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3화 (263/604)

“이거… 합격시켜 주실 마음이 없으신 건 아니시죠?”

가장 먼저 도전할 생각인지 인상이 푸근한 남자가 앞서 나왔다.

집중해서 그를 살피니 시들링에게서 볼 수 있었던 만큼의 환한 금빛을 그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눈이 금색으로 바뀐 이후로 드루이드에게서 보이는 금빛 뿌리가 온몸 구석구석 뻗어져 있었다.

와, 엄청 고렙인가 봐.

“에이, 전 여기 계신 분들의 드루이드 경력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이라 금방 허점이 보일 거예요.”

난 말은 그러해도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드루이드 자존심이 있는데 엄청난 실력 차로 발리면 가슴이 쓰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드루이드 간 전투에서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 세계에는 드라이어드끼리 붙어 볼 수 있는 투기장 시스템이 존재했다. 나도 장차 시들링처럼 칭호 하나쯤 달아 보고 싶은 사람이니 미리 예습해 보는 느낌?

“오, 비밀이라고 하시더니 굉장한 드라이어드들을 데리고 계셨네.”

축하 파티는 뒷전으로 미뤘는지 어느새 벤에플이 일레이디아와 함께 자리를 잡고 섰다.

“드루이드 전투가 있나 봐.”

“와, 드라이어드들이 엄청 화려한데?”

구경꾼은 계속 모여들었다. 교습소에 있던 드라이어드들은 물론, 일반인들과 예비 드루이드가 될 은둔자의 정원의 사람들도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다들 자리를 잡고 섰다.

이 자리는 예비 양성소 교관을 뽑는 시험장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들이 가르치게 될 사람들과 드라이어드에게 실력을 보여 주는 자리기도 했다.

섬의 폐쇄된 환경에서 자란 어린 드라이어드들은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 간의 깊은 관계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했다.

열매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 자연 발생한 드라이어드들조차도 주인이 아닌 드루이드를 작은 세계수라 부르며 존경심을 보인다.

하지만 섬의 드라이어드들은 어찌 보면 천둥벌거숭이나 다름없어서, 드루이드의 말을 쉽사리 따르지 않으려고 할 테니 그들을 제어하기 위해서 일단 직접 눈으로 보여 주며 기선을 제압해야 했다.

예비 드루이드가 될 섬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여태 드라이어드와 적대 관계를 이루며 살아왔다. 그런 그들에게 원래는 서로가 상생 관계임을 보여 주고, 숙련된 드루이드가 되고자 하는 동기 부여를 해 주는 자리가 될 수 있었다.

“팀의 밸런스가 좋네요.”

“그렇지, 그렇고 말고.”

이리스는 마치 자신이 칭찬받은 양 콧대를 세웠다.

“내가 대단하지!”

한편 마거리트는 온전히 자신만을 향한 칭찬인 것처럼 이리스를 따라 콧대를 세웠다.

아직 실전에 투입되기엔 어린 민들레들과 실새삼을 제외시킨 것처럼 마거리트도 제외했어야 하나 살짝 걱정이 되긴 했다.

“전 ‘스코풀루스’입니다. 시험에 최선을 다해 임하겠습니다.”

그의 손목에 채워진 아티팩트에서 환하게 빛이 나며 드라이어드들이 소환되었다.

나나 시들링도 만만찮게 드라이어드를 많이 데리고 다닌다 생각했는데, 스코풀루스가 소환한 수는 8종이었다.

“제이 님, 저 양반 만만찮을 거예요.”

“아는 사이예요?”

내 질문에 이리스는 아차 하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제퍼 역시 눈에 띄게 딴청을 부렸다. 아는 사이구나?

어쩐지 시험 응시자 중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긴 했다. 시험 전날 양성소 쪽 직원 채용은 혹독하게 부탁한다고 당부하더니…. 그래도 특혜를 달라는 식의 요청은 하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의례상 인사를 끝내고 나니 양쪽의 드라이어드들의 기세가 확 변했다.

로즈마리의 목걸이를 뺏기지 않도록 막아야 하니 이쪽은 공성전에서 수성 쪽이었다.

나와 스코풀루스는 드루이드 레벨 차이가 심하게 나긴 하지만 28번째 테라리움은 우리의 홈그라운드나 다름없는 데다 저쪽은 영역 선포도 할 수 없어서 우리가 훨씬 유리하단 판단이 들었다.

메스키트가 우선 로즈마리를 기준으로 전면 방어에 나서고, 그녀가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게 될 후면 방어에 가막살나무가 나섰다.

