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넵튜누스라고? 그들이 물이 들어간 이름을 짓는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지만…. 얼마나 자랑스러우면 이름에 티를 내려고 할까? 어쨌든 미리 넵튜누스에 대한 정보를 알았기에 망정이지, 몰랐다면 대놓고 멍청한 표정을 지을 뻔했다.
“그 대단하다는 넵튜누스라니. 이거 영광이네요.”
내 말에 림파는 손을 펼쳐 아주 작은 물방울들이 맺히는 묘기를 보여 주곤 자부심이 넘치는 얼굴을 했다. 확실히 손으로 커다란 불덩이를 휙휙 뿜던 베스탈리스들에 비하면 그 능력이 미약해 보이긴 했다.
“이제 와서 저를 치터로 의심하진 않으시겠죠?”
“네네, 무려 넵튜누스인데 어찌 의심하겠나요? 조원으로 받아 주시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죠.”
내가 말하는 족족 림파의 콧대가 높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른 분들도 넵튜누스인가요?”
“실례예요. 넵튜누스를 도처에 깔린 돌멩이 같은 걸로 보시는 건가요? 얘들은 그냥 평범한 일반인들일 뿐이에요.”
자신은 급이 다르다는 것처럼 느껴지는 말투. 아주 고고한 귀족 납셨다. 불이 침범한 시대에 맞춰 어디서나 환영받는 물의 사람들이니 그 덕분에 부를 쌓기에도 좋을 테고. 부가 쌓이면 권력 커서 특권층이 되었을 것이다.
저 둘은 이렇게 거만한 아이의 비위를 맞춰 가며 같이 다니는 건가? 불쌍한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은 다르게 해석한 것인지 자신들을 소개했다.
“저는 ‘디비티에’입니다. 림파와 같은 아카데미 졸업생으로 부모님 두 분 다 황금 호박 상회 8번째 테라리움 분점의 매니저이십니다.”
“전 ‘보나’예요. 저 역시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에요. 전 아버지께서 5개 테라리움에 분점을 가지고 있는 석류 금융의 사장이세요. 조만간 20번대 테라리움에 분점을 하나 더 낼 예정이에요.”
보통 자기소개를 그런 식으로 하나? 초등학생들도 아니고 부모님 직업이 자신을 나타내다니.
안녕? 만나서 반가워. 난 누구고 우리 아빠는 의사야.
어쩐지 저 아이들이 다녔다는 2번째 테라리움의 아카데미 속 사회의 실태가 머릿속에 그려질 것 같았다.
잘난 집안의 자제들이 다니며 그 안에서 서열을 형성하고 무리를 지어 다녔겠구먼?
둘을 동정했지만 알고 보니 림파와 비슷한 부류였기에 잘 어울려 다녔던 것이다. 이제 보니 우리 테라리움에 그저 연습 삼아 지원해 봤다는 말도 이해가 갈 것 같았다. 굳이 우리 테라리움에 채용되지 않더라도 잘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일이라도 해 보려고 나섰다는 것이 기특하다고 여겨야 할지.
“전 그냥 다이아가 좀 많은 평범한 드루이드예요. 자수성가한 타입이고요.”
“네, 뭐 그렇겠죠.”
림파를 따라 아이들이 내 차림을 훑는다. 내가 입은 초라한 초보자 장비 세트가 영 못마땅한지 표정을 굳힌다. 하지만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기꺼이 참는다는 듯 별말은 하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당신이 가진 카드의 글자를 알려 주세요.”
내가 가진 카드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이런. 보나가 가진 것과 같아.”
“우린 이런 카드를 가지고 있어요. 당신의 글자가 달랐다면 더 확실했을 텐데 어쩔 수 없죠.”
각자 자신이 가진 카드를 내게 보여 주었다. 카드엔 ‘문’, ‘을’, ‘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용케 셋 다 글자가 다른 카드를 가지고 있었네.
“이미 답을 알겠다고 하셨는데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그래요. 이쪽으로.”
림파는 날 사람들이 없는 구석진 곳으로 이끌었다.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해 줄 필요가 있나요? 보나, 망 좀 봐.”
림파의 명령 어투에도 보나는 항의 없이 우리에게 등을 돌린 채 주변을 경계했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친구라기엔 묘하게 상사와 부하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에겐 ‘문’, ‘을’, ‘다’라는 카드가 있죠. 필요한 글자는 다 나왔어요. 이건 머리 좀 굴려서 조합하면 나오는 답이에요.”
과연 림파는 정확한 답을 맞힐 수 있을까?
“정답은 ‘질문을 한다’예요. 다섯 명이 전부 저 행정 관리원에게 질문만 하면 통과할 수 있는 거죠. 아무 질문이나 상관없이 물어보기만 하면 될 거예요.”
“오호… 그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요? 와, 정말 머리 잘 굴린다.”
“2번째 아카데미 졸업생이라면 이 정도는 쉽죠. 그러니 나머지 한 명을 빨리 구해서 2차 시험 1등을 하러 가요.”
말을 마친 림파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응시자들을 둘러보았다. 마치 겨우 이 정도로 절절매는 중이냐며 얕보는 것 같은 눈치였다. 그러다 어딘가를 바라본 그녀의 표정이 와그작 구겨졌다.
이리스의 주위로 이미 조를 이룬 것인지 5명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들은 나서서 자기소개를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중 목장을 운영했다던 세페스도 함께 껴 있었다.
“말도 안 돼. 벌써?”
이리스와 짧게 이야기를 끝마친 5명의 사람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을 나가 버렸다. 시험의 답을 알아낸 것이다. 중도 포기를 하고 나갔다기엔 그들의 걸음걸이가 아주 당당했다.
