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8화 (248/604)

루프는 입을 놀리면서도 쉴 새 없이 주변을 구경했다. 여기가 앞으로 내 가족들이 살 곳. 눈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 파필리온이란 사람도 여러 방면으로 도와주긴 했어요. 연금 학회에 참여하거나 외부로 연설을 하러 갈 때, 전문가를 붙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시켜 주더라고요. 그런 자리는 차림새가 중요하다면서, 옷이 사람을 만든다고, 기선 제압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제이님, 넥타이 하나에 42번째 테라리움에서 가족이 한 달을 보낼 수 있는 세금이 드는 거 알고 계셨어요? 물론 알고 계셨겠죠….”

루프는 갑자기 풀이 죽은 얼굴로 마치 제 목에 넥타이가 걸려 있는 것처럼 만지작거렸다. 현타를 맞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연설을 한 번 나갈 때마다 제가 평생을 번 다이아보다 비싼 옷들이 제게 걸쳐졌어요. 장인 이름이 붙은 거면 필라를 갖다 팔아도 못 살 금액이 붙더라고요.”

왜 갑자기 필라가 나와?

그녀는 비장한 얼굴을 하곤 내게 밀고를 하는 사람처럼 수군거렸다.

“어르신, 파필리온 그 사람 테라리움 기둥을 뽑아 먹을 인간이에요. 제 평생 그렇게 사치스러운 남자는 처음 봤어요. 물도 라벨 붙은 걸 마시더라고요. 1번째 테라리움에서 수입해 오는 ‘명품’ 물이래요. 거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물품을 만드는 장인 이름들을 다 꿰고 있어요. 장인들이 만든 옷이 아니면 절대 몸에 안 걸쳐요. 또 그 남자 아침, 점심, 저녁마다 입는 옷이 바뀌는 거 알고 계셨어요? 솔직히 어르신이 다이아를 쓸 땐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이 많아서 사치라곤 감히 안 느껴지는데, 그 남자는 달라요. 그 자식은 작정하고 다이아를 낭비하는 놈이에요. 틈만 나면 자신 치장하는데 그렇게 다이아를 쓴다니까요? 아주 옆에서 보면 공작새가 따로 없어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공작새래.

“어르신은 얼굴을 밝히니까 그놈도 어르신의 세이브 범위에 있는 것 같던데 절대 거둬들이면 안 될 놈이에요. 재미로라도요. 아주 작정하고 어르신에게 빈대처럼 붙어서 다이아 다 빨아먹을 인간이에요.”

내게 인간이 아닌 다이아 귀신이 둘이나 있긴 하지. 엘더는 그 예쁜 웃음 보려고 내가 작정하고 다이아를 퍼 주는 편이지만, 세계수가 빨아먹는 다이아 양에 비하면 파필리온의 낭비는 새 발의 피 정도였다. 아니, 그런데 내가 얼굴 밝히는 건 대체 어디까지 소문이 난 거야?

“걘 얼굴은 확실히 제 취향이긴 한데 인성이 글러 먹었지요.”

“그렇긴 해요. 잘 생각하셨어요. 그런 놈한텐 여지도 주지 마세요.”

루프가 내 말에 크게 동조했다.

“솔직히 저도 처음엔 치장에 그렇게까지 많은 다이아를 쓰는 게 부담스럽긴 했는데….”

목소리 크기가 급격히 줄어가다 갑자기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잉어처럼 팔딱 튀었다.

“아니, 절 보는 눈빛들이 싹 달라지더라고요. 그렇게 차려 입히고 제 수행원이라며 사람도 대여섯 명씩 제게 붙여 줬다니까요. 평생 학회 건물 정문만 이용해 보다가 VIP 전용 통로를 선뜻 내주더라고요. 다들 제게 공손히 대하고. 그때 희열이란…. 이 맛에 다들 명품, 명품 하나 봐요. 행정 관리원이라도 된 줄 알았어요. 한번 맛보고 나니까 사람이 성공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루프의 눈이 탐욕으로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아차, 이게 아니지. 어쨌든 몇몇 연구물들이 정식으로 저희 단체의 수정 권고 요청을 받아들였어요. 회수가 이뤄진 것도 있고요.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앞으로 계속 정진하면 분명 그런… 참극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거예요.”

“고생했어요. 항상 응원할게요. 뭐, 단체에 필요하다면 연구비가 아니더라도 마음껏 쓰세요.”

내 말에 루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젠 가족들 보러 가도 돼요. 다른 이야기는 차차 들을게요.”

“와, 정말 그래도 돼요? 필라는 어디에 있어요? 걔도 여기에 있죠? 아직도 연구하나?”

솔직히 다른 이들은 다 만나 봤는데 필라는 아직이었다. 깜박 잊고 있었다.

“그… 가족들이 저쪽에 식당 낸 건 알고 있는데…. 마침 잘됐네요. 루프도 왔으니 이따 점심이나 같이할까요?”

“좋아요! 필라가 매번 부모님 요리 솜씨가 장난 아니라고 자랑했는데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요!”

루프는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신나게 뛰어가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단체도 후원하고 계시나요…?”

