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16번째 테라리움에서의 일로 베스탈리스들이 주를 이룬 인페르노 조직과 완전히 척을 졌다. 그 수장인 애쉬를 테라리움에서 추방하는 방식으로 싸움을 피했지만, 결국 언젠간 다시 정식으로 맞붙게 될 것이다.
내가 인페르노의 자금줄인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어떻게든 망칠 마음을 먹고 있으니까 확정된 미래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인페르노의 일로 베스탈리스는 어쩌면 나와 잠정적으로 적대 관계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미미르의 집안처럼 세상과 타협한 온건파가 있다고 하니 생각을 고쳐먹었다. 일부 베스탈리스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 두는 건 어떨까?
인페르노에서 주를 이룬 강경파는 세상의 주축이 되는 세계수를 파괴하려 하고, 온건파는 세상과 타협해 1번째 테라리움에 무릎을 꿇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사상적으로 대립한다면 온건파를 내 편으로 흡수해 두는 것이 훗날 어떻게든 이득이 되지 않을까?
어쩐지 미미르가 내겐 굴러 들어온 복덩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는 신분을 세탁한 베스탈리스 가문에서 늦둥이로 태어나 아낌없이 지원을 받고 있는 아이. 어지간히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면 테라리움을 덥석 품에 안겨 주지도 않았을 거다.
넵튜누스를 배출함으로써 신분 세탁에 성공해 재부상한 미미르의 집안은 파필리온의 말에 따르면 대대로 아주 강한 베스탈리스들이 주축을 이룬 곳이라고 하니, 온건파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미미르를 잘 구슬리고 호의를 베풀면 그 집안과도 사이좋게 지내며 온건파 쪽과 관계를 좋게 트는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난 파필리온이 보낸 미미르에 관련된 문서를 벽난로에 넣어 전부 태워 버렸다. 외부로 새어 나가선 안 될 비밀스러운 내용이 너무 많았다.
파필리온이 이 문서들을 루프를 통해 보낸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다른 이의 손에 맡기는 것보다 루프처럼 완전한 내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안심할 수 있었다.
“미미르, 28번째 테라리움에 머무는 동안만 제 보좌관이 되어 볼래요?”
“네? 보좌관이요?”
“행정 관리원 일을 배우고 싶다고 했죠? 지금처럼 졸졸 쫓아다니는 것보단 보좌관 신분으로 제 곁에서 일을 보조하며 배우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언니, 정말 맡기려고? 차라리 내가 할래!”
로웰라가 우려가 섞인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하긴, 그동안 미미르가 보여 준 모습은 전부 못 미덥긴 했다. 로웰라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로웰라, 궁극적으로 넌 행정 관리 쪽에서 활동하려는 게 아니잖아. 난 네가 지금처럼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만족해. 미미르 쪽은 사정이 다르니까 차라리 임시직으로 곁에 두는 게 낫지.”
“제가… 그래도 될까요? 정말 감사한 제안이지만 전 잘해 낼 자신이 없어서….”
“부담되면 밥값 한다고 생각하세요. 전 당장 한 명의 일손이 아쉬운 상황이니 작은 도움이라도 좋아요. 거기다 평생 보좌관이 될 것도 아니라 중요한 일들은 맡기지 않을 거니 너무 걱정 마세요. 어차피 길어야 일주일이겠죠, 뭐.”
칼롱을 보내 관광 떠난 38번째 테라리움의 자문인들을 감시하라고 해야겠다. 겸사겸사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게 만들어 달라고도 해야겠어. 여행 도중 예기치 못한 사고가 자꾸 발생하면 기 싸움을 이어가긴커녕 아늑한 집이 그리워지겠지.
내가 칼롱에게 말벌을 보내는 동안 고민을 끝낸 것인지 미미르가 그러하겠다고 답했다.
“좋아요. 그럼 제 보좌관인데다 로웰라 또래이니 편하게 대해도 될까요?”
“네, 얼마든지요.”
“그래, 미미르. 그럼 일을 시작해 볼까?”
파필리온이 보낸 상자에서 한 무더기의 문서 더미를 꺼내 집무 책상 위로 올렸다. 제일 위에 놓인 작은 메모를 집어 들었다. 문서들을 분류한 리스트였다.
“어디 보자…. 시험지를 보내 달라고 했더니 온갖 종류를 다 보내 놨네. 내가 평생 본 시험지나 문제집보다 많잖아? 우선 과수원에서 일할 직원들을 뽑는 시험 문제들을 추려 줘.”
