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3화 (253/604)

1번째 테라리움의 중앙 행정 관리부 사람들을 맞이했을 때와 같이, 정장을 맞춰 입은 길드원들은 저마다 큰 상자를 안고 있었다. 의상을 통일한 것과 다르게 길드원들의 텐션은 제각각이었다.

길드의 첫 공식 행사에 참여한다는 기대로 설레서 잠이 오지 않는다던 로웰라는, 정말 밤을 새웠는지 조금 충혈된 눈을 하고도 내부의 설렘을 가득 억눌러 담은 것처럼 벅차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반면 헤르마는 죽을상을 하고 있어서 이런 일을 시킨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제퍼는 수시로 홀 안의 특정 사람들을 상대로 눈을 찡긋거리고 있었는데, 아마 그에게 뇌물을 찔러 넣으려다 된통 걸린 사람들일 거로 추정되었다.

이런 일이 어색한 것인지 큰 덩치를 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시들링은 따로 놓고 본다면 거대한 상자를 든 석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28번째 테라리움의 과수원 직원 채용에 응시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이리스의 시원시원한 목소리가 홀을 울렸다. 모두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집중했다.

“응시해 주신 모든 분들껜 소정의 교통비와 웰컴 기프트가 함께 지급될 예정입니다.”

그 말에 기대에 찬 미약한 환호가 홀을 휩쓸었다. 웰컴 기프트는 황금 호박 상회 측에서 제안한 것이었다. 시험에 불합격해 돌아가더라도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하기에 군말 없이 결제했다.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챙겨 줘서 매니저 직급이 아니라면 내 보좌관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전에 시험 등수에 따라 부여된 응시 번호 순서대로 나와 여기 저희들이 들고 있는 상자 속에서 선물을 가져가세요.”

저 안에 든 내용물을 아는 나와 다르게 홀 안의 모든 이들은 기대하는 눈으로 상자를 바라보았다.

웰컴 기프트를 주겠다고 했으니 상자 안에 든 것이 그것일 거라 짐작하는 듯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리스의 말을 시작으로 누군가 당당한 걸음으로 그녀 앞에 섰다. 이번 시험 1등인 사람이었다. 모두들 부러운 눈빛으로 1등을 바라보았다.

듣기론 1등은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자였다. 시험 문제를 반으로 나눴다고 해도 까다로운 파필리온은 꽤 난이도가 높은 문제를 채용해 사용하고 있었다. 등수가 갈릴 수 있었던 것도 문제가 어려운 덕택이었지.

시험장이 부족할 것을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태에서 문제 수까지 반으로 나눴는데, 난이도마저 쉬웠다면 참으로 난감했을 것이다.

선두로 나선 사람은 이리스가 들고 있는 상자에서 까만 천과 금줄로 만들어진 주머니를 꺼냈다. 덜 자란 수박만 한 사이즈의 주머니는 다른 이들이 보기엔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할 수 없게 보였다.

케이스를 더 고급스럽게 제작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촉박했고, 결국 빨리 만들 수 있는 주머니 형태를 채택한 것이었다.

받자마자 줄을 풀려는 그를 이리스가 만류했다.

“주머니에는 다이아, 웰컴 기프트 외에도 이번 2차 시험에서 사용할 중요한 물품이 들어 있으니 가급적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열어 보시길 권할게요.”

그 말에 그가 주머니를 풀려다 말고 급히 품에 숨기고 자리를 빠져나간다.

중요한 물품이 있다는 말에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2차 시험이 어떻게 진행될 것이란 안내는 조금도 나간 적이 없었다.

“한 분씩 받기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니 여기 상자를 든 7명 앞에 각자 줄을 서서 가져가시는 걸로 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조금 급한 걸음으로 줄을 서고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는 몸놀림으로 상자에서 주머니를 꺼내 갔다.

이리스나 로웰라의 앞의 줄은 꽤 긴 반면 시들링 쪽은 줄이 한산한 것이 보여, 난 그쪽으로 줄을 서 주머니를 받았다. 얼핏 시들링에게서 반가운 눈빛을 본 것 같았다.

미미르의 이야기를 하던 요주의 청소년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더니 미미르 앞에 줄을 서는 것을 택했다. 그들을 본 미미르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 가는 것이 보였다.

괴롭히던 아이에게 굳이 접근하다니. 미미르의 저런 반응을 보기 위해 의도한 걸로 느껴져 정말 영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이들이 상자 안의 내용물을 가져가자 빈 상자들은 차곡차곡 쌓여 노토스에게로 넘어갔다.

이리스는 손을 털고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주머니 속 내용물을 확인하셨나요?”

나도 대충 사람들이 없는 곳에 자리를 잡고 주머니 매듭을 풀었다.

주머니 속엔 10개의 다이아와 좋은 향기를 풍기는 입욕제, 고급스러운 티백 한 상자, 소분한 쿠키 봉지 그리고 황금 호박 상회 물품 구매 시 10%를 할인해 주는 쿠폰이 함께 들어 있었다.

웰컴 기프트를 통해 자신들의 홍보 용품을 끼워 넣다니. 그래도 급하게 준비한 것치고 꽤 그럴싸한 상품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어 있는 건 2차 시험에 사용될 중요한 물건, 카드 한 장이었다.

내가 가진 카드엔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단 한 글자, ‘을’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역시 길드원들이 달라붙어 쓰고 오려서 급하게 만든 카드였다.

만약 웰컴 기프트에 포함되지 않았더라면 꽤 허술한 카드 형태에 많이들 실망했을 수도 있기에 선물과 함께 제공되어서 다행이었다.

