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모두가 PR에 동참하게 되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소개할 건 뭐가 있지?
저는 엄격한 어머니와 자상한 아버지 밑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나 집안을 빛낼 귀재라는 칭송을 받고 자랐으며, 이에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고 항상 학급에서도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 친구들은 물론 담임 선생님께도 좋은 학생으로 각인되었습니다.
저를 뽑아만 주신다면 귀사에 뼈를 묻고….
아니면…. 엄격하지만 제겐 한없이 자상한 메스키트와 사랑스럽고 밝은 데이지와 함께 다이아 군식구나 다름없는 엘더를 장성할 만큼 키우고 있는….
“그래서 사실 거예요, 아니면 파실 거예요?”
헛생각을 하다 보니 웃겨서 나도 모르게 실실대고 있는데 카드 장사꾼이 내게 물었다.
“흠, 파는 건 싫고 글자를 한번 사 볼게요. 얼마면 돼요?”
“10다이아만 주세요.”
“겨우 글자 알려 주는 정도로 10다이아를 받는 거면 카드는 대체 얼마에 판 거예요?”
“사 간 사람이 절박한 정도에 달렸죠.”
“절박한 사람 등쳐 먹는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다이아로 세상 쉽게 살려는 마음가짐이 문제죠.”
아니, 당신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이 사람 정말 생각했던 것보다 멘탈이 장난 아닌데?
그리고 다이아로 세상을 얼마나 쉽게 살 수 있는데요. 뉴비도 행정 관리원이 될 수 있다고요.
카드 장사꾼에게 10개의 다이아를 나눠서 꺼내 건네주자 귓속말로 자신이 판 카드의 글자를 알려 주었다.
“보기보다 다이아가 많으신가 봐요? 깎을 생각 없이 바로 사시는 걸 보니. 좋은 고객이 되실 수도 있겠어요. 제가 판 글자는 ‘비’예요.”
“아하….”
와, 순 사기꾼 새끼가 따로 없네. 어이없게도 길드원들과 제작했던 카드 중 ‘비’라는 글자를 써넣은 카드는 없었다.
하지만 사기라고 알고 있는 것은 나뿐이기 때문에 장사꾼을 사기꾼이라고 몰며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오히려 말하면 내 정체가 들통날 판이다.
이거 행정 관리원으로서 돈놀이하려는 걸 막아야 하는 거 아닐까?
그때였다. 갑자기 홀 안에 세찬 바람이 불어와 사람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눈이 질끈 감길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었다. 동시에 공중은 물론 사방에서 새하얀 종잇조각들이 나풀나풀 흩날렸다. 홀의 바닥에 눈처럼 쌓일 정도로 종이의 수가 장난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드라이어드의 기술에 놀란 길드원들이 매서운 눈을 하며 주인 되는 드루이드를 찾았다.
하지만 의외로 주인은 자신이 먼저 손을 들어 자백했다. 그 옆엔 일의 주범으로 추정되는 드라이어드들이 서 있었다. 그중 광대 복장을 하고 볼에 눈물 문신을 그린 드라이어드가 유독 눈에 띄었다.
“공격 의사는 없었습니다. 그저 드라이어드의 힘을 수단으로 사용했을 뿐입니다. 바람의 강도는 그저 이목을 끌고 혼란을 주기 위해 조절했으나 만약 다치신 분이 있다면 정중하게 사과드리겠습니다.”
“신체적 해를 끼치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요?”
이리스가 공격적인 어투로 쏘아붙였다.
“말씀드렸다시피 공격 의사는 정말 전혀 없었습니다.”
“…다친 사람이 없는 듯하니 이번은 넘어가겠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공격으로 추정되는 기술을 사용할 경우, 강제 퇴장당하실 수도 있는 점 유의하세요.”
“주의하겠습니다.”
나풀거리며 소매가 긴 화려한 롱코트를 입은 여성은 마치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신사의 인사를 했다. 한 손은 가슴께에 다른 손은 등에 대고 몸을 앞으로 쭉 빼며 허리를 숙였다.
