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7화 (257/604)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갑자기 빈 손이 눈앞에 쭉 뻗어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하얀 장미꽃을 피워 냈다.

“오….”

신기해하는 내게 웃는 얼굴로 하얀 장미를 건네는 사람은 마술사 벤에플이었다.

“이것도 마술인 거죠? 아니면 드라이어드의 힘?”

“마술입니다.”

능청스럽게 말하는 그녀 옆에서 광대 분장을 한 드라이어드가 킬킬 웃었다. 드라이어드의 힘을 이용한 마술이라…. 정말 참신했다. 드루이드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이 생각보다 무궁무진했네. 점술가도 될 수 있고 말이야. 드루이드가 되면 모험을 떠나야 한다고만 생각했던 나는 너무 편협한 시각을 가졌던 게 아닐까?

“저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던 것은 봤습니다.”

벤에플이 바라보는 방향엔 림파를 비롯한 아이들이 팔짱을 낀 채 사람들을 훑고 있었다.

“그럼 제가 저 아이들과 조를 이루자마자 쫓겨난 것도 보셨겠네요.”

“뭐, 조는 다시 찾아보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저희와 함께하시는 건 어떠세요?”

벌써 합격자가 생겨서 그러는 걸까? 응시자들은 이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며 경계하던 것을 멈추고 활발하게 조원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미 방출 경험이 있는 나에게까지 금방 다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올 정도로.

“전 치터로 의심….”

“아이들에게 하던 조언은 인상 깊었습니다. 그런 바른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치터일 리는 없겠죠?”

그렇죠? 그녀는 소망이 담긴 목소리로 덧붙였다.

“뭐 두말하면 입 아프죠.”

“그렇다고 하십니다. 레이디.”

“레이디?”

벤에플이 슬쩍 비켜서자 내가 가진 장미 한 송이는 비견도 안 될 정도로, 한 다발을 넘어 아예 백장미에 푹 파묻힌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딘가 우중충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레이디라며?

그는 시선이 바닥만 훑으며 나와 쉽사리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인 걸까?

“꽃이…. 장난 아니네요.”

“보여 주는 족족 반응이 너무 좋길래… 조금 오버했습니다.”

벤에플은 머쓱한 표정으로 남성에게서 꽃을 나눠 받았다. 그러곤 하늘을 향해 던졌다. 백장미 꽃다발은 순식간에 하얀 꽃비가 되어 나풀나풀 흩날렸다.

“와, 멋있다. 그런데 또 바닥을 더럽히면 한 소리 듣지 않을까요?”

“다행히 한 시간 뒤면 사라집니다.”

광대 복장을 한 드라이어드가 다시 킬킬댔다. 한 시간 뒤가 아닌가 본데?

“여기 계신 분은 수줍음이 많으셔서 겉돌고 계시길래 제가 같은 조가 되어 달라고 제안했습니다. 홀을 어지럽힌 위조 카드도 이분이 종이를 제공해 주셔서 만들 수 있었던 거구요. 이제 그쪽이 오시면 저흰 3인조가 되는 거죠.”

벤에플의 말을 듣고 그를 살피니 하얀 종이 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헿’ 같은 우스꽝스러운 글자를 써넣은 것도 저 사람이 쓴 건 아니겠지? 보기보다 개그 센스가….

“전… 수줍음이 많은 게 아니라….”

“사람 대하는 것이 귀찮다고 하십니다.”

“말 자르지 마세요… 전 단지….”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데 모아 두고 시험을 볼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무척 피곤하다고 하십니다.”

“이익!”

퍽! 퍽! 하고 백장미 꽃다발이 벤에플의 어깨를 수차례 후려쳤다. 그 모습이 꼭 복숭아 나뭇가지로 악령을 떨어뜨리려는 퇴마의식처럼 보였다. 남자보다 키가 훌쩍 큰 벤에플은 과장되게 휘청이는 모습을 하며 우는 소리를 냈다. 어쩐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동생을 놀려 먹는 누나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잠시만요, 레이디. 혹시 꽃으로도 사람을 때리지 말라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으신가요? 보기보다 아프니까 그런 말이 나온 겁니다. 꽃다발도 훌륭한 무기예요.”

“자꾸 레이디라고 부르지 마세요! 제 이름은 일레이디아라고요!”

