마냥 명랑하기만 했던 그녀가 안절부절못한 채 능력 사용을 주저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난 그 모든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다른 이들의 눈엔 매우 약한 몬스터를 상태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의아할 수는 있으나, 이를 상대하며 내 드라이어드들은 착실히 내면의 성장을 기하고 있었다.

민들레 아이들은 서로 아웅다웅 싸우던 것을 멈추고 스스로 힘을 합하기 시작했다.

서로 자신이 잘났다며 싸우기엔 하나의 힘으론 도저히 효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둘이 싸우면 싸울수록 데이지2는 힘들어했다.

지금은 아이들의 미세한 도움만으로는 커버가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마거리트는 연신 데이지2가 최고의 공격을 할 수 있을 거란 예언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예언 실패는 데이지2의 팔다리를 묶었다. 레드 데이지는 빠른 움직임을 통한 변칙적인 공격이 특기인 드라이어드였다. 하지만 예언 실패는 치명적이게도 드라이어드의 수족에 무거운 추라도 달아 놓은 것처럼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다.

데이지2가 예언 실패의 페널티를 안고도 이를 악물고 기지를 발휘해 천천히 불을 무찔러 나갈 때였다.

“제대로 된 예언을 하고 싶어. 나도 팀에 도움이 되고 싶어.”

이제까진 그녀의 개입이 이리도 직관적으로 나타난 적이 없었다. 마거리트는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양날의 검 같은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마거리트에게 변화가 생겼다.

그간의 경험과 양분 열매가 다음 단계로의 진화의 지척까지 끌어 올린 것인지, 드디어 그녀에게서 성장의 낌새가 보였다.

마거리트의 주위를 눈부신 하얀 빛이 감싸며 작은 꽃잎이 나선형으로 회오리쳤다.

좋은 향기가 은은하게 주위에 퍼져 나갔다.

어느새 마거리트의 장비는 전보다 화려해지고 고급스러운 기품까지 느껴졌다.

마거리트의 노란 두 눈엔 결의가 담기고 한층 진중해졌다.

그녀의 무기인 하얀 하드커버의 책에도 변화가 생겼다.

금빛 문양이 정교해지고 양옆으로 날개처럼 펼쳐진 부속품이 생겼다.

또한 마거리트의 주위로 위성처럼 빙글빙글 도는 꽃 두 송이가 생겨났다.

“그건 뭐야?”

마거리트에게 새 능력이 개화한 걸까?

내 질문에 마거리트는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꽃을 툭 치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왜 이런 게 내 주위를 도는 거지?”

단순히 예쁘라고 도는 장식인 건 아닐 텐데.

“내 진리, 나 좀 더 강해진 것 같아.”

“그래그래, 기특해라. 팀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네 꽃을 만개하게 만들었구나.”

다만 그녀가 한층 성장해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얼굴의 검은 문양은 마음에 걸렸다.

설마 마거리트의 평생을 낙인처럼 따라다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마거리트는 제 하얀 볼에 자리 잡은 검은 문양 따윈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마거리트가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데이지2를 향해 예언의 힘을 사용할 때였다.

그녀의 주위를 맴돌던 꽃 한 송이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그러자 연이은 실패를 반복하며 검은 재 가루로 화했던 그녀의 능력이 제대로 작용한 것이 보였다.

이전까지 데이지2의 주위를 감돌던 불길한 기운이 모두 사라지고 마거리트의 하얀 꽃잎이 햇살처럼 따스한 기운을 내뿜으며 빙글빙글 회전했다.

그러자 전투에 애먹던 데이지2가 단숨에 농구공만 한 크기의 불을 꺼뜨릴 수 있게 되었다.

“오! 제이 님, 보셨어요? 한 방에 해치웠어요! 저도 이제 어엿한 드라이어드라고요!”

데이지2는 방방 뛰며 신이 나서 내게 소리쳤지만, 그가 자신 있게 던진 다음 타격은 불을 반으로 가르는 데에 그쳤다. 누가 봐도 마거리트의 예언이 적중한 덕에 치명타를 터뜨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예언이 적중했어!”

신이 나 방방 뛰는 것은 마거리트도 마찬가지였다.

난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이제 한 송이만 남은 마거리트 꽃을 바라보았다.

“마거리트, 민들레 아이들에게도 능력을 사용해 볼래? 데이지가 단숨에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줘 봐.”

“응! 맡겨만 줘!”

민들레 아이들이 보다 나은 회복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거란 예언이 마거리트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러자 아이들의 고사리손에서 발휘된 힘이 단델리온에게 버금갈 만큼 성스럽게 느껴졌다.

진하게 응축된 민들레꽃의 향기가 코끝을 건드렸다.

솜털 같은 민들레 꽃씨가 뭉쳐 데이지2에게 닿자 타서 검게 변한 바크가 회복되는 것이 보였다.

평소와는 다른 힘을 사용하게 된 민들레 아이들은 놀란 얼굴로 자신들의 손과 스태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역시 마거리트가 가진 힘의 잠재력은 너무 대단했다.

그리고 내가 예상했던 대로 그녀를 감돌던 한 송이의 마거리트 꽃도 바스락 소리를 내며 사라진 후였다.