얼마나 치밀하면 과수원에 다과를 납품하는 업체를 선정할 때도 시험을 보는 거야? 이 정도면 시험 출제 중독 수준인 것 같은데. 파필리온, 네가 전부 출제한 거라면 대학 가서 조교 참 잘하겠다 야. 가만, 오히려 내가 너무 채용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건가?
“제이 님은… 양성소는 나오시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그럼 아카데미를 다니셨나요?”
“음…. 따지고 보면 아카데미가 맞긴 하지.”
학교를 아카데미라고 부른다면 난 평생을 아카데미에 다닌 거나 다름없었다.
“어느 테라리움에서 다니셨어요?”
“그건 말하기 좀 곤란해.”
내가 다닌 학교는 이 세계에 없거든.
“그… 그럼 얼마나 오래 다니셨어요?”
“어디 보자 여덟 살에 입학해서….”
“와, 언니 엄청 영재였나 봐? 어렸을 때부터 입학한 거야?”
로웰라의 말에 아차 싶었다.
잠깐, 여긴 아카데미를 보통 얼마나 다니는 것이 보통이지? 이곳도 한국처럼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쭉 다니는 건 아니지 않을까?
“그냥 좀 오래 다녔어.”
내 말에 미미르는 말이 없어졌다. 오래 다녔다는 답이 이상한 걸까? 내가 했던 말에 실수가 있었나 곱씹어 보고 있는데 우울한 표정의 미미르가 입을 열었다.
“저도… 오래 다니고 싶었는데….”
그렇다는 건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빨리 아카데미를 나와야 했다는 걸까? 이곳의 아카데미에선 뭘 배우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싶어서 항상 안달이 나 있었는데, 오래 다녔던 걸 부러워하다니.
무슨 사정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저번에도 이 화제를 피하는 눈치였으니 굳이 묻지 않았다. 미미르도 이어서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 이후로 우리가 있는 공간이 급격히 조용해져 불편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로웰라 역시 자리가 불편해진 것이 느껴졌는지 다른 화제를 꺼내 보려고 쉴 새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로웰라가 비로소 주제를 정하는 데 성공하기 전까지, 우리 사이엔 사각사각 종이 뒤적이는 소리만 흐를 뿐이었다.
“좋은 사람들만 뽑았으면 좋겠다, 그렇지?”
“그럼 좋겠지. 하지만 보통 사람의 됨됨이는 이런 시험으로 전부 파악되지 않아. 정말 아닌 사람만 가려내는 정도지.”
시험을 내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느 세월에 다 검토하지. 새삼 분반까지 합쳐 이백여 명이 넘어가던 교양 수업의 시험지를 혼자 체크하다 죽는 줄 알았다던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보통 조교 몇이 더 붙어야 하는데, 초임 교수라 사람을 많이 뽑지 않았다고 했던가.
시험이 끝나고 밤늦게까지 술판을 벌이다 집에 갈 때마다, 몇 날 며칠을 피곤에 찌든 얼굴로 NPC처럼 같은 자리에 담배를 들고 있던 그 선배의 모습…. 내 미래?
“난 가끔 그런 상상도 해. 이름만 보고 그 사람의 좋고 나쁨을 바로 파악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 말이야. 여행 중에 사람을 잘못 만나면 정말 위험하니까, 그런 힘이 있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그거 좋네.”
만약 이 세계가 내가 아는 어떤 게임의 세계였다면, 머리 위에 닉네임이 뜨는 그런 게임이었다면, 거기다 다른 유저를 죽이면 닉네임의 색깔이 점점 붉게 물드는 그런 게임이었다면, 어쩌면 로웰라가 바랐던 것이 이뤄질 수도 있었다.
그 게임은 부정한 행위를 할 때마다 카오스 수치라는 것이 쌓여서 다른 유저들이 볼 수 있도록 닉네임의 색깔이 변하고 현상 수배 게시판에 닉네임이 올랐다.
현상 수배에 오른 유저를 죽이면 보상이 주어져서 다른 유저들의 타깃이 되니 되도록이면 부정한 행위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지.
하지만 보통 닉네임이 빨갛게 물들 정도로 카오스 수치를 쌓은 유저라면 진짜 고레벨에 실력도 좋은 악질이라서 자신이 어지간한 스펙이 아니라면 빨간색만 보고도 황급히 맵 바깥으로 피해야 했다.
이 세계에서 나쁜 짓을 일삼는 사람들 머리 위로 빨간 표식이 뜬다면, 갓 여행길에 오른 초보 드루이드들이 미리 알고 피할 수 있을 텐데.
