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7화 (267/604)

“아직 시험 일정이 남아 있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로웰라는 금방 여관에서 키르켄을 데려왔다. 그는 유들유들한 얼굴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어쩐지 못 본 사이에 얼굴에 살이 좀 오른 것 같기도?

“교습소 직원 채용 시험은 오늘 내로 끝날 예정이에요. 기다리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전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휴가 중이니까요. 그건 그렇고 여긴 정말 신선한 느낌이 드는 테라리움입니다. 그중 제일은 끝없이 수액이 솟아오르는 분수들이죠. 분명 경매를 진행할 당시만 해도 어지간한 다이아 부자들도 복구엔 쉽사리 손쓰기 힘들 정도의 수준이라 들었는데. 제이 님의 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재력을. 키르켄은 눈 위로 번들거리는 탐욕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부르신 건 따로 식사나 같이 하자고 부르신 건 아닌 거 같고, 사업 외 무슨 중요한 이야기라도 있나요?”

그는 이왕이면 다이아와 연관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눈치였지만 애석하게도 아니었다.

“이력서 좀 가져갈게요.”

내 말에 디케는 제 손이 누르고 있는 이력서를 스윽 내 쪽으로 밀어 주었다.

“교습소 직원 채용 시험은 현재 응시자 한 명의 신원에 문제가 생겨서 잠시 중단된 상태예요.”

난 키르켄에게 바소르의 이력서를 주며 그가 화제에 오른 연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 드루이드는 이미 10번대 테라리움에서 한 차례 문제를 일으켰을 확률이 높습니다. 일단 확인된 테라리움은 11번째와 13번째예요. 키르켄 님께선 발이 넓으시니 혹시 들은 것이 있으신가 해서 모셔 오도록 시켰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절 잘 찾으셨죠.”

“네, 키르켄님처럼 많은 테라리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쉽지 않죠. 저도 배워야겠어요.”

입이 술술 열리라고 열심히 칭찬해 주자 키르켄이 내 속내는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웃었다.

“어디 보자, 합격한 지 얼마 안 된 직원이 문제를 일으킨 경우라….”

키르켄은 손톱으로 바소르의 이력서를 툭툭 쳤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몸짓이었다.

“어쩌면 이 이름 역시 가명일 수도 있습니다. 의심하신 것처럼 그런 경우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벌인 일은 아니었죠.”

하지만 디케는 이력서에서 그나마 진실인 것은 그의 이름과 몇 개의 경력뿐일 거라 했는데?

슬쩍 살펴본 디케의 표정은 몹시 차분했다. 그녀는 자신이 한 말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가요? 전 경력도 허위로 작성했기에 이름 정도는 진실일 줄 알았는데.”

“아마 뛰어난 연기자일 겁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바로 반응해야 하죠. 가명을 쓰면 금방 티가 납니다. 그게 정상이니까. 새로 이름이 바뀔 때마다 수없이 자신의 이름이라 세뇌했을 겁니다. 더구나 행정 관리원의 월렛에도 가명임이 걸리지 않으려면 치밀한 신분 세탁이 필요한데, 그러러면 보통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죠. 실수로 이 과정들을 허투루 돌리기엔 아깝지 않습니까?”

그의 말대로 자신이 진정 바소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하려고 작정했다면 디케가 짚어 내기 힘들었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아니면 제가 설명드리려는 일과 관련이 없는 제3자일 수도 있죠. 어쨌든 지금 드릴 이야기는 각 테라리움 내부 사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웬만해선 외부로 발설하기 어렵긴 한데…. 저흰 한배를 탄 동지 아닙니까? 이럴 때일수록 숨기는 것 없이 돕고 살아야지요.”

다이아로 만든 연대는 참으로 유용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제이 님께서 확실히 신뢰하시는 사람들입니까?”

그는 시들링과 노토스, 로웰라 그리고 자매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길드원인 셋은 그렇다 치고 이제 막 직원이 된 자매들은?