루프가 자리를 뜨자마자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던 미미르가 슬며시 물어왔다. 어찌나 조용히 있었는지 곁에 있었다는 걸 잊어버렸다. 그는 여전히 내게 행정 관리원 일에 대해 배우겠다는 명목으로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네, 뭐, 그런 셈이죠.”

“어떤 단체인가요?”

“음… 연금술을 악용하는 것을 방지하는 단체에요. 단체긴 한데 제가 만든 사조직이라 후원도 저만 하고 있어요.”

“그럼… 어떤 이득이 있나요?”

“이득이요?”

미미르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금술을 악용하는 걸 방지하는 단체는… 이윤이 생기지 않잖아요? 테라리움에 어떤 득이 되나 해서….”

“음, 표면적으로 보면 당장 테라리움에 이윤을 가져다주는 단체는 아니에요. 또 이윤을 생각하고 만든 단체도 아니고. 이건 사회 공헌의 의미라고 볼 수 있겠죠? 단체를 후원할 만큼의 역량이 되니까 당장 테라리움의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로도 눈을 돌려서 사회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부분을 방지하는 거예요. 장기적으로 보거나 잠정적으로 봐도 그 악영향이 우리 테라리움에도 끼칠 수 있는데 그걸 방지할 수도 있겠죠?”

사실 이렇게 깊은 의미를 갖고 단체를 후원한 건 아니었다. 악용된 연금술이 빚어낸 참극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에 루프의 사상에 감화되었고, 당장 내 16번째 테라리움에 수많은 실직자가 생기니 일자리를 창출해 준 것이었다.

하지만 미미르 앞에서 실상 그대로를 내뱉을 순 없었다.

“행정 관리원이 되면… 그런 것도 생각해야 되는구나….”

“테라리움이 사회 공헌의 의미로 활동하는 건 꽤 있을 법한데, 38번째 테라리움엔 그런 게 없나요?”

아, 묻지 말 걸 그랬나? 하지만 후회는 늦었다.

“그게… 단체 후원이라기보단 투자를 하고 있다고는 들었는데….”

길드와 제휴를 맺어 치안대를 꾸리는 곳. 제휴 길드 선정 과정이 투명하게 이뤄지는지도 알 수 없는 그곳은 같은 방식으로 투자처에 다이아를 돌리고 있었다. 정작 행정 관리원의 월렛은 공금으로 묶으면서 자문인들은 횡령을 일삼는 부패한 테라리움.

“성장하면 분명 테라리움에 도움이 되는 곳이라고….”

분명 난 제3자인데 왜 이렇게 속이 터질까?

“신약을 개발하는 곳이라고 했는데 성공하면 약 하나만으로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그렇게 되면 의료 쪽에 들어가는 비용을 확연히 줄일 수 있다고 했는데….”

약 하나만으로 모든 디버프를 치유할 수 있는 단델리온의 파나케이아가 있긴 하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만병통치약의 등장이 정말 실현 가능할까?

신비한 드라이어드의 힘도 결국 같은 드라이어드에겐 능통하나 사람에겐 작은 상처를 겨우 치료하고 피로를 조금 풀어 주는 수준이었다.

“먼 미래엔 다이아를 대체하는 화폐가 등장할 거라고… 그걸 선점해야 테라리움이 더욱 부자가 될 거라고….”

여기도 가상 화폐가 판을 치는 것인가? 진짜 환장할 노릇인데.

미미르는 그 외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사업들 여러 개를 들먹이며, 누가 봐도 사기인 그곳에 자문인들이 다이아를 투자하고 있다고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정작 행정 관리원인 미미르가 개입한 적은 없었다.

다 우리가 알아서 할게. 늘 그랬던 것처럼 믿고 맡겨.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어련히 38번째 테라리움이 잘되라고 하는 일인데 문제가 있겠어?

“로웰라.”

“알았어, 언니. 내가 나설게. 넌 될 수 있으면 말하지 마라, 듣는 사람 속 터지니까. 대체 아카데미에서 뭘 보고 배운 거야? 아카데미 중 제일가는 곳이라며? 거기 출신이면서 왜 이렇게 순진, 아니 미련한 거야? 아카데미도 안 다니고 행정 관리 일은 하나도 모르는 내가 들어도 수상함 천지인데, 정말 그대로 두고 보기만 한 거야?”

미미르는 로웰라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내가 로웰라의 입을 빌린 것은 차마 미미르 앞에서 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버릇처럼 내뱉을 뻔한 것을 잘 참았다.

“지금이라도 집안에 손을 벌릴 순 없나요? 38번째 테라리움의 상태는… 정말 심각한데요.”

“그럴 순 없어요….”

미미르는 울 것처럼 웅얼거렸다. 대체 그 잘난 집안은 아들이 이 꼬락서니가 될 동안 뭘 하는 거야?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파필리온이 보낸 답장에서 알 수 있었다.

친애하는 나의 블랙 릴리.

그대가 16번째 테라리움을 떠난 후부터 테라리움이 활기를 잃은 것 같습니다.

그대의 당차고 아름다운 모습이 보이지 않자 세상이 흑백으로 물든 기분입니다.

눈을 감을 때도 그대의 모습이 아른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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