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9화 (259/604)

오르가 가진 카드의 글자는 하필이면 나와 같은 ‘을’이었다. 이쯤 되니 정말 글자 수량을 정확히 배분 못 한 것이 아닌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나머지 두 글자 중 하나만 걸려도 이들이 대충 시험 문제에 대한 답을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눈에 띄게 합격 조가 늘었다. 두세 개의 조가 한 번에 합격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조가 찢어지거나 합쳐지는 과정에서 이전의 조가 가지고 있던 카드 글자를 서로가 공유했기 때문이다.

정보 공유가 활발해지니 종래엔 서로 다른 5개의 글자를 굳이 다 모으지 않더라도 사람만 5명이 모이면 시험 문제를 풀고 홀을 나갔다. 사람을 의심하며 교류를 꺼리던 사람들은 닭 쫓던 개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로 북적였던 홀은 어느덧 무척이나 한산해졌다.

“4명이나 모여 있어서 유리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일레이디아의 한탄 섞인 말이 맞았다. 남은 1명을 구해야 하는 우리보다 둘이나 셋씩 짝을 이룬 무리가 합쳐지는 것이 더 쉬웠다.

“이러다 정말 치터를 데려오게 되면….”

부담에 짓눌리기도 1등인 오르는 다시 불안에 떨며 조원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구조 요청이라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오, 네 명 모았네?”

4인조로 전전긍긍하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의외로 림파의 무리가 사람을 한 명 더 섭외해 4인조를 이루고 있었다. 용케 저 아이의 성격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역시 그 교수님은 아직도 그러시는구나?”

홀 안이 한적해진 덕에 멀리서도 주고받는 이야기가 꽤 잘 들렸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대화를 누군가 들어 줬으면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네, 선배님.”

림파의 깍듯한 목소리가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져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그 림파가?

“원래 그분이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에겐 유독 잘해 주셨잖아? 나도 과제에 필요한 참고서 같은 걸 참 많이 받았지.”

“와, 역시. 선배님도 아카데미 시절엔 성적이 대단하셨군요. 그분께 참고서까지 받은 학생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아, 뭐 별건 아니었어. 그저 교수님이 집필에 조언을 좀 해 준 것에 대한 감사로 참고서를 좀 많이 받으셨다고 해. 자리를 많이 차지하니 내게 몇 권 덜어 내신 거지.”

“와, 교수님이 직접 집필에 참가한 책을 주실 정도라니.”

림파의 조에 합류하게 된 사람은 같은 아카데미 출신인가 보네. 이 세계에도 학연이라니.

“우리 아카데미의 자랑스러운 후배도 넵튜누스라고 했지? 우리 어머니의 친한 지인의 동생도 넵튜누스라서 나도 넵튜누스에 대해선 잘 알지. 넌 석류 금융의 사장님 딸이라고? 우리 사촌 중에 석류 금융에서 일하는 분이 계셔.”

거만을 떨던 림파는 의외로 선배라는 자와 잘 어울리고 있었다.

아, 역시 끼리끼리 어울렸다는 생각이 든다.

홀 안에 남은 사람 중 저 조와 무리 없이 어울리려면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거나 부모들의 사업과 연관점이 있으면 될 것 같다. 만약 저런 사람들이 함께 직장을 다니면 파벌을 이루고 분위기를 해칠 것이 눈에 훤했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어느덧 반이나 흘러내렸다. 점심시간이 되자 황금 호박 상회에 주문한 런치 세트가 홀 안에 서빙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같은 조끼리 뭉쳐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 시간 역시 교류의 장이었다. 벤에플은 빨리 식사를 끝내곤 눈에 띄는 마술을 선보이며 조를 위해 막간 홍보를 진행했다.

“반응들이 너무 시큰둥하네요. 아마 점심시간이 끝나면 상당수의 조가 합쳐지고 합격할 거예요.”

“다들 무리 없이 통과하는 걸 보면 시험 문제는 아주 쉬운 것 같은데…. 정보라도 좀 얻어 볼까요?”

벤에플이 박수갈채 외 수확이 없었다며 한탄하자 오르가 열심인 그녀에게 자극이라도 받은 것인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주시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네?”