메스키트가 방패를 세우고 가막살나무가 거대한 검을 세우자 둘을 기준점 삼은 거대한 금빛 방어막이 성벽처럼 둥글게 우리의 주위에 솟구쳐 올랐다.

내가 없는 사이 둘이 방어 연계 스킬이라도 연습해 본 것인지, 가막살나무 군락지에서 벌였던 전투와는 확연히 다르게 두 탱커가 합을 맞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내 모든 드라이어드들이 금빛에 감싸이기 시작했다. 28번째 테라리움을 온전히 영역 선포로 받아들여 보너스 효과가 발생하는 것을 뜻했다.

“테라리움 안에서 행정 관리원을 상대로 하는 전투라….”

스코풀루스는 견고한 금빛 방어막에 난처한 웃음을 보였다.

“그래도 밸런스를 위해 가드닝 스킬은 쓰지 않을게요.”

여기서 내가 세계수 가지를 휘두르기라도 한다면 너무 오버 밸런스지.

상대 쪽에서 공격형 드라이어드가 구멍이 송송 뚫린 거대한 부채 같은 것을 들고 선제공격을 나섰다. 너무 정직하게 들어온 공격은 메스키트가 크게 몸을 움직일 필요 없이 바로 막혔다. 어쩐지 작정하고 공격을 하려 했다기보단 간을 보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후로도 많은 드라이어드 중 단 하나의 드라이어드만이 위치를 바꿔 가며 공격을 퍼부었다.

고민하는 듯한 얼굴의 스코풀루스. 어쩌면 방어 취약점을 찾는 듯한 모양새였다.

나는 적이 어떻게 나올지 긴장하며 계속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었다.

이쪽이 계속 뚫리지 않는 방어로 밀고 나가는 방법도 있지만,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상대를 리타이어시키는 방법도 있긴 했다.

하지만 우리 파티의 방어는 메스키트를 필두로 단단해도 공격은 아직까진 데이지와 바곳 둘뿐이었다.

적의 드라이어드 종을 모르는 상태인데다 만약 디버프 해제를 할 수 있는 종이 있다면 공격은 결국 물리 타격인 데이지가 전부인 셈이었다. 더구나 바로 곁에 영혼의 연결을 맺지 않은 로즈마리 드라이어드가 서 있는 한 바곳이 맘 놓고 공격을 하기에도 애매했다.

스코풀루스가 데리고 있는 드라이어드들은 어떤 종일까?

선두에 나서서 공격을 반복하는 드라이어드를 제외하곤 다들 장비가 지나치게 화려한 느낌인데.

드라이어드는 특성에 따라 장비가 달랐다. 몸을 쓰는 드라이어드들은 단단한 갑옷이나 움직이기 편한 바크를 갖춘 한편, 움직임이 적은 회복형이나 지원형 드라이어드들은 상대적으로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운 장식이 많이 달린 바크를 갖췄다.

그렇다면 다들 바곳처럼 디버프 계열을 쓰는 드라이어드거나 아니면 힐러들인 걸까?

우리 진영의 이곳저곳을 공격하던 드라이어드가 드디어 공격을 멈췄다.

스코풀루스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표정을 굳혔다. 전술이 바뀌겠네. 무언가 대단한 것이 올 법한 분위기라 메스키트도 자세를 달리했다.

공격을 멈춘 드라이어드는 구멍이 송송 뚫린 부채를 높게 쳐들었다.

그러자 상대 진영의 남은 7그루의 드라이어드들 모두 무기를 들었다.

처음 시작은 한 드라이어드가 시전한 버프로 추정되는 스킬이었다. 6개의 구 형태의 빛이 회전하는 스킬이, 부채를 든 드라이어드에게 쏘아졌다. 그러자 스킬은 부채의 구멍을 통과해 마치 빗물이 새는 지붕처럼 여러 갈래로 흩뿌려졌다.

스킬 대상자뿐만 아니라 나머지 7그루 모두에게 6개에서 3개가 된 구 형태의 빛이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또 다른 드라이어드가 연이어 스킬을 사용했다. 마치 이전 드라이어드가 사용한 스킬이 덧입혀진 것처럼, 구의 빛이 회전하며 나선형으로 빛이 휘감기는 스킬이 공격형 드라이어드가 든 부채의 구멍을 통과했다. 그러자 똑같이 7명 모두에게 스킬이 흩뿌려지는 것이 보였다.

