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1화 (261/604)

미미르는 쉽사리 한 명을 선택하지 못했다.

남아 있는 9명의 응시자들에겐 미미르가 가진 스카우트 카드가 마지막 기회이기에 그들은 열렬한 눈으로 미미르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받은 미미르는 흡사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갈 것처럼 자꾸만 아래로 움츠렸다. 소심해도 너무 소심했다.

사실 길드원이 아니며 게스트나 다름없는 그에게 스카우트 카드 행사 권한을 준 것은 미리 약속된 사항이 아니었다.

본래는 길드원들에게만 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미미르의 아카데미 동기인 아이들을 보고 나자 그에게도 스카우트 카드를 줄 것을 즉흥적으로 정하게 되었다.

권력에 굴복했다면 권력으로 맞서 보렴. 아카데미에서의 경험으로 자신감을 많이 잃고 더욱 소극적으로 변했을 미미르를 위해 하나의 장비를 입혀 준 것이다. 물론 내가 준 장비니 초보자 장비와는 차원이 다른 장비다.

아카데미에선 비록 괴롭힘을 받고 무시당했을지라도 이를 극복하고 잘되었다는 걸 보여 주렴.

그리고 이건 내가 그를 판단하기 위한 시험이기도 했다.

“38번째 테라리움을 도와주기로 하신 건가요?”

“만약 도와준다 하더라도 정작 미미르가 도움받을 준비가 되지 않으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뭐… 그렇겠죠. 제이 님은 벌써 테라리움을 두 개나 운영하고 계신데 소유도 아닌 38번째 테라리움에 계속 신경을 쓰실 순 없으실 테니까요. 정작 미미르 본인이 바뀌지 않으면 38번째 테라리움은 또 다른 3자에게 휘둘리겠지요.”

“그 성정이라면 제2의 자문 위원회를 만들고도 남겠지요.”

언젠가 이리스와 단둘이 있을 때, 그녀가 내게 물었었다. 요즘 들어 부쩍 미미르와 38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 같은데, 그건 그를 도와줄 마음이 생긴 거냐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번호 연계법으로 묶여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38번째 테라리움에 깊게 관여할 권리는 없었다. 이쪽에서 38번째 테라리움을 휘두르는 자문 위원회를 재력이나 권력으로 찍어 누른다고 한들, 그것이 영구적일까?

이미 미미르는 어질고 선한 임금님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포용하고 존경을 받는 행정 관리원이 되기엔 너무나 얕보이고 있었다. 다른 방식을 써야지.

미미르 자신이 재력이 됐든 권력이 됐든 직접 주체가 되어 그걸 부리고 위엄을 보여야 했다. 하다못해 날 등에 업고 기고만장한 모습이라도 보여야 했다. 강한 무기가 있는데도 그걸 휘두를 마음이 없다는 걸 들키게 되면, 호시탐탐 38번째 테라리움을 노리는 적들에게 도로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당장 자문 위원회를 상대해 보는 것 대신, 학생일 적 트라우마나 다름없는 림파와 아이들을 상대해 보라고 떠밀어 본 것이다.

그에겐 자신의 여린 성정을 보호하고 감춰 줄 수 있는 장비를 입혀 주었다. 남아 있는 응시자 모두가 원하는 합격권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를 지지해 주는 행정 관리원의 모습.

만약 이를 극복해 내지 못하고 결국 림파의 눈초리에 눌려 그녀나 아카데미의 학생을 선택한다면, 미미르는 그저 그가 속한 가문의 온건파 베스탈리스들과의 교류를 위한 다리라는 수단으로만 대해야겠지.

38번째 테라리움은 계속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굴러갈 것이다. 속이 쓰리긴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다들 어떤 기준으로 합격자들을 고르셨나요?”

선뜻 행동하지 못하는 미미르에게 고민할 시간이라도 주기 위해 길드원들에게 질문했다.

“전 통솔력을 봤습니다. 사람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 저희 테라리움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이리스는 남아 있던 응시자 중 다른 조에 인원을 배분해 가며 5명을 채워 주느라 정작 자기는 탈락 위기에 놓였던 사람을 택했다고 답했다.

“전 다른 이들을 즐겁게 해 주는 사람을 골랐습니다. 단순해 보이긴 해도 분위기를 유하게 풀어주며 중재해 주는 사람이야말로 조직이 오래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죠.”