“저기 세 명인 조와 두 명인 조는 곧 합쳐질 것 같은데, 여유로운 표정들을 보아하니 살짝 도움을 구하면 너그럽게 알려 줄 것 같지 않나요? 가서 물어보는 게 좋은 선택일까요?”

“그걸 제게 물어보고 결정하시기보단 직접 결정하셔도….”

오르는 내 말에 낭패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 사람…. 부담을 이겨 내기 위해 남에게 의존적으로 굴게 되는 건가? 방금 그가 한 제안은 꽤 괜찮았으니 ‘안 가르쳐 주면 말고’라는 심정으로 그냥 시도라도 해 보면 될 텐데.

이미 조가 섞이고 섞이며 정보 독점의 의미는 많이 퇴색됐으니 오르의 말처럼 물어보면 합격을 앞뒀으니 기분 좋게 가르쳐줄 수도 있었다.

내가 더 이상 아무 말 않자 오르는 포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마치 내가 가서 물어보라고 하지 않는 이상 절대 스스로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제가 언제까지 계속 옆에서 도와줄 순 없….”

“저기 식사 중에 실례합니다….”

갑자기 우리 조에 다가온 사람들로 인해 대화가 겹쳤다. 말쑥한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 둘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면접 자리라는 생각에 차려입고 왔을 텐데 정작 엑스맨 게임이나 벌인 난 미약하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은 머뭇거리며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괜찮아요. 무슨 일이세요?”

“저희 언니를….”

“저희 동생을….”

이번엔 서로의 대화가 겹쳤다.

“두 분은 자매신가 봐요?”

“네, 제가 언니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동생을 여러분의 조에 끼워 주셨으면 해서요.”

“아니에요. 제가 아니라 언니를 끼워 주세요.”

둘이서 조를 이룬 자매는 스스로 찢어지기를 작정하고 온 것이었다. 다만 어느 쪽이 합류할지는 의견이 분분했다.

“두 분이면 세 명인 조에 함께 합류하는 것이 낫지 않나요?”

“그게… 염두해 뒀던 조들은 이미 합류 준비를 마쳤더라고요. 저희 자매는 비교적 빠르게 조를 이룬 편이었는데 중간에 계속 인원수가 변하다 보니 어느덧 어정쩡하게 저희만 남게 되었어요.”

일레이디아가 묻자 자매는 자신들의 사정을 설명했다.

“동생을 먼저 합격시키고 난 후 전 둘씩 합쳐졌거나 다른 4인조가 되는 조를 찾아보려고 해요.”

“아냐, 언니가 먼저 가.”

“자매가 사이가 참 좋네.”

한 명이 갈라지더라도 갈 수 있는 선택지는 지금으로선 림파가 있는 4인조에 머리 숙이고 들어가는 것 외엔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지금쯤 슬쩍 끼어들 법한데 묘하게 벤에플이 조용했다. 그녀는 자매 둘을 빤히 바라보더니 슬쩍 내 어깨를 건드렸다. 따로 이야기할 게 있다는 뜻이었다.

“일단 두 분께서 누가 합류할지 확실히 정하고 계시는 게 어떨까요? 저흰 잠깐 이야기 좀 나눌게요.”

“부탁드릴게요. 제 동생을 데려가 주신다면 제가 가진 글자도 함께 알려드릴게요.”

“아니, 저 말고 언니를….”

“에이, 굳이 그렇게까지 부탁하지 않으셔도 돼요. 한 사람이 급한 건 저희도 마찬가지니까요.”

왜 일레이디아와 오르를 두고 굳이 나를 데려가 이야기를 나누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벤에플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일레이디아가 벤에플을 불렀다.

“비록 당신이 절 많이 괴롭히긴 하지만 심성까진 나쁘다고 생각 안 해요. 제가 잘못 생각하는 거면 좋겠군요.”

그는 어쩐지 벤에플을 의심하고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본질을 보는 눈이 없으면 마술사 옷 벗어야죠.”

그런 일레이디아에게 벤에플은 능청을 떨며 웃었다.

나와 벤에플은 우리가 있던 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에요?”