“이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야, 언니의 이름은 어떤 뜻이야? 난 엄마가 날 임신했을 때 꿈에서 이슬을 머금은 새순이 트는 나무를 봤대. 귀여운 태몽이지? 그 새순이 나라고 확신하셨다고 했어. 그래서 장차 나라는 새순이 자라 세상을 지탱하는 거대한 한 축이 되라고 이름을 처음엔 ‘노벨라’라고 지으셨대. 하지만 노벨라라는 이름이 그 시대에 너무 유행을 탄 거야.”
하긴 세계수가 세상을 굽어살피는 데다 세계수가 보낸 드라이어드들이 활동하는 세계였다. 나무나 식물과 연관된 이름이 유행을 탈 만했다.
“알고 보니 옆집에 태어난 애 이름도 노벨라고 길거리를 걸어도 자주 들리는 이름도 노벨라라 이름을 조금 바꿔서 ‘로웰라’라고 지은 거야.”
“그거 재밌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도 복도에서 내 친구 이름을 부르면 동시에 세 명이 돌아볼 정도로, 그 시대에 유행을 타는 이름이 꼭 있곤 했다.
로웰라가 이야기를 너무 재밌게 잘 풀어서 일하던 것도 잊고 경청했다. 미미르도 마찬가지인지 손엔 문서를 가득 든 채로 멈춰 로웰라를 향해 몸을 틀고 있었다.
금세 환기가 된 분위기와 이런 관심이 마음에 드는지 로웰라는 웃는 낯으로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로웰라는 관심이 집중되면 약간 주눅이 드는 기분이 드는 나와 다르게, 좀 관종 기질이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사실 아예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었어. 우리 아빠는 내가 태몽에 나온 새순이 아니라 새순에 맺힌 이슬이라고 생각하셨거든. 그래서 맑고 깨끗한 이슬 같은 청명한 사람이 되라고 ‘로라티오’라고 지으려고 했대. 그런데 우리 엄마에게 사기를 쳤던 고향 친구 이름이 로라티오라서 로웰라가 된 거야.”
로웰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깔깔 웃었다.
“로라티오라는 이름도 꽤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뭔가 고풍스러운 느낌이잖아? 하지만 청명한 사람이 되라고 지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엄마에게 사기를 쳤을 줄이야. 정말 웃기지 않아? 다음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조심해야겠어. 언니는 어때?”
“음, 나도 태몽부터 말해 볼까? 그러고 보니 나도 태몽이 나무와 관련이 있긴 해.”
별 의식을 못 했는데 로웰라의 이야기를 먼저 들으니 묘한 기분이 들긴 했다.
“이파리 하나 없이 앙상하게 마른 나무를 발견했는데, 엄마가 그걸 불쌍하게 여겨서 근처 냇가에서 물을 퍼 나무에 정성스레 뿌려 주었대. 그러자 갑자기 나뭇가지에서 나무가 휘청거릴 정도로 거대한 황금빛 열매가 열렸는데 사과인지 복숭아인지 하도 반짝거려서 구분이 안 될 정도였대. 나중엔 그게 가지에서 똑 떨어져서 엄마 치마폭에 굴러 들어왔다고 했어. 그러고 나서 날 임신한 걸 아셨고.”
“우와, 정말 신기하지 않아? 아이가 태어날 걸 꿈에서 알게 되다니.”
태몽 이야기는 언제나 신기했다.
“태몽 때문에 내 태명도 금동이였어.”
금동이란 말에 로웰라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내 태명을 알고 있는 집안 어르신들은 장난스레 날 금동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땐 참 그게 부끄러웠는데.
“그런데 내 이름은 너와 다르게 태몽이랑 연관되게 지어진 건 아냐.”
이 세계는 한자 이름을 안 쓰는 데다 난 본명이 아닌 닉네임을 쓰고 있으니 자세히 말할 순 없었다.
“그냥 우리 할아버지가 복으로 세상을 구제하란 뜻으로 지어 준 이름이야.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도 로웰라 너처럼 이름이 바뀌긴 했어. 음… 지금 내 이름이 ‘제이’니까 달리 말하면 ‘이제’가 될 뻔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엄마가 어감이 마음에 안 든다고 순서를 바꾼 거거든.”
원래는 내 이름이 희제가 될 뻔했다고 엄마가 그랬지. 좀 더 여자애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낫지 않겠냐며, 제희로 바꾸셨다. 난 그 말을 듣고 그게 그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희제나 제희나.
“와, 언니 이름 뜻 정말 굉장하다! 태몽이나 이름이 바뀐 것도 그렇고. 우리 많이 닮은 것 같지 않아? 더 가까워진 기분이야! 미미르, 넌?”
로웰라가 내내 이야기에 끼고 싶어 하는 눈치인 미미르를 자연스럽게 끼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