“저흰 이만 숙소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디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두 분은, 특히 디케 님은 문서의 위조를 판별해 내는 능력으로 그 드루이드의 허위 경력을 밝혀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전 두 분을 어떠한 특별한 부서로의 위임을 고려하고 있고 그 자리는 신뢰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 자리니, 함께 듣는 것도 좋을 듯하네요.”

“특별한 부서요?”

“후에 말씀드릴게요. 물론 그 자리는 거절하실 수 있어요. 혹시 따로 생각하고 계시는 부서가 있으세요? 합격 후 일하고 싶었던 부서요.”

“전… 제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부서에서 일하고 싶어요. 동생도 마찬가지고요.”

“네, 완전 잘 활용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그럼 키르켄 님,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우릴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가 테라리움의 주요 부서를 골라 응시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행정 관리원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여기서 가까이란 물리적 거리라는 의미보단 정보에 알맞습니다.”

“행정 관리원을 노린다고요?”

“음, 정확히는 유명인을 노립니다. 제이 님은 셀럽 킬링이라는 단어를 들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뇨.”

셀럽? 셀러브리티를 말하는 건가?

“유명인들만 골라서 죽이는 걸 말한다.”

잠자코 듣고 있던 시들링이 대신 답해 주었다.

“맞습니다. 셀럽 킬링은 행정 관리원처럼 유명 인사들을 죽이는 걸 말합니다.”

“정말 사람을 죽인다고요?”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날 죽이려고 접근했다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꼭 목숨만 앗아 간다고 살인인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버려서 유명 인사에게 가장 중요한 명예와 사회적 평판을 죽이는 것 역시, 유명인 입장에선 살인이나 다름없습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죠?”

“목적이 있기 때문이죠. 보통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 어떤 단체로의 스카우트를 기다리거나 프리랜서로 활동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습니다. 셀럽 킬링은 대게 암살자나 정보를 쥐락펴락하는 모략꾼 혹은 스파이가 되기 위한 준비 단계입니다. 의뢰를 받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죠.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은 사람을 쉽사리 암살자나 모략꾼으로 부르지는 않으니까요. 반면 실력이 증명된다면 거액의 의뢰금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됩니다.”

“그걸 경력으로 삼는다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유명 인사 중 가장 대중적인 존재는 행정 관리원이며 견고한 테라리움이란 성벽에 몸을 숨기고 있는 만큼 난이도는 높지만 성공했을 시에 따라오는 명성은 대단하니 이름을 단번에 알리고 싶은 이들에겐 매혹적인 먹잇감이 되는 셈입니다.”

감히 나를 네임드 몬스터로 취급해?

“가끔 유명한 드루이드들에게도 특정인을 암살하거나 테라리움 잠입 의뢰가 들어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통은 수락하지 않습니다. 드루이드가 테라리움과 척을 져서 좋을 것이 없으며 도덕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노토스가 정중한 목소리로 부가 설명했다.

하긴, 드루이드는 어찌 보면 용병과 같은 존재였다.

어떤 판타지 소설에선 용병은 돈만 주면 뭐든지 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언급하신 10번대 테라리움들은 이미 한 차례 셀럽 킬링으로 의심되는 움직임이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살인보단 정보 교란이었지요. 극비 정보가 유출되거나 조작되어서 외부로 밝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쉽사리 공개하기엔 행정 관리원이 짊어져야 할 리스크가 더 크니, 해프닝으로 삼고 강제로 묻었습니다.”

“그 말은 아직 제대로 된 셀럽 킬링은 성공한 적 없다는 거네요? 그래서 다음 타깃으로 절 노린 것이고요?”

“이 모든 가정이 진실이라면 맞습니다. 제이 님을 죽일 의도였는지 아니면 제이 님의 명예를 죽일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일이 벌어지기 전에 알아차리신 것이 다행입니다.”

“그를 내가 죽이겠다.”