홀 안의 모든 응시자들은 나처럼 단 한 글자가 쓰인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글자는 제각각 달랐다. 나처럼 ‘을’이 적힌 카드를 받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글자를 받았거나.

“받으신 물품 중 카드는 2차 시험의 합격과 연관된 중요 물품입니다. 각기 다른 5장의 카드를 모으면 합격에 관련된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으며 여러분들은 자신을 제외하고 나머지 4명을 찾아 함께 조를 이루시면 됩니다. 물론 어떻게 조를 이룰지 저희는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리스가 2차 시험에 대해 설명하자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단순히 면접을 생각했을 텐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해괴한 시험의 등장에 머리가 꽤나 아파 올 터였다.

“하지만 이 시험에는 단 한 가지 중요한 룰이 있습니다.”

이리스는 짐짓 진지한 얼굴과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홀 안의 응시자 중에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시험을 통과한 한 명이 있습니다. 현재 이곳엔 100명이 아닌 101명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일부러 그 사람의 자격을 박탈하지 않고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그 말에 다들 더 크게 웅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도 놀란 척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리스의 말은 물론 거짓말이다. 우린 정확히 100명을 뽑았으며, 나머지 한 명은 나를 뜻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험 응시자들이 동요하도록 없는 말을 한 것이다.

“이 시험을 통해 저흰 여러분의 분별력도 볼 예정입니다. 테라리움의 주요 업무를 다루는 과수원은 외부 스파이가 침투할 경우 무척 치명적이죠. 만약 시험에 합격해 과수원에서 일하게 될 분들은 항상 주의를 기울이며 스파이를 분별해 낼 수 있으셔야 할 겁니다. 즉, 조를 이뤘을 때 그 조에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시험을 통과한 치터(cheater)가 끼어 있을 경우, 그 조의 모든 분들은 시험을 푼 여부와 관계없이 행정 관리원인 저의 권한으로 모두 불합격 처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저 사람이 행정 관리원이었어?”

공통된 반응을 보이는 무리들이 있었다. 다들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을 행정 관리원이라 착각하고 접근했던 자들이었다. 이리스가 행정 관리원 행세를 하는 것 역시 사전에 조율된 이야기였다.

“다시 한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응시자 여러분께선 각기 다른 5장의 카드를 모을 경우 시험 합격에 대한 정확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카드의 내용이 다른 5명의 사람들과 조를 이룬 후,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하지만 정확한 힌트 없이 문제를 풀 자신이 있다면 카드에 상관없이 5명으로 조를 이루셔도 됩니다. 반드시 5명이 함께 조를 이루어야 하며, 만약 조에 치터가 끼어 있을 경우 불합격 처리됩니다.”

“대체 카드 한 장 가지고 어떻게 하라는 걸까?”

“그러게. 그런데 우리 같은 조 할 거지? 넌 뭘 가졌어?”

“음, 그건 생각 좀 해 볼게.”

“뭐야, 너 날 치터라고 의심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좀 더 신중해 보자, 이거지. 너랑 나랑 카드가 같을 수도 있고.”

이미 서로 알고 있던 사이인 것처럼 보이는 둘에게서 분란의 싹이 트는 것이 보였다.

불합격이란 엄청난 페널티를 가진 치터가 있다는 사실에 의도했던 대로 혼란이 퍼지고 있었다.

“만약 이런 시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실 경우 언제든지 시험을 포기하셔도 됩니다요.”

“지금 시험을 포기하신다고 하더라도 28번째 테라리움은 여러분께 어떠한 불이익을 주지 않아요! 다음 채용을 노리셔도 돼요!”

제퍼가 실실 웃으며 진지한 분위기에 맞지 않게 촐싹거리자 로웰라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작게 불만 어린 표정을 한 사람들은 많았으나 포기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질문이 있으시다면 손을 들어 주세요.”

이리스의 말에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다.

“기한은 언제까지인가요?”

그 질문에 이리스가 제퍼와 헤르마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곧 홀을 나가더니 커다란 모래시계를 들고 왔다. 저건 데저트 필드 드라이어드에게 좋은 버프의 지속 시간을 소량 늘려 주는 아티팩트 가구였다.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 모래가 다할 때까지입니다. 어림잡아 밤까지라고 생각하시면 되고 식사는 모두 이곳에서 제공해 드립니다.”

“이곳에 101명이 있다고 했는데, 치터 한 명을 제외시키고 모두 5명씩 짝을 이뤄 문제를 푸는데 성공하면 전원 합격이 되나요?”

“물론 100명 모두 합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운이 나쁘다면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할 수 있죠. 그땐.”

이리스와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찰나여서 그저 그녀가 좌중을 둘러본다고 생각했을 법했다.

“행정 관리원의 재량으로, 시험에서 두각을 보인 분들께 따로 연락할 예정입니다.”

다시 한번 응시자들은 크게 웅성거렸다.

운이 좋다면 홀의 모든 인원이 직원으로 채용된다. 하지만 운이 나쁘다면 모두 떨어질 수 있다.

난 내가 든 카드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이 시험의 문제는 아주 단순하고 쉽다. 행동력이 좋거나 눈치 빠르다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합격자가 나올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스피드 런을 막는 단 한 가지. 조원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의문의 단 한 사람의 존재.

그게 이 홀의 엑스맨인 나를 의미하는가? 아니었다. 내가 포함된 조도 문제를 풀면 합격이었다.

즉, 사실 이 홀엔 치터는 없었다. 응시자들은 가상의 치터를 경계해야 하는 것이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