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4화 (254/604)

모래시계의 모래는 흐르기 시작했지만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눈치를 보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101명 중 1명밖에 없는 단 하나의 꽝을 피해 갈 확률이 훨씬 높은데도, 고르면 재도전 없이 바로 탈락이라는 페널티가 너무 컸던 것이다.

움직임을 보인 곳은 시험에서 1등을 받았던 사람 쪽이었다. 검증된 안전한 인물, 다들 그와 한 조가 되고 싶어 했다. 구경할 겸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미 조를 이루고 싶은 사람들을 생각해 둔 상태입니다.”

이미 많은 제의를 받은 것인지 1등은 거절 의사를 말하고 있었다.

“저는 일단 5위권에 든 분들과 먼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제가 시험 5등까지 든 분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거든요.”

이 상황에서 등수를 기억해 안전빵이라 생각하고 접선을 먼저 시도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었다. 꽤 기발한 생각이긴 하지만….

“치터가 상위권이 아니란 보장이 있나요?”

누군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부정한 방법을 써서 시험에 합격했는데, 만약 커닝을 했다면 훨씬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도 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행정 관리원은 분명 알고는 있지만 이를 묵인하고 있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1등도 마냥 보장된 안전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 거고요.”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그 말에 다른 응시자들보다 비교적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던 1등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맞아, 그러고 보니 꼭 치트가 5등 안에 없으리란 보장도 없잖아?”

“제가 부정한 방법을 써서 1등을 차지했단 말인 겁니까!”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당신이 같은 조원으로 맞이하기에 100% 안전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마치 마피아 게임을 보는 것 같았다. 게임이 끝나기 전까지 확실한 시민 판정을 받았다고 해도 끝까지 의심을 해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치터가 있다면 어차피 불합격인데 지금 나오세요! 당신 한 명이 자수하면 100명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닙니까?”

억울하게 치터일 수도 있다는 누명을 쓰게 된 1등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나올 리 없었다.

“자기 스스로 나올까요? 부정한 방법을 써서 여기 편승한 치터예요. 어쩌면 무언가 이득이 있기 때문에 들켰어도 계속 있는 거 아닐까요? 다이아를 받았다거나.”

“누군가를 떨어뜨리라고 사주를 받은 게 아닐까요?”

“확실히… 연기를 하며 접근해서 같은 조만 이루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탈락이니까….”

별다른 변수 없이 시험이 조용히 흘러가면 중간에 나나 길드원들이 개입할 여지도 남겨 두었는데, 상황은 갈수록 흥미롭게 흘러갔다. 마피아 게임으로 치자면, 아직 밤이 오지도 않았는데 첫날 아침부터 아무런 단서 없이 서로를 쥐 잡듯 잡는 상황이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전 1등분과 한 조를 이루고 싶군요. 만약 치터라면 1등 후 무리해서 이목을 끄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최상위권이 아닌 적당히 의심받지 않는 등수에 머물며 자신을 숨기겠죠. 그래서 말인데, 전 3등입니다. 저와 함께 조를 이루지 않으시겠습니까?”

1등을 두둔하는 사람이 나타나자 다시 한번 여론이 바뀌었다.

“음, 저쪽은 저런 식으로 조를 이룰 것 같네….”

초반에 1등이 5등까지의 사람을 모아 조를 이루려고 했던 것처럼, 상위권 등수인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조를 이루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쩐지 머뭇거리는 1등의 모습을 뒤로 하고, 나도 슬슬 사람들에게 접선해 보려고 자리를 옮겼다.

홀로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보려고 했는데, 아직 다들 상황을 보고 판단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경계가 심했다. 내가 접근하기만 해도 수상한 눈치를 보내길래 머쓱하게 걷던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상위권 무리 외의 다른 사람들이 고착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자 다시 한번 변동이 일어났다.

“신성한 시험장에서 이래도 되는 거야?”

“머리가 좋다고 해야 할지….”

불만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시험 방식 때문에 제기한 불만인가 싶어서 뜨끔했었다.

한두 명에게서 시작한 불만은, 이제 굳이 내가 찾아 듣지 않아도 여기저기 퍼져 나가고 있었다.

“나 원 참, 그런 방식으로 통과한다고 해도….”

“그럴 거면 뭐하러 과수원 직원을 하려는 거야?”

“좋은 방법 같기도 한데.”

듣다 보니 묘하게 시험을 까기보단 특정 인물을 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기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하던 한 사람에게 접근했다.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는데 무슨 일인가요?”

내 차림을 훑는 눈빛을 보았다. 하지만 대놓고 이를 표하는 기색 없이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낯으로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자기가 가진 카드를 다이아를 받고 팔겠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네? 다이아를 받고 팔아요?”

“그것도 가격을 먼저 제시하라고 하더라고요. 더 높은 가격에 팔겠다는 거죠. 자칫 잘못하다간 탈락할 위험을 안느니 차라리 돈이라도 벌겠다는 생각이라고 했어요.”

“와….”

이 와중에 장사를 해 먹는다고?

“상인으론 꽤 비상한 판단 같은데 과수원 직원으론 맞지 않는 것 같네요. 돈에 정보를 팔아넘기는 사람에게 어떻게 믿고 테라리움에서 가장 중요한 곳에서 일을 시키겠어요?”

내 솔직한 심정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렇죠. 다이아로 카드를 사고팔아선 안 된다는 룰이 없긴 하지만. 조금 그렇네요.”

“누군지 알려 주시겠어요?”

“왜요? 혹시 다이아로 살 마음이 있으세요? 전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똑같다는 생각인데.”

