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4화 (264/604)

“초심자의 행운이 작용했네요.”

스코풀루스는 로즈마리의 등을 토닥이곤 들고 있던 목걸이를 다시 목에 걸어 주었다.

“응시자들 중 가장 먼저 나선 덕에 편법을 노려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말처럼 나 역시 대놓고 방어에 집중하기보단 포메이션을 바꿀 예정이었다.

“이제 같은 방법은 두 번 다시 안 통할 테고 행정 관리원님의 대처 학습 능력이 빨라 보이시니, 뒤로 가면 갈수록 불리해지겠죠. 뭐, 부족하시다곤 말씀하셨는데 글쎄요. 여기에 실전 경험을 조금만 더 갖추신다면 머지않아 온 테라리움에 그 이름이 불릴 것 같습니다.”

“에이, 아부는….”

“아닙니다. 좋은 드라이어드들을 갖춰도 중심되는 드루이드가 아둔하게 행동하면 결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습니다.”

스코풀루스의 다음 타자로 나설 드루이드가 전략을 고민할 시간을 조금 요청하기에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스코풀루스는 내친김에 전투에서 선방했던 공격형 드라이어드를 내게 소개해 주었다.

“소개드립니다. 이 아이는 라피도포라입니다.”

마르고 큰 키에 순한 얼굴을 한 드라이어드가 쭈뼛대며 나와 인사를 했다. 저 얼굴로 그런 무지막지한 공격을 했다니….

“잎에 구멍이 뚫려 있거나 찢어져 있는 식물로 유명하죠.”

“아, 그래서 무기가 그렇게 생겼구나.”

“단일로 놓고 보면 이 아이는 그렇게 강한 공격형 드라이어드가 아닙니다. 혼자 키우게 된다면 성장의 한계가 가장 빨리 보이는 편에 속하죠. 아마 행정 관리원님께서 데리고 있는 데이지 드라이어드와 단둘이 맞붙게 된다면 금방 승패가 갈렸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초심자의 행운이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장기전으로 간다면 전 아무리 애를 써도 목걸이를 뺏지 못했을 거예요.”

그 정도로 약하다고?

“모체가 위로 높게 자라는 이 아이는 맨 아래의 잎까지 햇빛을 내려보내기 위해 잎에 구멍이 뚫린 형태를 갖게 되었답니다. 구멍을 통해 햇빛이 새어 나가 아래까지 도달할 수 있게 말이죠. 그래서 이 아이의 능력은 그와 관련이 깊습니다. 자신이 받는 이로운 혜택을, 효과를 반감시키는 대신 팀을 이루는 모든 드라이어드에게 전달해 줄 수 있죠. 혼자는 약하지만 팀 내에 이로운 효과를 주는 지원형 드라이어드가 많을수록 아주 강해지는 드라이어드랍니다. 강한 한 방을 노릴 때 제격인 드라이어드지요.”

와, 만약 스코풀루스처럼 라피도포라에 버프를 몰빵해 주는 덱을 만들면 보스급 몬스터도 원 킬이 나오는 거 아닐까? 게임에서 스피드 런이나 대미지 순위권을 노리는 고인 물들이나 사용하는 변태 같은 덱이 저런 방식이긴 한데.

“처음엔 나머지 7그루 모두의 힘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는데… 워낙 방어가 단단해야지요. 여유롭게 생각했다간 큰일 날 뻔했습니다. 하하하.”

강력한 한 방을 위해 방어와 회복을 모두 버리고 공격과 지원에 올인하다니. 꽤 획기적인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전술은 실전에서 처음 봤는데 이번에 배울 기회가 됐네요. 조건을 클리어하셨으니 스코풀루스 님은 합격이십니다.”

“어휴, 이제야 애들에게 체면이 살겠군요.”

그는 후련한 표정으로 굵은 양팔을 들어 기쁜 얼굴을 하고 있던 이리스와 제퍼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이야, 형. 실력 안 죽었네!”

“그렇게 과감한 공격을 할 줄은 전혀 몰랐어! 하지만 같은 방식으로 두 번 싸우면 우리 제이 님이 이겼을 거야.”

