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2화 (252/604)

시험 문제는 단순 필터 역할을 위해 과수원을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상식 위주로 뽑았다. 그러다 보니 정작 문제를 출제하고 있는 내가 배워 가고 있는 듯한 아이러니한 상황이 계속되긴 했다.

과수원 직원의 경우 특히나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에 대한 상식을 많이 요구했다. 어쩌면 과수원에서 가장 많이 상대하게 될 사람이 드루이드이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닌가 싶다.

시험 문제는 대강 뽑았지만 많은 양의 시험지를 준비하는 것도 문제였다. 주어진 시간은 너무 촉박했고 우리 테라리움은 마땅한 인쇄소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18번째 테라리움에서 돌던 소식지를 떠올려 보면 글자 크기가 꽤 컸고 한 면에 담을 수 있었던 내용도 적었다. 또한 인쇄 품질도 투박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전화기도 없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묘하게 덜 발달한 이 세계에선 인쇄 기술도 우리 세계처럼 순식간에 책 한 권을 후딱 제본해 내는 것은 기대도 하지 말아야 할 수준일 것이다. 그러니 인쇄소가 있다 하더라도 24시간 내내 돌려도 충당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할 수 없이 근처 테라리움에 발주 요청을 나눠서 보냈는데 그들 역시 짧은 시간 동안 갑자기 떠맡게 된 과다 생산에 우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추가금을 낸다면 어떨까?

“추가금이란 말의 힘이 대단했어요…. 테라리움에 있는 모든 인쇄소는 다 끌어다 돌리겠다고 했어요…. 분명 다들 마감 기한을 맞추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는데….”

“가능하대. 민간 업체는 물론 과수원 소속까지 전부 끌어다 써 준다고 했어.”

얼빠진 표정을 한 미미르와 달리 로웰라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심부름 결과를 알려 주었다.

인쇄 심부름은 각각 제퍼와 로웰라에게 맡겼다. 그리고 로웰라에겐 보좌관 신분으로 미미르를 딸려 보냈다. 내 드라이어드들보다 더 나와 붙어 다니려고 하니 핑계를 만들어 떼어낸 것인데, 본의 아니게 인생 공부를 하고 온 듯했다.

추가금을 잔뜩 먹인 결과로 시험지는 마감일보다 하루 빠르게 도착했다.

정확한 시험 일자가 추가된 후로 테라리움은 정말 눈에 띄게 많은 이방인들로 북적거렸다.

그레이트 빈 연합의 매니저에게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난 외부 활동을 최대한 삼갔다. 시험이 끝난 후의 이벤트를 위해서였다.

예비용으로 시험지를 더 뽑아 둔 것이 잘한 선택이었다. 얼마나 사람이 많이 몰렸는지 마련해 둔 시험장의 수용 인원을 한참 넘어서 오전과 오후로 시간을 나눠서 시험을 봐야 했다. 먼저 시험 본 사람들이 문제를 유포할 수 있으니 급한 대로 시험지를 반으로 잘라 문제를 나눴다.

몰린 이방인들로 테라리움의 상권은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밖을 돌아다니던 길드원들이 내게 말해 주었다.

“시험에 떨어져도 테라리움을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많이 보여요.”

이리스가 테라리움 내 모든 식당들에 줄이 늘어서 있다는 이야기를 하다 말을 꺼냈다.

“세금이 없고 무엇이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나 봐요. 비록 직원으로 채용되진 못했어도 테라리움 내에서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요.”

“본의 아니게 홍보가 됐네.”

“정말 그걸 할 건가요?”

“재밌을 거 같지 않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예상했던 것보다 응시자가 많아서 통과자도 많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면접 보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래서 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어떠한 이벤트를 생각해 냈다.

그 이벤트를 위해선 내 모습을 철저하게 숨겨야만 했다. 정확히는 28번째 테라리움의 진짜 행정 관리원이 누군지에 대한 것을. 그래서 시험 통과자가 가려지긴 전까진 운동도 끊고 과수원과 집만 오가는 생활을 했다.

“이게 겪어 봤는데 사람 본성 알기엔 제법이더라고요.”

힌트를 얻은 것은 신입생 환영회 때의 경험이었다.

“제이 님이 모습을 숨기고 대신 로웰라와 미미르가 활발하게 움직이니 그 둘 중 하나를 행정 관리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어요.”

이리스는 그러면서 제퍼와 헤르마를 가리켰다.

“물론 저 녀석들도요. 제퍼는 의심을 풀 생각 없이 맘껏 누리고 있긴 한데.”

“제가 행정 관리원인 줄 알고 어찌나 극진히 대하던지. 뇌물도 찔러 주던데요?”

“얼굴 기억해 뒀어요? 그런 사람이면 걸러야죠.”

“네, 마스터! 이미 리스트화해 뒀습니다!”

그렇게 많아…?

난 시험 채점이 모두 끝날 때까지 아예 그들이 평소처럼 행동하며 행정 관리원이 아니란 걸 나서서 부정하지 말라고 일러뒀다. 제퍼를 뇌물로 꼬시려고 했던 지원자처럼,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을 행정 관리원이라고 의심한 자들은 며칠 동안 각자에 맞춰 다른 방식으로 부정하게 접근을 했다.

활발해 보이는 로웰라에겐 친분을 쌓기 위해 접근하고 미미르는 만만해 보였는지 협박을 하질 않나 헤르마는 그새 공짜 술도 얻어 마셨다고 했다. 물론 그들은 차곡차곡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미미르는 협박당한 일 때문인지 테라리움에 응시자들이 머무는 내내 저기압 상태였다. 마치 웅크린 햄스터처럼 아무리 어르고 달래 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도가 너무 심해서 의아할 정도였다.

