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전….”
하지만 막상 우리의 이목이 집중되니 우물쭈물한다.
“전 태몽도 없고 두 분처럼 그렇게 대단한 뜻을 지닌 이름이라기보단….”
미미르라는 귀여운 이름은 어떻게 지어지게 된 걸까?
자줏빛 눈이 잠시도 가만있질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마치 이 말을 우리에게 해도 되는 지를 고민하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입술이 떨어졌다.
“미미르란 이름은 저를 살리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라고 했어요.”
“살리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라니?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야? 이름을 미미르라고 지으면 네가 살 수 있대?”
“그게….”
“나 그런 이야기 처음 들어봐. 미미르란 이름에 무슨 힘이 있는 건가? 난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
“언닌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
고개를 젓자 로웰라의 시선이 휙 돌아간다.
“미미르, 빨리 이야기해 줘. 나 엄청 궁금해.”
미미르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난처한 기색이 스쳐 가는 것이 보였다.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고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계속 대화를 회피해 보려 했으나 로웰라가 참 끈질겼다. 쉴 새 없이 질문을 몰아붙이니 미미르는 덫에 걸린 물고기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꼬리만 팔딱거리는 모양새였다.
그는 결국 자포자기하는 심정인지 한숨을 쉬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하나를 살리기 위해… 앞으로 태어날 모든 생명을 제게 짊어지웠다고 하셨어요…. 전 원래 태어날 수 없었던 운명이거든요. 본래라면 어머니 배 속에서 죽었다고….”
“본래 영혼에 불씨를 담고 태어나는 인간들 중 살아남는 것은 여자들뿐이라고 했다.”
문득 시들링이 베스탈리스에 대해 설명해 줬던 것이 떠올랐다. 베스탈리스는 여자들뿐이라면서도 남자인 애쉬는 인페르노의 수장을 맡고 있을 만큼 아주 강력한 불의 힘을 사용했다. 여자가 아니면 죽는다면서 어째서 애쉬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미미르는 베스탈리스 가문의 아들이었다. 만약 베스탈리스가 불특정하게 태어나는 드루이드들과 달리 대를 이어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면…. 미미르도 영혼에 불씨를 담았던 것이 아닐까?
“미미르란 이름은 원래 마르지 않는 샘물을 뜻하는 단어에요. 정확히는 미미르의 샘이라고 불려요. 가뭄이 와도 불이 휩쓸고 지나가도 절대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해요. 샘은 세상 곳곳에 퍼져 있는데 생물이 살아가는 데 물은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힘 있고 부유한 세력이 샘을 숨기고 독점하고 있다고 했어요.”
불이 판치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화재와 더불어 가뭄이었다. 가뭄이 오면 물은 물론 식량을 수급할 수 없으니 굶어 죽는다.
26번째 테라리움도 세계수 가지의 축복의 균형이 깨지며 가뭄을 겪었고 식료품과 물의 가격이 훌쩍 뛰었다. 그런 상황에서 절대 마르지 않는 샘이라니. 어쩌면 극한의 상황에선 다이아보다 값진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난 처음 듣는 이야기야. 숨기고 독점하고 있다더니,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은 알지 못했던 걸까?”
로웰라가 놀란 목소리로 미미르의 이야기에 반응했다.
“전 본래 죽을 운명이었는데…. 어머니께서 절 살리기 위해 가문이 소유한 샘의 씨앗을 삼키셨고 그래서 제가 태어날 수 있었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 샘의 힘을 더욱 강하게 받기 위해 이름도 미미르라고 지으셨다고….”
“샘의 씨앗?”
“샘에서 물이 솟는 원천 같은 거야. 그 씨앗을 어머니가 삼켜 버리셨으니 더 이상 그곳에서 물은 솟지 않지만….”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평생 마르지 않는 샘의 씨앗을 삼켜야 네가 태어날 수 있는 거야?”
“그게… 보통은 나처럼 위태한 운명의 아이들은 샘물 자체에도 영험한 힘이 있어서, 원래는 물을 마시기만 해도 안전히 태어날 수 있었지만…. 나는 달라서….”
“달라?”
“…….”
미미르는 로웰라의 질문에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유를 대려면 가문의 비밀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미미르가 영혼에 불씨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불씨의 힘을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의 씨앗을 삼켜 누른 것이었다.
이로소 미미르와 더불어 애쉬는 물론 남자 베스탈리스들에 대한 비밀이 풀렸다.
미미르의 말대로라면, 본래 베스탈리스는 여자만 태어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남자아이도, 샘의 원천을 굳이 끝내 버리지 않고 물만 마셔도 불씨의 힘을 억누르고 태어날 수 있었나 보다.
그런데 겨우 샘물을 마시는 정도로 남자아이도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다면, 어째서 베스탈리스는 고대부터 여자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전설이 생겼던 건지 의아했다. 미미르의 샘이 생겨난 것이 비교적 최근인 걸까?