“그래, 그래.”

오랜만에 만난 사이인지 진하게 회포를 풀고 있는 셋을 뒤로 하고 바곳처럼 순한 얼굴을 한 라피도포라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단일로 놓고 보면 공격력이 아주 낮은 드라이어드. 성장의 한계가 금방 보인다는 드라이어드.

스코풀루스 같은 사람이 그 드라이어드의 진가를 발견하기 전, 과연 라피도포라는 보통의 드루이드에게 선호되는 드라이어드였을까?

더구나 제대로 써먹으려면 상당히 많은 지원형 드라이어드가 준비되어야만 했다.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인 드루이드에겐 COST는 물론 어마어마한 유지비에 가성비가 떨어질 테지.

어쩌면… 노멀 출신이라 천대받았던 데이지처럼, 많은 이들에게 외면당하진 않았을까?

어째서 그런 아픈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음 순서 준비해 주세요.”

잡생각을 떨치고 다음 전투를 이어 가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 타자로 나선 드루이드가 자신의 드라이어드들을 불러냈다. 필드에 도열한 상대 드라이어드의 수는 총 다섯.

그 드라이어드들을 빠르게 훑은 나는 이번엔 선제공격을 마음먹었다.

상대 드라이어드들은 무기와 바크만 봐도 특성을 알 수 있었다. 전원 공격형이었다.

스코풀루스처럼 공격에 집중해 산발적으로 우리의 방어를 두드려 포메이션의 와해를 노리나 본데.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해 줄 필요는 없지. 내가 두 번은 안 당한다고 했지? 설마 같은 전략으로 나올 줄이야.

디버프에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이쪽은 광역 공격에 유리한 바곳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저 드루이드는 아직 기술을 선보이지 않은 바곳을 지원형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계속 방어만 유지하는 건 재미도 없고 배우는 것도 적으니, 공격을 통해 리타이어를 시키는 전략을 펼쳐 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

전투가 시작되자 내 드라이어드들은 좀 전과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내 지시에 가막살나무가 로즈마리를 가볍게 안은 채로 후방으로 질주했다. 바곳의 영향권 밖이었다.

갑작스러운 팀 내 한 탱커의 이탈에 상대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뒤이어 메스키트는 거대한 모래벽을 세웠는데, 이전처럼 우리 팀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닌 바곳의 능력 범위 전체를 감쌌다. 혹시나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영향을 받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가두리 양식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엘더가 연이어 발동한 행운 버프가 바곳에게 적중했다.

빠른 몸놀림을 사용한 데이지에겐 행운 버프가 회피율을 높여 주는 역할을 하지만 바곳에겐 산발적으로 터져 나가는 나방을 닮은 빛 무리가 상대를 적중할 확률을 높여 줬다.

상대가 뒤늦게 함정에 빠졌다고 알아차려 봤자, 바곳은 공격형으로 턴 오버 한 후였다.

이대로 가두리 양식장 안에서 디버프를 계속 쌓아 적들을 전부 약화시킨다면 완벽했다.

“뭐야, 내 진리는 나만 빼놓고!”

고삐 풀린 망아지를 미리 단속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멋대로 마거리트가 자신의 무기인 책을 펼치는 것을 보았을 땐 이미 늦었다.

역시, 민들레 아이들과 실새삼이랑 놀고 있으라고 내버려 뒀어야 했는데.

바곳이 스태프를 들고 능력을 사용하는 것과 동시에, 마거리트가 말릴 새도 없이 무슨 능력을 사용했다.

그녀의 책에서 뿜어져 나온 흰 빛이 바곳을 적중했다.

똑같은 성스러운 하얀 빛으로 팀을 회복하는 엘더의 능력과 다르게 마거리트의 능력은 시한폭탄이었다.

덜 성장한 마거리트가 사용하는 능력은 올바르게 작동할 확률이 한 자릿수 퍼센트에 가까웠다.

즉, 그녀가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능력을 사용해도 반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지원형인 마거리트가 사용하는 버프는 저주였다.

“컥!”