제퍼는 탈락이라 생각하고 암울해 있던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며 격려하고 다독이던 사람을 택했다고 답했다.

“전 친화력이요! 어찌나 친화력이 좋은지 제가 골랐던 사람은 응시자 대부분을 벌써 친구로 삼은 것 같던데요? 아마 떨어뜨리면 원성이 자자하고 욕먹을 것 같아서 뽑았어요! 다른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사람이면 어느 부서를 가도 적응력이 좋을 것 같아요!”

로웰라다운 대답이었다.

“강함이다. 그 드루이드는 전투 의뢰를 전문적으로 처리하며 이름과 얼굴을 알렸던 자이다. 비록 지금은 전투 후유증으로 실전에서 뛰기 어렵게 되었지만 그가 가진 실력과 경험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시들링이 얼굴을 알 정도의 사람도 이 시험에 응시를 했었다고?

“그 정도면 양성소 쪽에 지원하는 게 낫지 않았나?”

“그 드루이드의 선택이니 신경 쓰지 않는다.”

“아, 역시. 투기장에서 본 것 같은 얼굴이다 했어요. 실전에선 은퇴했구나.”

이리스도 시들링이 뽑은 응시자가 아는 드루이드 같다며 말을 보탰다.

“난 그냥 줏대가 없어 보이긴 해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잘 지지해 주는 것이 괜찮아 보여서 선택했는디.”

“계속 다른 사람들과 쓸데없이 반목하는 것보다 의견에 힘을 실어 주며 지지해 주는 성향이 좋긴 하겠지.”

어쩐지 헤르마가 뽑은 사람은 반대 의견에 부딪히면 금방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오르와 합이 잘 맞을 것 같았다.

“제가 고른 사람은 규칙을 준수하고 상사에게 존경심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꼭 너 같은 사람을 고른 건 아닌가 싶은디….”

“아냐, 노토스는 자기가 데리고 있는 소나무들 같은 사람을 뽑았어.”

노토스가 고른 합격자는 주어진 시험의 룰에 철저히 따르고 이리스를 계속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봤다는 사람이었다. 응시자들 대부분이 시험 룰을 잘 지킨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어찌 보면 다른 길드원들과 다르게 특출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을 고른 것처럼 들렸다.

뭐, 진부한 꼰대 마인드 같긴 해도 주어진 룰에 충실하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행하는 사람 역시 공무원 적성에 잘 맞는 인재상이 아닌가 싶다. 어찌 됐든 과수원 직원은 공무원이나 다름없으니까.

“자, 그럼… 미미르, 넌 어떤 합격자를 뽑을 거야?”

이제 네 차례란다. 이만큼 고민할 시간을 줬는데도 계속 미적거리진 않겠지?

“미미르.”

갑자기 림파가 미미르의 이름을 불렀다.

“같은 아카데미를 다닌 정을 잊진 않았겠지? 난 평생 기억할 건데.”

그건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얼핏 들으면 학연에 의거해 뽑으란 말 같았지만 여기서 자신을 뽑지 않으면 평생 기억해 복수하겠다는 말이었다.

“맹랑하네. 이 자리가 어떤 자린데. 저런 자신감이 다른 쪽으로 표출되면 이리스 눈에 진작 들었을 텐데.”

제퍼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의 생각엔 동의한다.

같은 응시자 신분이면 모를까 미미르는 그래도 참관인 자리에 서 있었다. 더구나 평범하게 함께 아카데미를 졸업한 것도 아닌, 미미르를 괴롭혀서 아카데미에서 뛰쳐나오게 만든 아이들 중 하나면서.

어쩌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카데미에서 한 번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미미르가 굴복했겠지.

그래서 림파는 결국 미미르가 자신을 뽑아 줄 거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긴 교실이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정말 멋대로 거만하게 굴어도 스카우트 카드만 받으면 룰에 따라 합격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스카우트 카드를 무효화하고 9명을 전부 떨어뜨려 버리는 것도 가능한 사람이 여기 있는데?

“전… 보나를 뽑겠습니다.”

보나? 아버지가 석류 금융의 사장이라는 그 아이? 정말 같은 아카데미 출신에 림파의 무리인 그 여자애를 뽑겠다고? 림파가 아니긴 해도 그 무리의 사람을 뽑을 줄이야. 역시 미미르는 안 되는 걸까?

