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6화 (266/604)

그건 사람이 많은 곳에서 논할 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수습을 위해 휴식 시간을 좀 더 늘리려고 합니다. 응시자분들께서는 가까운 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나 다과를 즐기시면서 대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용 역시 저희 테라리움 측에서 부담할 예정입니다. 시험이 재시작된다면 별도로 안내원을 보내 드릴 테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좀 전의 사고를 핑계 삼아 응시자들을 해산시키고 그레이트 빈 연합의 매니저를 불러 바곳의 스킬이 훑고 간 필드의 정리를 부탁드렸다.

그리고 난 노토스는 물론 주위에 대기 중이던 다른 길드원들을 불러 모아 과수원으로 향했다.

이미 직원 시험이 끝난 후의 과수원은 텅 비어 있었다.

“다시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교습소 직원 중에 좋지 못한 의도로 접근한 자가 있다고요? 혹시 신뢰할 만한 정보인가요?”

“과수원 직원 합격자 중 한 분이 시험을 대기 중이던 드루이드 한 명의 낯이 익다고 제보해 주었습니다.”

제보자는 우리 테라리움 외에 다른 네 곳에서도 직원 시험을 봤었으나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진 경력이 있다고 했다.

우리 테라리움은 인력이 많이 필요해서 전례 없는 다수 채용을 결정했지만, 파필리온의 편지를 통해 알게 된 다른 테라리움의 경우는 시기별로 많아야 3명 이하로 뽑기 때문에 경쟁이 아주 치열하다고 했다.

그런 사정을 알기에 시험에서 많이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할 마음은 없었다.

“문제가 되는 그 드루이드는 매번 테라리움의 주요 부서에 응시를 했고, 경력이 좋은 덕에 항상 합격을 했다고 합니다.”

“항상 합격을 했다? 뭔가 이상한데.”

“네, 하지만 합격을 해도 또 다른 테라리움의 시험장에 늘 나타나서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번 시험에도 역시나 그 드루이드가 나타난 것입니다.”

“왜 합격을 해 놓고 다시 시험을 보는 일을 반복하는 거지? 그것도 주요 부서만 골라서.”

대체 왜 그런 수고스러운 일을 자처하는 걸까? 임금이 마음에 안 들어서? 하지만 사전에 그 정도도 알아보지 않고 응시했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나?

“제이 님, 그 드루이드야말로 정말 치터가 아닐까요?”

“의심스러운 자라는 건 확실하네요. 의도가 어떻든 사람 하나를 뽑기 위해 들어간 수고를 무시하는 행위이며, 한편으론 그로 인해 뽑힐 수 있었던 다른 사람의 자리마저 빼앗는 행위가 될 수 있으니 좋지 않아 보이긴 해요. 하지만 또 단정 짓기도 어렵죠.”

난 집무실 책상의 서랍을 열어 교습소 직원들의 이력서를 꺼냈다.

“이 중 제보자가 특정한 드루이드가 누구인가요?”

노토스는 이력서를 책상 위에 죽 펼치더니 한 장을 골라냈다.

“찾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좀 전까지 제이 님과 대결을 벌였던 드루이드라고 합니다. 마침 직원 숙소가 시험이 벌어지던 곳이 바로 보이는 위치라서 목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헐?”

바곳에 의해 죽을 뻔했던 그 드루이드라고? 하필이면? 뭐 그런 우연이 다 있어?

큰일을 당했음에도 사정을 봐주며 너그럽게 넘어가 줬던 좋은 사람인데 이런 일에 언급이 되다니.

문득 이력서를 꺼내기 위해 잠시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마거리트의 찢어진 예언장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추가된 또 하나의 문구와 지금의 상황도 우연인 걸까?

내게 해가 될 자라는 건, 설마 그 드루이드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걸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다.

문제가 되는 드루이드의 이력서를 살펴보았다.

드루이드의 이름은 ‘바소르’.

꽤 많은 이력서들 중에서도 우리가 합심해서 고르고 골라낸 이력서인 만큼 당장 보기에도 고용인 입장에서 매력적인 경력들이 가득했다. 이력서에 사진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내가 살던 세계와 달리 이곳은 증명사진 같은 것을 첨부하지 않았다.

“제보자가 이 바소르란 드루이드를 목격한 테라리움이 각각 어디였나요?”

“9번째, 11번째, 13번째, 36번째입니다.”

“한 자릿수 테라리움도 있네요? 더구나 11번째와 13번째는 28번째보다 앞 번호이고. 그렇다면 단순히 일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뛰쳐나온 수준이 아닌데?”

수상한 냄새가 나는 드루이드다.

앞으로의 처우를 잠시 정리하고 있는 사이, 합격자 축하 파티를 안내하러 갔던 로웰라가 뒤늦게 소식을 들었는지 돌아왔다. 함께 딸려 보낸 미미르는 두고 왔구나. 걔가 그 자리를 혼자 오래 버틸 수 있으려나?

“언니, 갑자기 길드원들을 소집했대서! 급한 일이야?”

“일에 대해선 나중에 설명해 줄게. 노토스는 직원 숙소에, 헤르마는 축하 파티에 있는 합격자분들께 이 ‘바소르’의 인상착의를 설명 후 제보자처럼 목격한 사람이 있는지 찾아봐 주세요. 다른 테라리움에도 응시를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혹시 알아볼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이력서를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제보자에게 한 번 더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노토스의 요구대로 들고 있던 이력서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로웰라, 방금 왔는데 미안하지만 심부름 하나 부탁해도 될까?”

