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고생한 모두에게 휴식을.
뒤늦게 선발이 마무리된 교습소 직원들과 길드원들 역시 축하 파티에 합류해 즐겁게 놀기 시작했다.
난 얼굴만 슬쩍 비추고 빠져나왔다.
내가 껴서 함께 놀기엔 상사가 있으니 불편할 테고, 무엇보다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싹을 틔우려는 마거리트를 마저 훈련시켜야 했다.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양분 열매를 뾰로통한 엘더의 눈초리를 피해 마거리트에게 몰아주었다. 마음 같아선 보석 반지라도 하나 끼워 주고 싶은데 아직 적당한 등급의 액세서리를 얻지 못했다.
쥬얼리 콘에서 매입을 요청한 보석들도 아직까진 죄다 중하급 정도의 보석들뿐이었다.
짭신 엘더가 주렁주렁 끼고 있던 보석들이 떠올랐으나,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엘더 플라워의 종특인지 그녀 역시 보석들을 꽤 아꼈기에 빼앗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엘더에게 영혼을 위탁했기 때문에 드라이어드 한 그루분의 능력도 못 발휘하고 더 강해질 수도 없는 상태였지만, 내가 보석 하나에 전전긍긍할 만큼 한 푼이 아쉬운 사람은 아니니까.
보통 게임에선 진화 재료가 될 영웅이 가진 장비를 홀딱 벗겨서 다른 영웅에게 물려주긴 해도….
“너는 정말 나쁜 드루이드다.”
시험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안고 다닐 수 없으니, 민들레 아이들에게 맡겨 놨던 실새삼이 울분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앙증맞게 양 갈래로 묶인 아이의 머리를 보니 대충 셋이 어떻게 놀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나를 원망하는 실새삼의 태도도 이해가 갔고.
활발하고 체력이 좋은 민들레 둘이 쌍으로 덤비니 작은 몸집으로 결국 이겨 내지 못했구나.
“애들아, 꼴은 이래 보여도 한 필드의 가디언이야. 단델리온보다 높은 드라이어드라고 말했잖니.”
“내 꼴이 어때서?”
“작은 세계수님! 저게 저희보고 못났다고 했단 말이에요!”
“맞아! 아직 꽃도 안 핀 게!”
“그럼 자라다 만 것들을 못났다고 하지, 잘났다고 하겠느냐? 노멀 필드에 널리고 널린 흔해 빠진 꽃들이 말야.”
내가 보기엔 셋 다 고만고만한데.
민들레 아이들은 힘으로 실새삼을 깔아뭉개기 시작했다. 몸집도 작은 데다 아직 제대로 된 힘도 못 쓰는 실새삼은 바둥거리며 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자자,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자란 너희들이 배려해야지. 힘으로 밀어붙이면 어떡하니?”
실새삼을 안아 들자 민들레들이 콩콩 뛰며 그에게 주먹이라도 한 번 더 휘두르려고 난리였다.
“까불지 마.”
“그래, 까불지 마. 다음엔 지붕에 올려놓고 안 내려 줄 줄 알아!”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아 놔 버릴까 보다!”
“아냐, 바닥에 머리만 내놓고 묻어 버리자! 모체처럼 땅에서부터 시작하게 만들어 줄 거야!”
아이들 화법이 좀 진화한 것 같은데?
원인으로 추정되는 이를 바라보자 아닌 척 휙 고개를 돌려 버린다.
왕인 데이지에게 영혼을 위탁해도 테라리움 내의 행정 관리 일을 맡으며 바쁘게 돌아다니는 데이지2와 달리, 짭신 엘더는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실새삼 돌보기에 동참시켜 놓은 터였다.
물론 그녀는 작아진 실새삼을 보기만 해도 치를 떨어서 돌보기는 전적으로 민들레 아이들이 담당한 듯하지만.
민들레 아이들은 짭신 엘더를 유독 잘 따랐다.
민들레 군락지에서 작은 민들레들이 쉽사리 엘더 주위로 다가가진 못해도 선망하는 눈으로 힐끔힐끔 바라봤던 걸 떠올려 보면, 엘더 플라워가 회복형 특성의 최상위 드라이어드라 그런지 자신들도 모르게 롤 모델로 삼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쫓아다니게 되는 듯했다.
엘더는 아이들을 귀찮게 여기는 반면, 짭신 엘더는 그래도 살갑게 대해 주었다.