“제이 님은 눈치 못 채신 건가요?”

벤에플은 애써 자매들이 있는 곳에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까 그 자매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역시.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잘 알아차리기 힘들 법하죠. 자매 중 큰 쪽은 눈에, 작은 쪽은 귀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여요. 선천적인 건 아닌 것 같고 사고를 당한 것 같은데.”

“정말요? 전 전혀 눈치 못 챘어요.”

“겉으론 워낙 평범하게 보이고 흉터도 작아서 한눈에 보기엔 파악하기 힘들죠. 하지만 저나 저 레이디는 직업병 때문에 알아본 것이고요. 언니 쪽은 시선을 잘 못 마주치거나 동생의 부축을 받고 있고, 동생 쪽은 대화 때마다 언니가 신체를 터치하며 신호를 보냈어요.”

아뿔싸. 우린 시험을 준비하며 그런 건 미처 고려 못 했었는데. 어떻게 시험을 치를 수 있었던 거지?

“단순히 대화 몇 마디로는 다른 사람들도 알아차리긴 어려웠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눈치챘을 거예요. 자매들이 빠르게 조를 이뤘지만 결국 둘만 남게 된 것은 그런 연유 때문일 겁니다. 더구나 언니 쪽은 눈이 보이지 않는 듯한데 1차 시험은 눈이 불편한 사람을 위한 배려 장치가 전혀 없었던 종이를 썼으니….”

“치… 치터로 의심했을 수도 있겠네요.”

다양한 응시자들을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고 배려하지 못한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어째서 생각을 못 했던 걸까?

“레이디가 절 걱정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자매의 신체적 불편함에 편견을 갖고 조 영입을 반대할까 봐.”

“불편함을 딛고 정당하게 시험에 합격했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인재인데, 편견으로 사람을 배제하는 건 맞지 않죠.”

“네, 그래서 제가 이 조에서 나갈까 합니다. 그럼 자매는 함께 조에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전 하도 여기저기 관심을 끌어 놔서 제 쪽이 다른 조를 찾는 것이 자매들보단 빠를 겁니다.”

“매지컬 레이디에서 매지컬이 빠지겠다고요?”

“자칫 잘못하다간 레이디가 빠질 수도 있으니 제가 선수 쳐야죠. 레이디는 남을 배려하느라 시험이 끝날 때까지 제 자리를 양보할 거예요. 제가 먼저 다가서기 전까지도 조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으니.”

“배려하는 건 벤에플 님도 똑같은데요?”

“에이, 전 레이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자매들을 위해 조에서 빠지겠다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담?

“어쨌든 그렇게 알고 계세요. 전 금방 당신들 뒤를 따라갈 거예요.”

벤에플은 그리 말하며 재빠르게 조가 있는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 쳤다.

“혹시 카드 먼저 볼 수 있을까요?”

내 말에 자매들은 주섬주섬 카드를 꺼냈다. 벤에플의 말을 듣고 나니 카드를 꺼내기 전 동생을 툭 쳐서 신호를 보내는 언니의 모습을 캐치할 수 있었다.

“제가 가진 글자는 ‘선’이에요.”

동생이 먼저 대답하고 언니는 카드 위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다 뒤늦게 답했다. 손가락이 지나는 경로는 잉크가 새겨진 경로였다. 어떻게 시험을 볼 수 있었나 했더니 설마 잉크를 촉감으로 느껴서 글을 읽었을 줄이야. 정말 놀라운 능력이었다.

“저는 ‘나’를 가지고 있어요.”

“마침 잘됐네요. 제가 카드를 중복으로 가지고 있었거든요. 절 빼고 이렇게 다섯 분이서 조를 이루면 될 거예요.”

“카드를 합치면 ‘문을 나선다’? 뭐야, 시험의 답이 이렇게 단순한 거였어? 그냥 다섯 명이서 함께 문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됐던 거야? 잠깐만요. 제이 님이 조를 나가겠다고요?”

“저희 때문에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자매가 당황하며 말했다.

“제가 먼저….”

벤에플이 끼어들려고 하길래 얼른 선수 쳤다.

“전 합격이 보장되어 있으니 걱정 마세요.”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