갑자기 바곳의 주위로 좋지 못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하얀 꽃잎은 삽시간에 불에 타 버린 재처럼 화해 전운이 감도는 먹구름으로 변했다.

똑바로 서 있던 바곳이 무릎부터 무너져 내렸다.

“팀 킬을 하면 어떡해!”

이 못된 망아지야!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 마거리트를 혼낼 틈도 없었다.

갑자기 메스키트가 다급하게 소리쳤기 때문이다.

“회복형들을 불러와요! 엘더, 응급조치라도 해!”

그녀는 주위를 향해 크게 외친 후 바곳에게서 거칠게 스태프를 뺏었다. 바곳의 스태프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던 능력이 뚝 끊겨 버렸고, 메스키트의 지시를 받은 엘더가 광역 힐링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메스키트가 쌓아 올렸던 모래벽도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모래벽 너머에서 안의 일을 모르던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간 곳엔 삽시간에 죽음의 늪으로 변해 버린 상대편의 전장이 보였다.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부글부글 끓는 독 웅덩이와 상대편의 드라이어드들에게 덕지덕지 묻어 있는 청보라색 가루들.

이건 바곳이 지속적으로 디버프를 입히며 천천히 리타이어 시키려던 그림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치 벨라돈나가 둘은 소환되어 스킬을 쓴 듯한 파괴력이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꽃은 더욱 강하게 피어난다.’

바곳의 베일에 감춰져 있던 숨겨진 문구가 드러났을 때 그가 일깨우게 된 특기였다.

바곳은 생명력이 떨어질수록 디버프 공격력이 강해지는 드라이어드였다.

마거리트가 사용한 어떠한 능력이 바곳의 생명력을 일순 깎아 버린 것이다.

진짜 저주도 이런 저주가 없었다.

바곳의 상태에 따라 배가 된 공격력과 아직 지속 시간을 유지 중인 엘더의 행운 버프로 인해, 의도했던 것과 달리 너무 강한 스킬이 상대편을 덮쳤다. 하필 전원 공격형이라 대비도 못하는 드라이어드들에게.

마거리트를 탓하는 것은 나중에. 지금은 가벼운 대련을 넘어서 오버 대미지를 입어 버린 상대편을 구해 내는 것이 먼저였다.

엘더의 회복 덕에 기운을 되찾은 바곳은 재빠르게 회복형으로 턴 오버 해서 제가 뿌린 독을 정화했다.

메스키트의 외침에 달려 나온 회복형 드라이어드들은 힘을 합쳐 상대편 드라이어드들이 열매로 돌아가지 않도록 간신히 숨통을 붙들고 있었다.

더구나 시합을 대기 중이던 다른 드루이드들이 전장에 뛰어들어 드라이어드들보다 취약해 가장 위험한 상태인 드루이드를 구해 냈다.

대형 사고가 터졌지만 노련한 드루이드들이 잔뜩 대기 중이었던 덕에 수습은 금방 이뤄졌다.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잠깐 휴식 시간을 가질게요.”

난 상대 드루이드에게 달려가 살핀 후 과한 공격에 사과를 했다. 또한 보상금까지 챙겨 줄 생각이었다.

“하하, 이런 일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닌데요. 와, 그렇게 강력한 드라이어드를 데리고 있을 줄은… 제가 방심했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시험임에도 불구하고 정도를 지키지 못했어요.”

“표정을 보아하니 의도했던 사항이 아니란 건 알겠습니다. 가끔 어떤 날은 드라이어드들의 합이 과하게 잘 맞아 예상을 훌쩍 넘는 공격이 튀어나오기도 하죠.”

“혹시 재시험을 보시는 건….”

“아뇨, 졌습니다. 과정이 어찌 됐든 결국 저는 어떠한 대처도 못 했으니까요. 공격에 올인한 미련한 전술이 실패한 거죠.”

은둔자의 정원 출신의 허브 드라이어드들이 드루이드에게 다닥다닥 달라붙어 독기를 빼내는 것을 도왔다. 드루이드는 금방 나아진 모습으로 아쉬운 표정을 하며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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