“말만 해!”

마침 공교롭게도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되어 줄 인물이 우리 테라리움에 와 있었다.

“중요 손님들을 따로 모시기 위한 여관 알지? 거기서 누굴 좀 모셔 왔으면 해. 내가 키르켄 님을 뵙고자 한다고 하면 알 거야.”

파필리온이 사업 관련 건으로 들들 볶더니 결국 기다리다 못했는지 대리인을 보낸 것이다.

밤사이 우리 테라리움에 1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키르켄이 방문한 차였다.

그는 시험이 진행 중인 건 이미 알고 있다며, 휴가나 보낼 겸 일찍 내려온 것이니 자긴 신경 쓰지 말고 일정이 모두 마무리될 때 안건을 살피자고 했다.

말은 쉽지, 사업 이야기로 몸이 달아서 행정 관리원이 직접 내려왔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냔 말이다.

제보자의 말에 따르면 바소르는 11번째, 13번째 테라리움의 주요 부서에 시험을 응시해 합격했다고 한다. 키르켄은 10번대 테라리움들과 좋은 친목을 유지하는 걸로 보이니, 어쩌면 관련 일에 대해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키르켄이 일정에 맞지 않게 성급히 행동해 준 덕에 여기저기 알아볼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아마 테라리움에 늦게 도착해서 아직까지 주무시고 계실 수도 있어. 양해를 잘 구해서 모셔와 줘.”

“응, 빨리 다녀올게.”

각자 맡은 임무를 해결하러 집무실을 나갔다.

“이리스, 제퍼. 바소르를 주시해 줄 수 있나요? 비록 시험엔 떨어졌으나 혹시나 다른 일을 벌일 수도 있으니.”

“그런 건 우리 전문이죠.”

전문이었어?

이리스가 날카로운 눈을 하곤 제퍼와 함께 집무실을 나갔다. 단순히 주시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패진 않겠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용 숙소로 수소문하러 떠났던 노토스가 먼저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매지컬 레이디의 조원인 자매와 함께였다.

“두 분은 어쩐 일이세요?”

노토스가 자매 중 언니의 손에 이력서를 쥐여 주곤 내 앞으로 데려왔다.

“우선 지시하신 대로 바소르의 인상착의를 응시자들에게 물은 결과, 기억이 날 것 같다고 답한 사람이 세 명 더 있습니다. 제보자가 목격했던 네 곳의 테라리움을 제외하고도 두 곳의 테라리움이 더 있습니다.”

“일단 제보자의 제보에 신뢰성이 더욱 높아졌네요.”

“그리고 이 분은 제이 님께 이력서에서 발견한 수상한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습니다.”

“또 만나 뵙네요. 그땐 미처 제대로 제 소개를 못 드렸습니다. 전 디케, 동생은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혹시 제 능력이 제이 님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이분께 면담을 요청드렸습니다.”

“아, 도움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에요. 일단 좀 앉으세요.”

디케는 노토스의 부축을 받아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앞의 책상에 이력서를 펼치고 그 위를 손으로 조심스레 문질렀다.

“전 사실 사고로 인해 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수채화에 물을 엎은 것처럼 간신히 색깔만 구분할 수 있는 정도예요. 또한 동생 역시 사고로 인해 귀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잡음이 심하게 낀 것처럼 들리죠.”

벤에플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군요. 시험지에 두 분과 같은 분들을 배려하는 장치를 마련하지 않은 것에 사과드립니다.”

내 말에 디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전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된 이후로 살아남기 위해 눈을 대신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만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촉감입니다. 글자를 눈으로 보며 읽는 대신 촉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녀가 시험장에서 카드의 글자를 손끝으로 읽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능력을 개발한 덕에 남들이 볼 수 없는 것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건 사람의 눈을 속이기 위해 가려 놓은 진실입니다.”

“혹시 문서의 위조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는 건가요?”

“네, 지우고 다시 썼거나 덧쓰거나 하는 모든 형태로든, 문서에 거짓을 판별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제가 읽는 것은 정확히는 잉크의 흔적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는 미세한 차이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잉크는 거짓을 보여 주지 않아요.”

위조를 판별하는 능력이라니, 엄청 대단한 능력이잖아?

“또한 원본이 존재할 경우, 복제본의 여부까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같은 잉크를 쓰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비슷한 잉크를 사용해도 전 구분해 낼 수 있습니다.”

박수가 절로 나올 것 같은 능력이었다.

“그렇다면 디케님은 혹시 이 이력서가 위조되었다고 보시는 건가요?”

디케는 바소르의 이름이 써진 곳을 천천히 문질렀다.

“여기 이름, 인적 사항. 이게 그 사람의 필체 그리고 진심을 담은 잉크입니다. 거침없이 써 내려가고 드문드문 잉크의 양이 끊겨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그 아래 경력들을 순서대로 더듬었다.

“하지만 여긴 머뭇거림이 느껴져요. 잉크의 양이 늘었어요. 필체도 달라요. 이건 마치 종이 아래 무언가를 두고 따라 그린 그림의 느낌이 들어요.”

“그렇다면 여기 적힌 경력이 자신의 경력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건가요?”

“네, 모든 경력들을 서술하는 글자들이 일관적이지 않아요. 어쩌면 여기, 여기는 진짜일 수도 있어요. 머뭇거림이 없거든요.”

경력을 위조했다라…. 바소르는 진짜 뭐 하는 사람일까? 대체 무슨 연유로 우리 테라리움의 교습소 직원 시험에 응시를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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