시들링이 다짜고짜 검을 빼어 들려고 하길래 일단 말렸다.

“제이 님, 이 자리에 이리스가 있었다면 이미 뛰쳐나갔을 것 같습니다.”

노토스의 참언에 이 자리에 이리스가 없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욕이 절로 나왔다.

마거리트의 찢어진 예언서에 적혀 있던 문구가 떠올랐다. 내게 해가 될 자, 말 그대로 정말로 해가 될 자를 뜻하는 예언이었다.

바소르가 내게 셀럽 킬링의 목적으로 접근했고, 마침 일어난 마거리트의 돌발 행동으로 인한 사고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시험에 합격할 수도 있었으니 그를 내 곁에 둘 뻔했다.

“알게 된 이상 가만둘 수는 없겠네요. 괘씸해서라도 본때를 보여 줘야겠어요.”

“이 드루이드가 셀럽 킬링을 목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에 확신하시나요?”

너무나도 딱 맞는 타이밍에 나타난 마거리트의 예언 문구가 1차 증거였다.

“제이 님, 제가 그 사람을 만나 보고 싶습니다.”

조용히 서 있던 자매 중 동생인 에이레네가 조심히 말을 꺼냈다.

“제이 님, 제 동생은 말씀드렸다시피 귀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귀로 듣는 것을 포기한 대신 눈으로 듣습니다.”

“눈으로 듣는다고요?”

그 말의 진위 여부는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로웰라가 이리스와 제퍼에게 알리러 갔고 둘은 주시하고 있던 바소르를 잡아 왔다.

“아… 무슨 일이십니까?”

난데없이 연행되어 온 바소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 있었던 사고에 대해 제가 충분한 사과 인사와 보상을 전하지 못한 것 같아 이렇게 모셔 오도록 시켰습니다.”

“아, 보상은 괜찮습니다. 그저 사고였을 뿐인걸요.”

그는 한눈에 보기엔 셀럽 킬링이란 음침한 일과는 관련이 멀어 보일 정도로 인상이 참 좋았다.

아마 나 역시 그가 시험 합격 조건을 충족했다면 별다른 의심 없이 내 곁에 뒀을 테니까.

난 일부러 내 옆에 에이레네를 세우고 그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내 쪽에서 도저히 죄송해서 그냥 넘길 수는 없다는 입장으로, 평범하게 위로 보상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는 이 자리를 몹시 불편하게 여겼고, 밀폐된 공간에서 많은 이들이 자신을 주목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그거면 됐습니다.”

더 붙잡아 둘 이야기가 떨어지자 그에게 대충 다이아를 쥐여 주고 내보냈다.

“불안하면 보이는 버릇이 있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입술은 다른 걸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들켰나? 뭔가를 눈치챘나?”

에이레네는 놀랍게도 사람의 표정, 몸짓만으로 그 사람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또한 입술의 움직임을 통해 말을 읽어 내는 독심술에 가까운 능력도 있었다.

그녀의 관찰력은 대단했다.

나는 미리 준비했던 셀럽 킬링이라면 반응할 만한 단어를 이야기 곳곳에서 드러냈고, 에이레네는 그 단어가 언급될 때마다 반응을 보이는 것을 읽어 냈다.

“바소르는 그 사람이 만들어 낸 인격으로 보여요. 그는 어떤 배경을 가진 바소르라는 인간에 완전히 이입되어 있어요. 하지만 서툴러서 허점이 곳곳에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럼 에이레네는 그가 셀럽 킬링을 목적으로 시험에 응시했을 확률을 어느 정도로 보세요?”

“목적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 드루이드는 제이 님을 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발되었습니다.”

그래?

“키르켄님, 셀럽 킬링을 하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죠?”

“당연합니다. 아직도 모르는 곳에선 유명인들을 노리는 일들이 우리가 모를 뿐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 바소르에겐 그에 걸맞은 복수를 해 줘야겠네요.”

사람 잘못 건드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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