어쨌든 미미르가 가진 불씨의 힘은 겨우 샘물을 마시는 정도로 누를 수 없었기 때문에 샘의 씨앗을 삼켜야만 했던 것이고…. 어쩌면 애쉬도 그의 어머니가 샘의 씨앗을 삼킨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문은 남았다. 애쉬는 지상에 떠오른 태양처럼 엄청난 불의 힘을 사용했다. 숨기려야 숨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그러나 미미르는 달랐다. 그는 아무런 힘도 없어 보였다. 파필리온이 편지에서 그렇게 말했지. 미미르가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될 수 있었던 건, 물의 힘을 발휘했거나 아무런 힘도 없기 때문이라고.
“미미르.”
내 부름에 미미르는 입술을 깨문 채로 바라보았다.
“만약에 샘의 씨앗을 삼키고도, 널 죽게 만들 수 있었던 그 힘이 약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니?”
“샘의 씨앗이 억누르지 못할 정도라면 정말 강한 힘인 건데… 아마 어떻게든 태어날 순 있어도… 그 힘은 계속 남아 있으니 샘의 씨앗을 소모하는 대신 끊임없이 생명을… 음, 결국 남들보다 빨리 죽겠죠.”
그렇다면 애쉬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생명을 끊임없이 태워서?”
“네, 태워서… 헙!”
날 바라보는 미미르의 표정이 경악으로 변했다. 마치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어떻게 그걸….”
얘, 솔직히 나 말고도 베스탈리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네가 했던 일련의 말을 듣고 떠올릴 수 있었겠다. 아니면 적어도 수상함을 눈치챘겠지.
강한 물의 힘으로 억눌러야만 하는 힘은 반대되는 속성인 불의 힘밖에 없지 않겠니? 자기 딴에는 최대한 불의 언급을 피하고 말한다곤 했지만….
나도 어지간하면 미미르가 숨기고 싶어 하니 입을 다물려고 했으나 그가 비밀을 너무 떠먹여 주는 수준이라 어쩔 수 없었다.
“뭔데? 뭔데?”
하지만 베스탈리스에 대해 모르는 듯한 로웰라는 미미르의 급격한 감정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미미르, 솔직히 로웰라가 너무 널 추궁하긴 했지만 정말 숨기고 싶었다면 아예 너의 탄생에 대한 비밀을 발설하지 말았어야 했어. 나처럼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걸 눈치챘을 거야.”
“알고 계셨어요…?”
“음, 행정 관리원은 원래 널리 내다보며 항상 귀를 열고 모든 걸 들어야 하지.”
만약 베스탈리스들이 대를 이어 태어나는 경우가 다수라면, 어쩌면 네 먼 사촌일지도 모르는 파필리온이 다 불었다고 말할 순 없고.
“…….”
“사실 너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내게 들켰다고 뭔가 큰일이 생길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그걸 알고 있는데도 이런 제게 보좌관 자리를 제안하신 건가요?”
“안 될 건 뭐 있어?”
미미르가 인페르노 소속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아니니까. 더구나 베스탈리스와 연관된 사람이 이미 16번째 테라리움에서 내 보좌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려 인페르노 수장의 이복동생인 놈이었다.
“왜요…? 보통은… 엄청 싫어하고 꺼림칙하게 보고….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여기지 않나요?”
“네게 날 태울 힘이라도 있니?”
내 물음에 미미르는 화들짝 놀라 로웰라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로웰라는 마냥 해맑은 표정으로 연신 뭐냐며, 무슨 상황이냐며 물을 뿐이었다.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보단 궁금해 죽겠다는 감정이 앞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뇨…. 전 아무런 힘도 없어요….”
역시 아무런 힘도 없기 때문에 행정 관리원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거구나.
“그런데 널 그 배경만으로 싫어할 이유는 딱히 없지 않아? 내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하지만… 불은… 이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진 알고 있어. 하지만 난 불의 힘 자체는 밖을 떠돌아다니는 그 불들과는 별개라고 생각해. 사람은 살아가는 데 물도 필요하지만 불도 필요해.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금방 결론 낼 수 있는 건데 세상의 인식이 그런 건, 부정 탈 수 있다는 인식이 잘못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겠지. 어쨌든 난 네 가문의 배경을 알고 있지만 그걸로 널 나쁘게 대할 생각은 없어. 오히려 친해지고 싶다면 모를까.”
“저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요? 저에 대해서 알고 있는 데도요? 그런 적은….”
처음이에요. 물기 젖은 목소리가 한 줄기 빗방울처럼 툭 떨어졌다. 미미르를 옹골차게 감싸고 있던 고정 관념이 흔들리는지, 쌓여 있던 서러운 감정이 파문을 일듯 퍼져 나왔다.
갑자기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는 미미르에 로웰라가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반사적으로 그에게 달려갔다. 로웰라는 진땀을 빼면서도 능숙하게 미미르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에 오래 다니고 싶었어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여기지 않나요?”
항상 위축된 모습을 보였던 미미르. 무엇이 그의 성정을 쌓아 올렸는지 알 수 있었다.
핍박받는 베스탈리스의 삶은 이렇게 어린아이에게도 투영되고 있었다. 현실은 너무 잔혹했다.
“언니, 미미르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얘, 그만 좀 울어. 뚝 그쳐 봐. 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