하지만 그 특유의 성격은 어디 가지 않으니… 애들이 곁에서 짭신 엘더의 화법을 배운 것 같았다.
아니면 짭신 엘더가 실새삼을 어떻게 벌주고 싶은지 중얼거리던 것을 주워들었거나, 옆에서 아이들을 부추겼을 수도 있고.
“대체 어떤 왕이 키운 되바라진 녀석들이야?”
“우리 왕이 뭐!”
“네가 가디언이면 다야?”
“자자, 그만하자.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그만 싸우고. 넌 테라리움 구경이라도 좀 하는 게 어때? 여태 날 피해 아티팩트 안에 숨어 있기만 했잖아. 이참에 뭘 하면 좋을지 생각이라도 해 봐. 난 왕이 아닌 포레스트 구성원들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니까.”
짭신 엘더는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녀가 비로소 하고 싶은 뭔가를 찾을 때, 섬에서 비롯한 짭신이란 이름을 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평소와는 다른 드라이어드 덱 구성으로 테라리움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훈련에 사용할 불을 찾아 조금 멀리 이동했다.
주변을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들이 조져 놔서 주먹만 한 불 하나 찾는 것도 참 힘들었다.
“작은 세계수님, 저희도 정말 불을 잡으러 가는 거예요?”
“제가 다 잡아 버릴게요!”
“너희는 회복형이란 걸 잊지 마렴.”
“그… 제이 님…. 왕이 아닌 저를 데려가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신난 민들레 아이들과 달리 데이지2는 잔뜩 겁에 질린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가 꾸린 덱은 내가 가진 최강 드라이어드들을 죄다 배제한 마이너 2군 덱이었다.
공격에 데이지2, 회복에 민들레, 지원에 마거리트, 응원에 실새삼.
강한 드라이어드들을 놓고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들은 마거리트의 능력이 실패해도 강해서 도저히 훈련 때 쓸 수 없었다. 하다못해 공격형으로 데이지2를 선택한 이유도 데이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데이지2는 영혼 위탁으로 인해 공격력이 상당히 낮은 상태였다. 대놓고 평가하자면 무기만 휘두를 줄 아는 드라이어드일 뿐이었다.
“이 팀으로 거대한 불을 상대할 생각은 아니야. 그저 작은 불을 상대로 실전 훈련만 할 생각이니까 너무 겁먹을 필요 없어. 회복해 줄 민들레 아이들도 데려왔잖아.”
데이지2는 민들레 아이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차라리 죽어 가는 드라이어드도 일으키는 그 엘더 플라워와 함께였다면… 제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겁을 덜 먹겠지만… 저 아이들도 아직 묘목이지 않습니까? 제이 님, 잘 생각해 보세요. 제가 불에 타서 죽어 가는데 쟤들은 고사리만 한 손으로 작은 회복의 힘만 치덕치덕 발라 줄 것 아닙니까?”
데이지2는 불안을 수다로 잊을 심정인지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아, 찾았다.”
불을 찾기 너무 힘들어서 일대의 인공 개량 드라이어드에게 물어물어 겨우 찾아냈다.
멀리 야구공만 한 불이 빌빌거리며 기어 다니고 있었다.
“저 정도는 혼자 잡을 수 있을 거 아냐?”
“그건… 그렇죠.”
정말 저 정도 수준이면 되는 거야? 데이지2의 눈에 희망이 깃들었다.
에이, 너무 쉬우면 재미없지.
나는 불에 다가가 다이아를 꺼내 던졌다. 야구공만 하던 것이 금세 그 두 배로 크기를 키웠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우와! 불이 커졌어!”
“작은 세계수님, 어떻게 한 거예요?”
“이야…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난다.”
막 뽑은 엘더, 메스키트, 데이지 드라이어드 셋과 함께 처음으로 불을 상대하기 위해 테라리움 밖으로 나왔던 날이 떠올랐다. 열렙에 눈이 돌아 끝내 다이아로 불의 크기를 키우는 편법까지 써 가며 사냥을 했었는데.
지금 내가 데려온 서툰 드라이어드들을 보니 막 걸음마를 뗀 그날의 뉴비 제이가 된 기분이다.
만약 그때 내가 뽑은 드라이어드가 스페셜과 유니크 등급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처럼 모험에 서툰 드라이어드들뿐이었다면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중간에 시들링과 만나는 상황은 그대로 이어질 수 있었더라도, 불 마차를 상대할 때 전멸 나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걔도 회복형 드라이어드 하나 없이 참 무모했지. 지금 생각해 보니 걘 나한테 백 번 절을 해도 모자란 상황이었어.