“이야, 꽤 빨리 풀었네.”
좀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모래시계의 모래가 바닥을 채우기도 전에 합격자가 나와 버렸잖아?
바로 옆에서 이를 바득바득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림파는 매서운 눈으로 응시자들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내가 빨리 사람을 모으자고 했잖아!”
버럭 터져 나온 노성에 잠깐 동안 주위의 모두가 우리를 돌아보았다. 림파는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디비티에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네가 꾸물거리는 바람에 1등을 놓쳤잖아!”
“그렇지만 분명 네가 확실히 치터가 아닐 만한 사람으로 골라야 한다고….”
주근깨가 가득한 소년은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림파의 분노를 모두 받아 냈다.
“그래서 내 잘못이란 거야? 내가 답을 알아낼 동안 너흰 뭐 했는데? 나서서 사람들을 섭외해 보거나 말이라도 섞어 봤어야 할 거 아니야!”
“미… 미안해.”
디비티에가 온전히 림파의 화를 뒤집어쓰는 동안 보나는 말리긴커녕 불똥이 튈까 봐 모른 척 등을 돌렸다.
“이렇게 답답하고 멍청하게 행동하니까 그런 불길한 녀석의 밑 등수에서나 설설 기지.”
불길한 녀석? 설마 미미르를 말하는 건가?
“내가 부모님들 사업만 아니었으면 너희같이 성적도 안 나오는 모자란 녀석들을 데리고 다녀줄 것 같아?”
“지… 지금이라도 얼른 사람을 구해 올게!”
“됐어! 정말이지 도움도 안 되는 녀석들이야.”
와, 저렇게 대놓고 안하무인인 사람은 또 처음이라 부정적인 감정보다 감탄이 앞섰다. 친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업신여기다니. 대체 어떤 환경에서 어떤 가정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면….
세 명 사이에서 묘하게 서열이 느껴진다 했더니 제 소개를 부모님의 직업으로 하는 아이들답게 부모님들끼리의 이해관계가 엮여 그렇게 됐나 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만하는 게 어떨까요? 이 시험에서 등수에 따라 보너스를 준다고 명시한 것도 아니고 합격만 하면 되는 일이잖아요. 오히려 이런 식으로 남들의 이목을 끄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네요. 빨리 다른 사람을 구해서 합격이라도 노려보는 건 어때요?”
어른의 입장에서 이를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중재를 했다. 하지만 오히려 무엇이 림파의 성질을 자극했는지 날 돌아보는 눈이 매서웠다.
“그래요, 당신. 당신도 책임이 있어요.”
이걸 내게 화살을 돌린다고?
“당신이 굳이 설명해 달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사람을 하나 더 빨리 구할 수도 있었어요. 어차피 사람이 다 모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건데 당신 때문에 시간을 허비했잖아요.”
내가 연장자라는 걸 알아서인지 아니면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인지, 제 친구들에게 대할 때만큼 험하게 굴지 않았다.
“정말 자연스럽게 남을 탓하네요.”
림파는 내 말을 가뿐하게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1등은 물 건너갔으니 당신과의 볼일도 이제 끝이에요.”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당신을 껴 준 건 빨리 1등을 하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굳이 당신을 합격까지 데려가 줄 의무는 없어요. 난 좀 더 똑똑하고 수준 높은 엘리트들이 내 동료이길 원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시간을 두고 다른 좋은 사람들을 물색하겠어요.”
제이 님은 우리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더니.
얘, 언제는 내가 치터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어서 안전하다며? 그런데 나 같은 안전빵을 버릴 정도라고?
혹시 이 아이 흥분하면 생각이 좀 단순해지나?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긴 한데.
“그래, 림파. 네 말처럼 시간을 두고 수준 높은 사람들을 찾아보자.”
디비티에가 황급히 림파에게 알랑거렸다.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전 이미 당신에게 시험의 답도 알려 줬잖아요. 오히려 고맙게 여기세요.”
‘뭐해, 어서 가지 않고?’, 날 바라보는 림파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린 게 까불어.
“아, 생각 좀 하고 있었어요. 과연 정말 당신이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지.”
“지금 제가 불합격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림파, 저런 말 신경 쓰지 마. 조에 끼워 주지 않았다고 화풀이하는 거야.”
“당신! 림파가 답도 알려 줬는데 그렇게 무례하게 굴 건가요?”
조용히 있던 보나가 이때다 싶었는지 림파의 눈치를 보며 말을 얹었다.
“여긴 학교가 아니에요. 거기선 그렇게 행동해도 됐을지 몰라도 직장 사회는 모난 아이도 포용해 주며 바로잡아 줘야 하는 교실과 달라요. 그런 의무도 없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시작도 전에 걸러 내죠. 당신은 걸러질 거예요.”
“당신! 림파에게 사과하세요!”
“동료를 물색한다고 했죠?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들도 동료를 물색하고 있어요. 합격한다면 함께 직장에서 일할 동료를 말이죠. 하지만 다들 당신을 동료로 맞아 줄지는 의문이네요. 답을 안다고요? 하지만 답만 알면 뭐 해요? 합격의 첫 번째 조건인 조원 5명을 채울 수 없을 텐데.”
림파가 이를 바득바득 갈기 시작했다. 더 상대해 주기엔 피곤해질 것 같아서 그대로 등을 돌려 자리를 빠져나왔다. 등 뒤로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긴 하지만 그럴수록 아이의 이미지만 나빠질 뿐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림파가 정말 합격하면 어디에 써먹는담? 정당하게 답을 풀어 합격한 애를 대놓고 퇴짜 놓기엔 말이 나오지 않으려나?
“요즘 어린 애들은 참 맹랑하죠?”
그때 고민하고 있는 내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