“얼굴이라도 익혀 두게요.”

어떻게 운 좋게 합격하더라도 절대 채용하지 말아야지. 그 사람은 카드를 팔겠다는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알려 주었다. 길드원들의 눈이 닿지 않는 으슥한 곳에 팔짱을 낀 문제의 사람이 있었다.

내가 곧장 그 방향으로 가자 등 뒤에서 혀를 쯧쯧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소유한 카드를 다이아를 받고 팔고 계신다면서요?”

“아, 좀 늦으셨네요. 이미 팔았어요.”

“네? 사 간 사람이 있다고요?”

“뭐, 사람을 믿기 힘들다면 정보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심정이겠죠.”

그걸 또 사 갔다고?

“그래서 말인데 제가 팔았던 카드의 글자가 무엇인지 알려드릴까요? 싸게 알려 드릴게요.”

“카드를 팔았는데 글자도 파신다고요?”

“카드를 팔았지, 제가 비밀을 엄수하겠다는 조건을 걸고 판 것도 아닌데요, 뭐.”

하긴 카드는 단순 시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힌트를 담은 종이일 뿐, 카드에 적힌 글자가 중요했다.

이렇게 돈벌이를 해 먹다니….

“아니면 가진 카드를 제게 파실 생각은 없으세요? 이건 비싸게 쳐 드릴게요.”

“또 되파시게요?”

“당연하죠.”

이 사람은 시험을 보러 온 거야, 장사를 하러 온 거야?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블루 오션을 개척하고 있는 모습에 감탄이 나왔다. 직원 채용은 물 건너갔다 하더라도 다른 분야에선 일을 참 잘할 것 같은데.

그때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누군가가 빠른 걸음으로 이리스에게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이 이리스에게 무어라 말하더니 우릴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 보였다. 고발이었다. 홀로 불만만 토로하던 사람들과 달리 아예 윗선에 부정하다 생각하는 일을 일러 버린 것이었다.

“정도에서 벗어난 방법이긴 하지만.”

이리스가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며 모든 이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난 이리스에게 내버려 두란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장 안에서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벌이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저희는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습니다. 같은 응시자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한에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묵인하겠습니다.”

“다이아로 카드를 사고파는 행위도 내버려 두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저희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조를 이뤄 함께 합격한다는 의미는 훗날 과수원에서 동료가 되어 함께 일을 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같이 일하고 싶은 직원 정도는 각자가 알아서 판단하겠죠.”

다이아로 카드를 판 내 옆의 사람도 조건이 된다면 합격은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이 사람과 같은 직장 동료가 되고 싶어 할까?

이 자리는 내가 응시자들의 인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응시자들 역시 다른 이들의 인성을 확인할 수도 있는 자리였다. 자신의 손으로 같이 일하고 싶은 동료를 뽑을 수 있는 자리나 다름없었다.

“응시자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선이라면 어느 정도인가요?”

“폭력을 행사해 신체나 정신에 해를 가하는 정도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무력을 행사해 같은 응시자들을 때려눕히거나 협박해 카드를 뺏을 것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폭력만 행사하지 않으면 되는 건가요?”

이리스가 끄덕이자 질문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팔을 들었다. 그의 왼팔엔 테라리움 아티팩트가 장착되어 있었다. 드루이드였군. 아티팩트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오며 드라이어드가 나타났다.

그 드루이드는 경계하는 사람들에게 두 손바닥을 보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안심하세요. 드라이어드로 공격을 하진 않을 겁니다. 그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 제가 가진 특기를 살리려는 것뿐이니까요.”

그 드루이드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아티팩트에서 드라이어드를 꺼내는 사람들이 보였다.

역시나 일반인들만 시험에 응시했을 리가 없었다. 다른 테라리움의 과수원들에서도 직원인 드루이드를 많이 보았으니까. 오히려 드루이드들이 지원을 해 주면 나야 좋지.

“모두 여기를 주목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전 세페스라고 합니다.”

드라이어드들의 등장에 잔뜩 긴장한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제 소개를 해 볼까 합니다. 전 58번째 테라리움에서 목장을 운영하다 이번에 목장을 모두 처분하고 더 높은 테라리움으로의 진출을 위해 시험에 응시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세페스 농장의 브랜드명이 붙은 양젖, 고기, 털실, 가축용 사료를 접해 보신 분들이 있으실까요? 제 이름을 걸고 판 상품들은 항상 정직한 품질과 가격을 약속했습니다. 제 평생 모토가 정직인 만큼 하자 있는 상품을 속여 시장에 내놓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며, 1차 필기시험 역시 정직하게 응시해 걸맞은 등수를 얻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제 농장에서 판 물건을 사용해 보신 적 있으신 분이 계시다면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상품만큼 정직한 절 믿고 저를 조원으로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상황에 따라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저 사람에게 있는 것 같았다.

드라이어드를 부릴 수 있는 드루이드의 대단한 능력 앞에 굴하지 않고 놀랍게도 자신을 PR하며, 자신이 치터가 아니라는 것을 홍보하고 있었다.

시험 초반에 다들 남을 믿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에 반해 아예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임을 내세우며 조원으로 뽑고 싶게 만들려는 작전이라니. 방식이 꽤 훌륭해서 절로 흐뭇해졌다.

“저… 저는 어렸을 때부터 과수원 직원을 꿈꿔 오며 12번째 테라리움의 아카데미에서 관련 과정을 수료한 왈룸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세페스를 시작으로 그녀의 방식이 효과적일 거라 생각해 동참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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