불을 향해 다이아를 하나 더 던지니 크기가 농구공만큼 훌쩍 커졌다.
“설마… 더 키우실 겁니까? 그것보다 다이아를 그렇게 막 쓰셔도 되는 거예요? 다른 드라이어드들은 제이 님의 이런 모습을 알고 있나요? 그 메스키트 님도 제이 님을 안 말리셨어요?”
“엘더가 거품 물고 죽을 뻔했어.”
“이건 단순히 아까운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그게 다였어요…? 제이 님께서 다이아가 아주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니 생각하지 않기로 했지. 더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데이지2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현실을 부정하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서 상대해 봐.”
“정말 제가 불을 상대하는 건가요? 전 왕께 모든 걸 맡겨서 아무런 능력도 없는….”
“알고 있어. 그래서 널 데려온 거야. 너무 세면 마거리트의 능력에 따른 전투 양상 변화를 보여 줄 수가 없거든. 이전의 전투는 너무 강한 드라이어드들이 캐리한 수준이었어.”
데이지2는 할 수 없이 부메랑처럼 생긴 무기를 꺼냈다.
“저 위험해지면 꼭 엘더 플라워나 하다못해 저희 왕이라도 꼭 데려와 주시기예요. 왕께선 분명 포레스트의 권속들이 위험해지는 걸 그냥 보고 계실 분이 아닙니다! 그렇죠? 왕님, 듣고 계시죠! 절 굽어살피셔야 해요! 저 지금 불 잡으러 가요! 갑니다! 꼭 구하러 와 주셔야 합니다!”
“너무 유난 떠는 거 아냐? 저 정도 불은 데이지가 첫 실전 나섰을 때도 잡은 크기인데.”
“그분은 왕이 될 그릇을 가지고 계신 분이잖습니까! 전 그릇은커녕 뭘 담을 움푹 파인 매개체조차도 없는 드라이어드인데요!”
아주 전투에 나서기 싫다고 악을 쓰며 버티는 꼴 하곤….
주절대며 시간이라도 끌어 보겠다는 심상 같은데.
“어서 가 봐.”
등을 툭 치니 데이지2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불을 향해 튀어 나갔다.
“드라이어드는 불을 잡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며. 그렇게까지 겁을 먹으면 어떡해?”
“이게 다 제이 님 때문입니다. 전 28번째 테라리움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 자라 버렸단 말입니다.”
“빨리 때려 봐요, 사부!”
“쓰승! 본때를 보여 줘요!”
그래도 네가 가르친 제자들이 보고 있는데 언제까지 약한 모습을 보일 거야?
“내 진리, 난 뭘 하면 돼? 응?”
“드라이어드의 수치로다….”
결국 데이지2는 불을 향해 부메랑을 닮은 무기를 날렸다.
데이지2를 향해 먹이를 발견한 짐승처럼 신나게 기어 오던 불은 퍽 소리와 함께 둘로 갈라졌다.
“악! 둘이 됐다! 저 쫓아와요! 둘을 어떻게 상대해요!”
데이지2는 회수한 무기를 들고 쫓아오는 불을 피해 냅다 빙글빙글 도망치기 시작했다.
“응응, 크기가 큰 불을 한 번에 잡는 것보다 둘로 갈라 작아진 불을 각각 처리하는 편이 더 쉽지. 데이지 포레스트에 속해서 그런가 머리를 제법 쓰는걸. 아니, 데이지 종특인가?”
“싸부 힘내요!”
“쓰승 멋있다!”
“저 정도의 불을 가지고 애먹는 드라이어드라니…. 드라이어드의 수치로다…. 바이오 필드의 드라이어드였으면 이미 제명했을 거야. 노멀 놈들은 근성이 부족해서 원.”
“내 진리, 내가 능력 쓸까? 지금 쓸까? 응? 응?”
마거리트는 열심히 꽁무니 빠져라 도망 다니는 데이지2를 보며 눈을 빛냈다.
데이지2가 다시금 던진 무기는 불을 4개로 쪼갰고, 그는 다시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도망 다녔다. 아니… 저 정도 크기면 도망 다닐 필요 없지 않아?
마거리트를 훈련시키기 전에 데이지2의 담력부터 길러 줘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