“또 저희들에게 힘을 사용해 주세요!”

“와, 멋지다! 나 방금 온몸에 엄청난 기운이 감돌았어!”

민들레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마거리트에게 엉겨 붙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서 쏟아지는 존경에 황홀한 표정으로 제 책을 바라보았다.

연이어 두 번이나 스킬을 성공했다.

스킬이 적재적소에 사용되자 전투의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

그녀의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자 드라이어드들이 평소보다 훨씬 대단한 능력을 사용해 팀을 이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나 대단하지?”

“우리가 마치 왕이 된 것처럼 느껴졌어요!”

“엄청 멋진 드라이어드잖아? 또 해 주세요!”

잦은 실패로 바닥까지 떨어진 마거리트의 자존감을 민들레 아이들이 열심히 끌어올려 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시 시전한 마거리트의 예언 스킬은 실패했다.

마거리트와 민들레 아이들은 떠다니는 재 가루에 당황한 얼굴을 했다.

이것 역시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아마도 마거리트가 성장 후 그녀의 주위를 맴돌던 두 송이의 꽃 이펙트, 그건 마거리트의 스킬 성공률을 보장해 주는 보조 패시브 능력인 듯했다.

마거리트는 아무래도 성장한 자신이 전과 다르게 백발백중할 거라 기대했나 본데, 두 번의 기회를 다 날렸으니 본래의 성공률로 보정되는 것을 모르는 눈치인 듯했다.

“그만하면 됐어. 마거리트는 충분히 잘해 줬어.”

남은 불은 주위에서 구경에 한창이던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 해치우도록 시켰다.

“분명 두 번이나 성공해서 이번에도 성공할 줄 알고…. 이젠 나도 도움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거리트는 다시 침울해졌다. 난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곤 당장이라도 아늑한 테라리움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데이지2를 보내 주었다.

“넌 성장한 게 맞아. 네 주위를 떠다니던 꽃 두 송이 기억나지? 그게 아마 너의 예언 적중률을 상승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두 송이니까 두 번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두 송이가 다시 생겨나는 조건은 모르겠지만, 매번 실패만 하던 능력을 보완해 줄 수 있으니 이만하면 잘해 준 거지.”

성장 후 반드시 두 번은 성공할 수 있게 된 마거리트의 예언 능력과 엘더의 행운 버프를 가지고 논다면 꽤 재밌는 전략이 나올 것 같은데? 벌써부터 이곳저곳 이용해 먹을 방법을 생각하니 머릿속이 활기로 가득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알던 마거리트와 많이 다른데.”

하루 내내 훈련이란 명목으로 어울리느라 고생한 드라이어들에게 열심히 칭찬해 주고 있는데, 불쑥 실새삼이 의문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다른데?”

“수없이 많은 꽃들에 기생을 해 본 기억이 있으니 마거리트 역시 한 번은 거쳐 가 봤을 텐데.”

마거리트는 칭찬 대신 포상의 명목으로 내 팔을 붙들고 열심히 볼을 비벼 대고 있었다.

“나 잘했지? 잘한 거야? 잘 자랐지? 나도 자랑스러운 내 진리의 예쁜 꽃이 맞지?”

그 모습이 너무나 애정을 갈구하는 고양이처럼 보여서 나도 그녀가 만족할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반드시 들어맞는 예언이라…. 내 드루이드는 이 능력이 갖는 위험에 대해 느껴지는 것이 없나 봐?”

“알아듣게 설명해 줄래?”

“세계수조차도 자신이 불에 위협받을 거란 앞날을 몰랐다. 그런데 한낱 꽃 따위가 자신이 바라는 대로 반드시 미래를 바꿔 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니. 예언은 실패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건 예언자가 본 다른 미래야. 저 하얀 꽃이 자꾸 실패를 반복한다고? 아니 그건 그 꽃이 개입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대부분의 미래가 그러했음을 나타내는 거야. 내 드루이드는 저 하얀 꽃의 능력을 진중하게 고찰해 봐야 한다.”

실새삼은 작은 손을 들어 내 두 눈을 폭삭 가렸다.

“그 소름 끼치는 세계수를 닮은 눈은 시도 때도 없이 빛을 내는구나. 만물을 보는 눈이 어쩌다 네게 덧입혀졌는지 모르겠지만 넌 영혼만 남겨질 때와 지금은 생각하는 깊이가 달라.”

이 꼬맹이가 대체 뭐라는 거야?

“주제넘게 참견하지 마.”

“그건 네가 하는 말인가? 아니면 네 안의 다른 이가 종용하는 말인가?”

실새삼은 갑자기 내 품에서 뛰어내리더니 아티팩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야, 갑자기 왜 도망가?”

“내 진리, 내가 오늘 보여 준 좋은 활약은 꼭 엘더나 메스키트 님에게 말해 줘. 내가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해 줘야 해?”

“그래, 네가 성장한 것도 열심히 자랑해 줄게.”

마거리트는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가르랑거리며 몸을 부딪혀 왔다.

축하 파티가 한창인 식당도 들르고 드라이어드들이 기다리는 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거리트의 주위에 앙증맞은 꽃 한 송이가 뿅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 능력 한 개가 차지되는 방식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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