뭔진 몰라도 직업이 쇼맨십을 보이는 것과 관련된 사람 같았다. 아니면 심한 관종이거나.
홀을 더럽힌 종이의 정체가 궁금해 한 장 집어 들었다. 그건 놀랍게도 글자가 적힌 카드였다. 그것도 지급된 것과 아주 똑같았다.
아무리 시간이 촉박해 급하게 만들어 낸 카드라고 하지만 종이 재질과 크기, 글씨 색깔과 작게 찍힌 도장까지 똑같을 줄이야. 돈으로 치면 위조지폐나 다름없는 카드가 사방에 나뒹굴고 있었다.
길드원들 역시 바닥에 떨어진 걸 주워 확인하고는 놀란 눈을 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우리가 지급한 카드와 다른 점이 있다면 글자였다. 온갖 글자가 죄다 적혀 있었는데 카드 장사꾼이 사기를 쳤던 것처럼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글자들이었다.
그중 ‘풉’, ‘켁’, ‘헿’ 등 마치 카드를 주운 사람을 놀리려는 의도를 담은 것처럼 장난스러운 글자도 있었다.
“이게 설마 드라이어드의 능력인가요?”
누군가의 질문에 말썽을 일으킨 드루이드는 아무것도 없는 손안에서 여러 장의 동일한 카드를 만들어 내더니 허공으로 뿌리며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다.
마술인가? 엄청 신기하긴 한데…. 하지만 내 생각엔 말이죠… 이 종이 누가 다 치우라고….
“저는 본래 테라리움들을 유랑하며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마술쇼를 열던 마술사 ‘벤에플’입니다.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저 수많은 카드들은… 기업 비밀이긴 하지만 제 드라이어드들의 능력으로 흉내 낸 가짜이죠. 현재 시험장에서 카드를 다이아로 팔고, 특정 몇 명이 카드 정보를 독점해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상황을 알게 되자 참을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돌려 카드 장사꾼이 서 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전 유랑하던 생활을 청산하고 한 테라리움에 머물며 저와 같은 마술사들을 모아 거대한 쇼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위해선 과수원에 소속되어 테라리움 각지에 퍼진 마술사들을 섭외하고 쇼를 벌일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정책을 추진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정책을 추진할 사람은 마술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요. 그렇기에 전 28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에서 사람을 모집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웬 미꾸라지 한 마리가 판을 흐리고 있으니….”
그녀의 말에 카드 장사꾼은 울컥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당당한 얼굴이 되었다. 시험장에서 대놓고 장사판을 벌이던 사람이니 겨우 모욕을 주는 정도론 멘탈이 흔들리진 않는다는 뜻이었다.
“자, 이제 가짜 카드들이 손만 뻗으면 쥘 수 있는 곳에 퍼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기가 이미 쥐고 있는 카드가 아니면 믿을 수 없게 되었지요. 다이아로 카드를 샀다고요? 하지만 그것이 진짜일지 가짜일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이를 위조하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쉬운 일이랍니다. 그러니 정직하게 시험에 임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글자가 5개 모여야 합격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각기 다른 정확한 글자를 가진 사람 5명이 모여야 가능하다. 바닥에 떨어진 카드의 글자들 중 가짜를 구분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토리도 있고 꽤나 화려한 쇼였기에 벤에플의 말이 끝나자 다들 작게 손뼉을 쳐 주었다.
“이거 다 누가 치울 건디? 가구 밑으로도 장난 아니게 들어간 것 같은디.”
“제퍼가 치우자.”
“왜 또 난데?
헤르마가 볼멘소리로 바닥을 보며 불만을 내뱉자 벤에플은 머리를 긁으며 허리를 연신 숙였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지속 시간은 짧지 않아서 몇 시간 뒤면 모두 사라질 겁니다….”
카드 장사꾼은 바닥의 종이를 몇 장 집어 들더니 아쉬운 얼굴을 했다. 이제 돈벌이가 끊겼기 때문이다.