“두 분은 벌써 많이 친해지셨네요.”

마술사 벤에플은 어딘가 능글맞은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반면 일레이디아라는 남자는 옆에서 벤에플이 속을 긁지만 않는다면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처럼 보여서, 어쩐지 이미지가 다른 둘이 용케 잘 어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디, 숙련된 드루이드는 그깟 꽃으로 좀 때린다고 막 아프진 않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거봐요. 무기는 무슨! 아니, 당신도 절 레이디라 부르면 어떡해요!”

“역시 레이디란 말이 입에 찰싹 붙지 않나요?”

“저도 모르게….”

귓가에 벤에플이 능글맞게 레이디라고 부르던 것이 박혀 버렸다.

백장미의 모가지를 모두 꺾어 버린 일레이디아는 후련한 표정으로 손에 든 모든 것을 바닥에 털어 버렸다. 그의 발밑에 처참한 형태의 꽃줄기가 나뒹굴었다.

어쩐지 이번에도 같은 조가 되면 재밌을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좋아요! 저도 조에 끼워 주세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희 조 이름은 매지컬 레이디입니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조 이름에 동의한 적 없어요!”

일레이디아가 이젠 옆구리에 끼고 있던 종이 뭉치를 벤에플에게 휘두르며 소리쳤다.

“원하신다면 그쪽의 이름도 조에 넣어드리겠습니다.”

“매지컬 레이디, 이름 좋네요. 잘 어울려요. 조 이름도 붙이다니 흥미롭네요. 전 제이예요.”

“당신도 수긍하지 마세요!”

종이 뭉치의 타깃이 나로 바뀔까 슬쩍 물러섰다. 반응이 좋아서 오버한 나머지 엄청난 백장미 꽃다발을 안겨 준 벤에플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종종 살짝만 건드려도 반응이 커서 자꾸 건드려 보고 싶은 친구가 있기 마련이었다. 일레이디아라는 남자가 묘하게 그런 류였다.

“그럼 각자가 가진 카드를 오픈해 볼까요?”

“행동력이 빠르시군요. 여기 제 카드입니다.”

“레이디는….”

“레이디가 아니라 일레이디아입니다.”

세 장의 카드를 보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니, 이렇게 조합이 겹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내가 가진 ‘을’, 벤에플이 가진 ‘다’, 일레이디아가 가진 ‘문’, 림파와 그녀의 친구들이 가지고 있던 카드 글자와 동일했다. 글자는 총 5갠데 어떻게 또 이런 조합끼리 뭉치게 되는 거람? 혹시 우리가 만들 때 수량 확인을 제대로 안 했나? 진짜면 큰일인데.

“저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카드의 글자도 공교롭게 이 세 개였거든요. 도움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괜찮습니다. 우리 셋의 글자만 겹치지 않은 것으로도 큰 수확이지요. 매지컬 레이디의 출발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 더 말해 봐야 나만 피곤하지.”

일레이디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를 보고 비실비실 웃던 벤에플은 갑자기 손을 뻗더니 내 귓가에서 다시 한번 하얀 장미를 피워 내 건넸다.

“이건 아까 보여 줬던 마술이잖아요.”

조원은 더 모집 안 하고 갑자기 무슨 마술이람? 뭘 더 보여 주려는 걸까? 별생각 없이 장미꽃을 받아 드는 날 보던 벤에플이 어딘가를 힐끔 곁눈질을 했다.

“흠… 역시.”

“이게 끝이에요? 뭔가 장미가 비둘기로 변해서 날아간다거나 그런 건 없어요?”

“드라이어드의 힘으로 살아 움직이는 생물을 만들 순 없죠.”

“마술이 드라이어드의 힘이라는 걸 인정하시는 건가요?”

“그것보다….”

벤에플이 내게 찰싹 붙어 귓속말을 했다. 남들 시선을 신경 써야 하는 카드 오픈 때보다 더욱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혹시 대단하신 분이십니까?”

“…네?”

“아니 뭐 28번째 테라리움에 아주 긴밀한 인맥을 가지고 있다거나 신분을 숨기고 계시다거나.”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어떻게 알았지? 설마 행정 관리원인 걸 들킨 건가? 어디서 티가 난 거지?

난 평범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그게 무슨 소리세요?”