뒤이어 남은 모든 드라이어드가 스킬을 사용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스코풀루스가 필드로 소환한 드라이어드들은 한 그루의 공격형 드라이어드를 제외한 나머지 7그루를 전부 지원형 드라이어드로 채웠다는 것을. 그것도 버프를 주는 드라이어드들로만 말이다. 하나의 공격형 드라이어드에 버프를 몰빵하는 덱이라니.

삽시간에 온갖 색색의 화려한 빛으로 휩싸인 상대 진영의 드라이어드들 덕에 주위가 조명이 가득한 공연장에 온 것처럼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아졌다.

“버프를 대체 몇 중첩이나 바른 거야….”

맘 놓고 감탄을 할 새도 없이 눈앞이 벼락이 내려친 것처럼 번쩍였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왁!”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공격 여파에 휩쓸려 넘어졌다. 좀 전의 깔짝거리며 치고 빠지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엄청난 공격이 연이어 위에서 내리쳐졌다. 바로 내 머리 위에서.

드라이어드를 대상으로 하는 공격에서 드루이드를 대상으로 하는 공격으로 바뀌자 견고한 성벽의 형태가 바뀌게 만들었다. 애초에 로즈마리를 뺏기지 않는 포메이션을 유지하던 것을, 나를 지키기 위해 드라이어드들이 본능적으로 움직이게 만든 것이었다.

데이지가 급하게 뛰어올라 견제를 하며 공격은 멈췄지만, 탱커들을 기점으로 몰려 서 있던 우리의 포메이션은 많이 흐트러진 상태였다.

방금 공격은 단순히 7개의 버프가 중첩된 수준을 한참 넘어선 느낌이었다.

메스키트가 단숨에 방어진을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위력이 장난 아닌 것을 보면, 꼭 몇십 개는 훌쩍 넘는 버프가 중첩된 수준이었다.

그래, 저 공격형 드라이어드가 사용한 이상한 모양의 부채.

공격 무기임에도 불구하고 왜 허술해 보이게 구멍이 송송 뚫려 있나 했더니, 그것이 무슨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부채를 통과한 스킬이 모두에게 흩뿌려졌지?

엘더가 사용하는 행운 증가 버프는 타깃 하나를 대상으로 하는 스킬이었다. 이 행운 증가 버프의 위력은 꽤 대단한데, 이렇게 효과가 좋은 버프는 보통은 하나의 드라이어드에게만 오롯이 버프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제약이 걸린다.

하지만 본래 타깃이 하나인 버프를 편법을 사용해 여럿이 받게 할 수 있다면….

부채를 든 드라이어드가 받은 버프는 같은 팀에게 확산되고 여러 명이 동시에 확산된 버프를 받는다.

그렇게 되면 다음 드라이어드가 스킬을 사용할 때 버프를 받은 상태의 버프를 사용하게 되고, 또 다음 드라이어드가 스킬을 사용하면 버프에 버프를 받은 버프를….

결국 스코풀루스의 드라이어드들이 버프를 사용하면 할수록 몇 배나 중첩된 버프가 계속 쌓이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전략을 알게 된 순간 파훼법은 존재했다.

버프를 쌓기 전에 공격을 넣는 것이다.

아마 위력이 배가 된 만큼 지속 시간이 짧은 것인지, 막판엔 데이지의 견제가 무리 없이 들어갔다.

이제 역공격을 한다면….

“반응 속도가 빨라서 하마터면 실패할 뻔했네요. 거기다 행정 관리원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두 번은 안 통할 것 같고.”

놀랍게도 스코풀루스는 어느새 합격 목걸이를 들고 있었다.

“악! 로즈마리 어디 갔어?”

어이없게도 애타게 찾던 로즈마리는 스코풀루스의 드라이어드에게 양어깨를 붙잡혀 있는 상태였다.

“도망갔구나….”

스코풀루스의 전략은 단순히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것에 있지 않았다. 포메이션의 와해였다.

로즈마리는 나와 영혼의 연결을 맺지 않은 드라이어드니 팀 단위로 움직일 수 있게 제어가 불가능했다.

엄청난 위력의 공격이 갑작스럽게 쏟아지자 내 드라이어드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애가 본능적으로 도망쳐 버린 것이다….

내 드라이어드들이 날 보호하기 위해 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도망친 로즈마리를 저쪽이 낚아챈 것이고.

결국 이쪽은 화려한 방어선만 선보이고 허망하게 로즈마리를 뺏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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