나도 그녀를 떠나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소동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자기소개가 다시금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기요.”
이제 뭘 해 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날 불렀다. 돌아보니 놀랍게도 미미르에 대해 이야기하던 아이들이었다.
같은 아카데미 출신으로 추정되는 세 명은 이미 함께 조를 이뤘는지 나란히 서 있었다. 여자 둘과 남자 하나, 그중 미미르에 대해 가장 험한 말을 하던 여자아이가 내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저희와 함께 조를 하시는 게 어때요?”
“음, 아직 조원을 구하고 있긴 한데…. 전 치터로 의심되지 않나요?”
나와 마주 선 여자아이의 눈치를 보는 둘을 보자니 셋 중 이 아이의 영향력이 제일 센가 보구나.
“아까 저 사람에게 다이아를 건네는 걸 봤어요.”
그녀가 카드 장사꾼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봤구나. 하지만 이젠 소용없어지긴 했죠. 제게 거짓된 정보를 팔았을 수도 있으니까.”
“그걸 보고 어쩌면 치터가 아닐 거란 생각을 했거든요. 어차피 불합격이 확정된 치터가 굳이 다이아를 주고 정보를 살 리 없잖아요? 솔직히 전 좀 더 현명한 사람과 함께 동료가 되고 싶었지만.”
내 행동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대놓고 까면 어떡하니?
“당장은 합격이 먼저니 제 기준에 맞지 않더라도 안전한 인물로 인원수를 채우면 낫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제가 가진 카드의 글자가 세 분과 겹칠 수도 있는데요?”
“뭐, 안 겹치면 좋겠지만 겹쳐도 상관없어요. 전 이미 실마리를 푼 것 같거든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오… 겨우 세 명으로 실마리를 풀었다? 똑똑한데.
“그러니 답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빨리 인원수를 채워서 가장 먼저 시험에 합격한 조가 되고 싶은 거예요. 1차 시험의 1등은 아쉽게 놓쳤지만 2차 시험에서 1등을 하면 위에서도 좋게 봐주지 않을까요?”
그녀는 이리스를 열망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존경이 담겨 있는 눈빛 같았다. 그러다 그곳의 끝에 선 미미르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저흰 2번째 테라리움에서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한 동기들이에요. 솔직히 저희 정도 되면 더 앞 번호의 과수원을 노릴 수 있으니 28번째 테라리움은 연습 삼아 채용 시험에 응시했거든요.”
“그거 여기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쁘지 않을까요?”
왜냐면 내가 지금 그렇거든. 이 조막만 한 꼬맹이들이….
“하지만 직접 와서 보니 28번째 테라리움은 대단한 곳이고 기회의 땅이라는 생각이 앞서더라고요. 테라리움에 와서 겪어 보니 모든 사람들이 뭐든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에 차서 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었어요. 테라리움이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다이아가 많은지, 한 자릿수 테라리움들에 비해 시설이나 건물은 궁핍해 보이지만 생활 자체는 아주 풍요로워 보였거든요. 그런 테라리움의 과수원에 취직하게 되면 뭐든 부담 없이 해 볼 수 있으니 제 이름을 걸고 대단한 정책들을 추진해 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거 아니에요? 또 이번에 합격하면 무려 초창기 멤버가 되는 거잖아요? 나중에 앞 번호의 테라리움을 노려볼 때도 좋은 경력이 될 거란 말이지요.”
“28번째 테라리움 과수원 직원이 되는 걸 그저 경력으로만 활용하시려고요?”
“뭐… 받는 다이아가 많다면 계속 있겠지만. 어쨌든 처음엔 연습 삼아 한 거였어도 지금은 시험에 꼭 합격하고 싶어요. 그러니 빨리 조원을 모아야 해요.”
얘네랑 같이 다니면 재밌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게 엑스맨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좋아요. 전 제이예요.”
“전 ‘림파’예요. 맑은 샘물이란 뜻의 이름이죠. 물이 들어간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으시겠죠? 전 넵튜누스랍니다.”
그녀는 자부심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