“사실 엄청 신경 쓰였는데 말이죠. 일단 레이디가 먼저 알아차린 거긴 하지만.”

벤에플이 자신의 등지고 선 뒷편을 엄지손가락으로 휙 가리켰다.

“그쪽에게 손을 댈 때마다 무시무시한 눈초리가 느껴져서 말입니다.”

벤에플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이곳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시들링이 보였다. 아니 저 자식이?

더구나 이리스와 로웰라도 아닌 척 이곳을 주시하다가 황급히 눈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티를 내면 어떡해?

“저렇게 높으신 분들이 죄다 그쪽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시험 삼아 이렇게.”

벤에플이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리더니 또 한 번 장미꽃을 만들어 냈다.

“보셨죠?”

이쪽을 주시하는 눈빛이 매서워졌다.

“마치 제 손에 있는 것이 꽃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으면 전 이미 큰일을 당했을 듯싶은데요. 레이디가 손에 든 무기를 휘두르면서도.”

“무기 아닙니다. 꽃과 종이였어요.”

“그쪽을 건들지 않던 이유가 진짜 무기에 맞아 죽을까 봐 피했던 겁니다.”

“거봐요! 당신도 꽃과 종이가 무기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잖습니까!”

“하하….”

눈치가 빠르군. 이렇게 짧은 엑스맨이 끝나는 건가.

내 정체를 기대하며 벤에플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아니지, 그러기엔 너무 아쉽지. 많이 활동하지도 못했다고.

“후, 어쩔 수 없이 말해야겠군요.”

“역시…!”

“사실 저 남자, 제 전남친이에요.”

“네?”

“정말 구질구질하긴.”

난 손가락 두 개를 펴서 내 눈과 시들링을 번갈아 가리켰다. 지금이라도 눈 돌려라. 다 들키게 생겼잖아. 내 손짓에 놀란 이리스가 재빠르게 시들링의 다리를 걷어찼다. 덕분에 시들링의 자세가 무너지며 시선이 끊겼다. 벤에플과 일레이디아가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봤을 땐 이미 이리스는 아닌 척 바르게 서 있었다. 더구나 제퍼가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젖히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는 줄 사전에 알았다면 응시하지 않았을 거예요. 저 남자 집착이 정말 심하거든요.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다시 만나 달라고 어찌나 애원하던지. 집착이 심해서 제 곁에 오는 모든 사람들을 질투했거든요.”

미안, 시들링. 하지만 네가 먼저 잘못했어.

“집착… 말입니까?”

“네, 집착이요. 그것도 아주 지독한.”

“음, 질투라면 이해가 가는군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제퍼가 시선을 끄는 틈을 타 빠르게 등 뒤로 손짓했다. 내 손짓에 이리스는 불특정 인물을 골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반복했다. 다행히 이리스는 제 잘못은 아는군.

“그냥 감시하는 게 아닐까요? 저흰 드루이드니까 좀 전의 벤에플 님처럼 드라이어드의 힘을 빌려 사고라도 칠까 봐 말이죠.”

“그런 건가요….”

“집착하는 남자는 꼴사납습니다.”

일레이디아가 안타깝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러다 슬쩍 시들링을 흘겨보는 눈이 무척이나 매서웠다.

“맞습니다. 당신이란 남자도 이제 레이디란 애칭을 받아들이세요.”

“그건 다른 문제잖아요!”

벤에플이 다시 일레이디아를 타깃 삼는 것을 보니 내 정체에 대한 의심을 그만둔 것 같았다.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 네?”

“고생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감정을 강요하는 건 정말 잘못된 일입니다. 듣기론 그건 괴롭힘에 가까워요.”

일레이디아는 괴롭힘을 말하며 벤에플을 노려봤다.

“만약 혼자 말하러 가시는 것이 어렵다면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정식으로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에게 저 남자의 처분을 요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이 님께선 합격한다면 앞으로 일할 때마다 저 남자를 마주치는 것이 껄끄럽지 않으시겠습니까?”

“레이디는 구호 활동을 하는 단체 출신이래요. 세상의 사각지대에 버려진 약자들을 구제하는 봉사를 해 왔다고 합니다. 그가 제이님을 도우려는 마음가짐은 진심이에요.”

아 쉣…. 시들링 미안. 좀 일이 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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