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양성소를 설립할 거라고 들었는데, 그럼 양성소 학생들을 이용하는 건 어떨까요?”
“학생들을요?”
“순찰을 훈련의 일환으로 보는 거예요. 드루이드들이잖아요? 더구나 현재 테라리움에 있는 드라이어드들과 바로 이어 주실 거라면, 드라이어드를 데리고 있는 좋은 전력이 되는 거죠.”
초보 드루이드들은 경험 있는 드루이드들에 비해 실력이 한참 모자랄 테지만, 드라이어드들과 페어를 이루고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일반인들에겐 충분히 경각심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생각으로 보여요. 파필리온이 했던 것처럼 상시 의뢰를 배포해서 양성소를 졸업하더라도 당분간 돈벌이 수단으로 자발적으로 순찰을 할 수도 있으니.”
“그중에 적성을 찾아 치안대에 남으려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요. 모든 드루이드들이 우리처럼 모험에 꿈을 갖는 건 아니고 불을 무서워하기도 해요. 어쩌면 드라이어드와 함께하며 꾸준히 돈을 벌 수 있는 일에 대해 알게 되면 지원자가 늘 수도 있을 거예요.”
“후반엔 지원자가 늘어서 유지비가 곤란해질 위험도 있긴 한디… 그건 전혀 걱정할 상황이 아닌 것 같네.”
하루아침에 주민들이 확 늘어 당장 정식 치안대를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다. 이리스의 제안은 이제 막 마을이 커져 가는 수준인 우리 테라리움에 잘 어울리는 제안이었다.
“38번째 테라리움에선 어떻게 치안대를 유지하나요?”
“어….”
잠자코 듣고 있던 미미르가 내 질문에 화들짝 놀랐다. 자신에게 말을 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저흰… 전속 길드는 없지만 특정 길드 몇 개와 제휴해서 치안대를 운영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
“와, 정말 무늬만 행정 관리원이었네. 테라리움 내의 일을 알고만 있고 전혀 관여를 안 하면 어떡해요?”
이리스가 어이없다는 말투로 미미르를 타박했다. 만약 제퍼였다면 여기서 좀 더 나아갔을 테지만, 이리스의 기본적으로 미미르에 처지에 대한 걱정을 담고 있었다.
“길드와 제휴를 한다고요? 어떤 길드인가요?”
“그건… 자문인 위원회에서 각자 선출을 해서….”
“제휴 비용이 얼마나 드는 건 보고를 받고 계세요?”
“아니요…. 그것도 위원회에서 알아서 한다고….”
“그럼 길드가 정확히 몇 개나 제휴 중인가요?”
“음… 알고 있는 것만 일단 여섯 개….”
“아… 그림이 그려지네. 환장할 그림이.”
진짜 환장할 노릇이라 이마를 짚자 시들링이 기계처럼 내게 찻잔을 건넸다. 혹시 이리스가 내가 골머리를 앓으면 차를 들이밀라고 명령을 입력해 놨니? 차를 들이켜니 그렇지 않아도 타는 속이 더욱 뜨거워졌다.
자문 위원회에서 각자 길드를 선출해서 치안대를 유지한다라…. 타 길드와 제휴를 맺어 치안대를 유지하는 것 자체는 괜찮아 보였지만 38번째 테라리움은 부정부패가 묻어 있는 것이 분명하니 괜찮지 않게 흘러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자문 위원회에서 대표로 소수 길드를 채택하는 것도 아니고 각자 길드를 뽑아 6개나 운영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길드 선출 과정에서도 분명 잡음이 끼어 있겠지?
자문인 개인의 인맥이라든가 뇌물이 걸려 있을 수도 있었다. 당장 우리나라도 학교의 급식 공급 업체 선정과 관련해서도 좋지 않은 기사를 자주 접했었다.
자문인이 길드와 편먹고 제휴 비용을 중간에 횡령할 수도 있는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도 모르고 있는 어린 행정 관리원은 전혀 잡아내지 못할 것이다.
6개의 길드가 동시에 치안을 담당하면 문제가 생길 것도 분명한데. 아니 애초에 길드가 6개나 투입되어야 할 사이즈도 아닐 거 아냐? 하물며 38번째 테라리움엔 전속 길드도 없다는데 세력 다툼은 없을까?
“와, 나 갑자기 38번째 테라리움이 대체 어떤 곳인지 너무 궁금해졌는디. 꼭 방문해서 무슨 꼴인지 구경하고 싶을 정도인디.”
헤르마가 감탄하며 하는 말에 동의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래도 그곳 최고위인 행정 관리원이 여기에 있으니 대놓고 흉을 볼 순 없었다.
“다른 테라리움도… 다들 그렇게 하는 줄 알았어요….”
행정 관리원의 월렛을 공금으로 묶어 버리는 해괴한 행동에도 아무 반론도 못 펼친 것을 보면 미미르의 처지는 뻔했다. 38번째 테라리움은 더 이상 미미르의 테라리움이 아니었다. 자문인들의 테라리움이지. 그 안에서 그들이 대체 얼마나 해 먹고 있을까?
치안대 건 이외에도 많은 사항들을 의논하는 동안 다른 테라리움의 사정을 듣기 위해 미미르의 의견도 듣긴 했는데, 들을 때마다 38번째 테라리움이 얼마나 개판으로 굴러가는지 확인 사살하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그걸 발판 삼아 우리 테라리움에 부패가 개입되지 않도록 규제를 단단히 걸어 놓는 반면교사가 되었다.
만약 38번째 테라리움을 개편하려면 지금 있는 자문인들을 모두 물갈이해야 할 것이 분명했다.
***
“38번째 테라리움이 지금까지 잘 남아 있는 것이 용할 정도야.”