결국 굴복한 미미르에게 실망한 얼굴이나마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사실 제가 뽑고 싶었던 건…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저처럼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이 생겨도 있던 자리를 뛰쳐나가지 않게,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여긴 제이 님 말처럼 교실이 아니죠.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이 아닌, 따돌림을 한 사람이 쫓겨나는 곳이에요. 분명 제이 님이라면 그렇게 하실 거예요.”

그렇지. 내 테라리움에서 그런 꼴은 절대 못 본다.

“그리고 이 자리는 제이 님을 위해 일해 줄 사람을 뽑는 자리잖아요? 단순히 절 위한 사람이 아니라…. 보나는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복종할 거예요. 제이 님이 저 무리와 함께 하셨을 때 보였던 모습은 실망스러울 수도 있으나 보나는 태세 전환이 빠른 사람이에요. 제이 님이 원하는 인재상에 맞춰 연기라도 할 거예요.”

혹시 남들 앞에서 대놓고 보나를 욕 먹이기 위해 뽑은 거니?

매번 말끝을 흐리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미미르의 모습이 점차 바뀌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업 수완이 좋으니 곁에서 지켜본 보나도 능력이 있겠죠. 보나는 손위 형제가 있어서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지도 못하고, 그 집 방식에 따르면 첫째를 제외한 자식들은 재산을 물려받지도 못해요. 직접 벌지 않는 이상 독립도 무리일 테니 돈을 많이 주는 28번째 테라리움에 뼈를 묻을 거예요. 안 쫓겨나려고 발버둥을 칠 테죠.”

“뭐? 너 재산도 못 물려받고 빈털터리라는 거야? 그럼 네가 석류 금융의 딸이라 해도 결국은 너에겐 전혀 쓸모도 없는 거였잖아?”

듣던 림파가 별안간 보나를 몰아세웠다. 보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미르와 림파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애가 자신을 제치고 뽑히면… 그것도 역시 손수 쫓아낸 애가 뽑는다면… 그 사람은 평생 느껴 보지 못했을 비참함을 느끼겠죠. 우위에 서 있다는 건 참 굉장하네요, 제이 님.”

어라? 미미르가 좀 바뀐 것 같은데? 얼굴만 같은 다른 애가 대타로 서 있는 건 아니지?

마치 애가 흑화라도 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엄청 대단한 사람들이 전부 제이 님을 위해 일해요. 그리고 모두 제이 님을 존경해요. 정말 대단해요.”

미미르는 내 길드원들을 열망하는 눈으로 찬찬히 바라보았다.

“흥, 웃기네. 네가 선심 쓰듯 뽑아 주겠다고 구는 걸 보나가 받아들일 것 같아?”

“고마워, 미미르! 나 정말 열심히 할게. 역시 넌 현명한 애였구나. 그래서 행정 관리원님께서 널 참관인으로 둔 거겠지.”

보나는 미미르의 말처럼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했다.

다이아만 주면 조직도 버리는 칼롱급의 인간 박쥐나 다름없었다.

“뭐? 너 정말 이딴 곳에서 일하겠다는 거야?”

불합격이 확정된 림파는 행정 관리원 앞에서 대놓고 테라리움을 낮잡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야, 친한 척하지 마. 어차피 너도 내가 재산을 물려받지 못한다는 걸 안 순간, 여길 나가면 날 내치려고 했잖아? 누가 누굴 이용했다고 착각하는 거야? 나 역시 네 친분으로 한밑천 잡으려고 했던 것뿐이야.”

보나는 표정도 싹 바꾸고 웃는 낯으로 홀 문을 향해 걸었다.

“제이 님, 림파의 무리라면 단 한 명도 뽑고 싶지 않으셨겠지만….”

미미르가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제가 아카데미를 도망치듯 나왔을 때… 남겨 둔 제 물건을 챙겨서 집까지 보내 준 유일한 친구예요…. 보시는 것보다 심성은 착할 거예요….”

마치 그날의 작은 친절에 보답이라도 하고 싶었다는 뜻처럼 들렸다.

흑화 한 모습을 버리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미미르는 다시 목소리 크기를 줄였다.

미미르의 마음은 잘 알겠다. 그가 사용한 스카우트 카드는 무효 처리 없이 그대로 통과될 것이다. 그것보다… 이 애를 대체 어떻게 자극하면 좀 전의 흑화 한 모습이 다시 나올까? 날 보고 배운다고 했지? 대체 뭘 배운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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