“뇌물은 좀 생각이 없는 게 아닐까요? 세금이 없는 테라리움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뇌물이 가당키나 해요?”

“그러는 너도 작정하고 마스터인 척하기를 즐겼잖아. 시들링을 대동하고 다니니 오해는 네가 제일 많이 받았을걸?”

“뭔가 어리숙한 미끼들보단 정말 진짜처럼 보이는 것도 있어야지.”

채점은 외부 인력을 끌어다 최대한 빨리 마무리할 수 있었다. 간절한 사람들에겐 미안할 일이지만 예상보다 늘어난 인원에 대비하기 위해 문제를 반 토막 낸 만큼 고득점자를 순위로 매겨 100명까지 자른 후 아래는 전부 탈락시켰다. 심하면 한 문제 차이로 합격 여부가 갈렸다.

시험은 좋은 필터링이 되었다. 아무리 그레이트 빈 연합에서 사람을 골라냈다 하더라도 한두 문제만 겨우 맞히는 심각한 지원자도 허다했다.

시험 결과에 불복하며 난동을 피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금세 제압되었다.

과수원 건물에서 창문을 통해 내다보니 부모와 대동한 지원자도 있었고 합격 운을 상승시켜 준다며 부적용으로 꽃가지를 허리에 둘러맨 사람도 있었다. 익숙한 하얀 엘더 꽃가지를 봤을 땐 씁쓸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온갖 군상의 사람들이 한 차례 테라리움을 휩쓸고 떠나고 드디어 면접 날이 다가왔다.

과수원 직원 채용 지원엔 100명, 교습소 직원 채용엔 10명의 후보자가 남았다.

면접 날을 앞두고 미미르와 이리스가 각각 날 찾아왔다. 미미르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이 분명한데 내 앞에서 우물쭈물하며 시간만 허비하다 도망치듯 방을 나갔고, 이리스는 교습소 직원 채용은 혹독하게 부탁한다고 당부하곤 나갔다.

둘 다 응시자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면접 날 아침. 과수원 직원 응시자 100명을 모두 한곳에 몰아넣고 대기시켰다.

난 오랜만에 내가 초보일 적 제일 처음 맞춘 장비로 갈아입었다. 거울 앞에 서니 차림새만으로 얕보이고 무시당했던 뉴비 제이가 그곳에 있었다. 황금색 눈은 너무 튀는 것 같아서 챙이 넓은 벙거지를 썼다. 그러자 맞지 않는 패션에 더욱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제이가 되었다.

그리고 응시자들이 모이는 시간에 맞춰 나도 자연스럽게 그 무리에 합류했다. 마치 나도 응시자인 것처럼.

100명이나 되는 사람이 과수원의 넓은 홀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직 잠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빳빳한 정장을 차려입고 정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새 인연을 만든 것인지 무리 지은 곳도 있었고 구석에 병풍처럼 박혀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 틈에 섞여 어색하게 서 있었다. 낯선 사람들이 가득한 공간이니 굳이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등장해 어색하게 서 있는 날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나를 자신들과 같은 응시자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내가 생각해 낸 이벤트는 간단했다. 엑스맨이 되어 직접 면접자들 속에 섞이는 것.

신입생 환영회 때 선배들이 신입생인 척 섞여 들어와 놀던 것을 떠올려 이번 이벤트를 기획하게 되었다.

선배인 줄은 까맣게 모르고 같은 신입생이라 생각해 다들 스스럼없이 대했다. 그래서 완전히 한 패라고 생각해 선배들의 뒷담화를 까는 애들이 여럿 있었다.

그걸 들은 선배들은 스파이처럼 곧이곧대로 듣고 있다가 환영회 마지막 날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고 신입생들의 분위기를 삽시간에 죽여 버렸다. 그러곤 보란 듯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뒷담화를 깠던 내용을 흘리며 상황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우리 학번대는 선배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동기들이 여럿 있었다. 더구나 신입생들 사이도 미꾸라지가 흐린 물처럼 단합력이 깨졌다.

신입생들 분위기를 최악으로 만든 엑스맨 이벤트를 나중에 알게 된 학과장이나 고학번 선배들에 의해 주동자들이 크게 혼났고 역대 최악의 환영회 이벤트로 남게 되었다.

그 최악의 엑스맨 이벤트는 당할 땐 빡쳤지만, 지금 상황에선 꽤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과수원 내부는 별게 없네. 금칠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응시자들의 소소한 평가를 여과 없이 바로 곁에서 들을 수 있었다.

“걔 봤어? 이 테라리움에 있던데.”

“누구?”

“그 불길한 녀석 있잖아. 시도 때도 없이 처울기나 하고.”

“미미르?”

그리고 들을 거라곤 예상도 못 했던 이름도 듣고. 갑자기 미미르가 여기서 왜 나와?

앳돼 보이는 아이 셋이 자기들끼리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딱 봐도 미미르의 또래. 친구…라기엔 대화가 좋지 않았다.

“뭐야, 걔도 응시자래? 걘 아카데미 중간에 자퇴했잖아. 실력도 안 될 건데?”

“들리는 소문으론 걔가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라던데?”

“에이, 그게 말이 되냐? 걔가 행정 관리원이면 개나 소나 다 행정 관리원 되게. 걔 집안에 돈 많잖아. 그걸로 꽂아 줬겠지.”

“하는 짓도 참. 추잡한 집안 믿고 질질 짜기나 하고.”

미미르가 아카데미를 자퇴했구나. 그 안에서 괴롭힘을 당했을 거란 사실과 아카데미를 끝까지 다니지 못했던 것도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지만… 자퇴를 했다니. 그렇다면 어쩌면 저 아이들이 주동자인 걸까?

그때 홀 문을 열고 길드원들과 미미르가 들어왔다. 그들은 한껏 차려입은 상태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