밤이 늦어 모두를 돌려보내고 나도 내 드라이어드 곁으로 돌아갔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릴 동안 오늘 있었던 일들을 드라이어드들에게 전해 주었다. 중간중간 데이지2가 내가 빼먹은 이야기도 놓치지 않고 챙기며, 하루 일과가 말로 푸는 일기처럼 도란도란 흘러갔다.
“일어나자마자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요?”
메스키트가 내게서 수건을 넘겨받아 대신 머리를 말려 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 달… 이나 부재했더니 일이 산더미만큼 늘어나서 어쩔 수 없었어. 보좌관 하나 두지 않은 탓에 모든 일들이 내 앞에서 밀려 있었거든. 그리고 이 정돈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너무 평화로워서 쉬고 있는 기분인걸.”
솔직히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서류를 끄적이던 건 고통스러웠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엘더는 낮에 봤을 때보다 많이 풀어진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내 당부로 아티팩트에 꼭꼭 숨어 있던 짭신 엘더도 끌고 와 도망가지 못하게 꼭 붙잡고 있었다. 그녀에게 멀쩡한 내 모습을 각인시키고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피곤해도 활발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난 더욱 과장스럽게 활기찬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내가 인복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미미르도 집안 덕에 나처럼 다이아가 많거든. 돈이 많은데 사회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은 야비한 사람들에게 좋은 먹이가 될 수 있어. 오늘 업무를 보며 나 홀로 처리하기엔 부족함을 많이 느꼈고 의지할 사람이 절실했어. 그럴 때 내 곁에는 다행히 좋은 길드원들이 있어 줬지만, 미미르는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던 거야. 이쪽 분야에서 상식이 부족하고 어리숙한 나인데, 만약 길드원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미미르의 상황과 다르지 않게 흘러갔을 수도 있겠지.”
가진 건 다이아밖에 없는 초보 행정 관리원. 어쩌면 내가 좋지 않은 루트를 탔다면 28번째 테라리움의 미래도 38번째 테라리움과 다를 바 없지 않았을까?
날 듣기 좋은 말로 구슬리며 사기 치려 든다면, 어쩌면 나도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거르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다. 미담이 많은 스케어크로우의 경우도 그랬다. 최측근이라 여겨 오랫동안 믿고 행정을 맡겼던 과거 그녀의 보좌관 어닝이 테라리움을 완전히 날린 것만 봐도….
측근을 의심하는 일은 겪고 싶지 않지만… 내게도 언젠간 어닝 같은 존재가 생기지 않을까?
그저 믿음직스러운 내 드라이어드들과 즐거운 모험만 떠나기엔 그른 것 같다.
침대 위를 굴러다니던 마거리트가 슬그머니 내 허리를 안아 왔다.
“내 진리는 내가 지켜 줄게. 나쁜 사람들이 제이에게 접근하면 내가 다 걷어차 줄 거야.”
“내 주인은 현명해서 38번째 테라리움과 같은 일은 없었을 거예요. 인복이 좋다기보단 좋은 사람들이 곁에 오게 만드는 것도 제이의 능력인 거예요.”
“제이 님이 좋은 사람이라서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거예요!”
“네 다이아를 탐내는 것은 나만으로 족해.”
“나쁜 사람들은 싫어요….”
내 드라이어드들이 도란도란 꺼내는 이야기들에 하루 피로가 절로 풀리는 기분이다.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걱정 없이 떠드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테라리움이 잘됐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여긴 무슨 건물이야? 누군가 운영하는 여관은 아닌 것 같은데.”
깨어났을 때, 이곳에서 눈을 떴으니 나도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귀가하긴 했지만.
“여긴 제이 님의 집이에요. 제이 님을 위한 집은 테라리움의 그 어떤 건물들보다 먼저 지어졌어요.”
“어? 여기가 내 집이라고?”
이 나이에 벌써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고?
“28번째 테라리움은 제이 님의 테라리움이니 당연히 제이 님을 위한 집이 있어야지요.”
그렇긴 한데 차마 내 집을 지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주민들의 집은 걱정했어도….
어쩐지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든다. 내 집이라….
집이 있다는 건 언제든지 돌아갈 곳이 있다는 말이었다. 돌아갈 곳….
“집은 인간에게 드라이어드의 아티팩트 같은 존재겠죠? 이참에 제이 님도 아티팩트를 꾸미듯 집을 꾸며 보시는 건 어때요?”
집을 꾸며 보라는 말에 문득 내 세계의 우리 집이 떠올랐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집, 그리고 책상과 침대가 있는 내 방.
내가 내 집을 떠올렸을 때, 내 세계의 집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울까? 아니면 이곳의 집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울까? 내가 고된 여행을 끝내고 돌아갈 집은…. 둘 중 어디가 맞는 걸까?
풀썩 침대에 드러누웠다. 마거리트가 쏙 자리를 빠져나와 옆에 누우며 곰 인형을 안듯이 자연스럽게 날 끌어안았다.
우리 집을 의식하니 내 방의 침대 감촉이 떠오르고 동그란 전등이 자리하고 있던 내 방 천장도 떠오른다.
내 방은 벽 한쪽에 촌스러운 포인트 벽지가 발려져 있었지. 하루가 멀다 하고 손에 놓지 않던 데스크톱도 침대에서 일어나면 바로 전원을 켤 수 있는 곳에 있었는데. 전공 서적이 잔뜩 꽂혀 있던 책장도 있었고. 환절기에 대비해 옷장을 정리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집이 그립나? 돌아가고 싶나? 그건 또 아니었다.
지금 생활이 너무 즐거웠다.
그럼 잊자. 그래, 잊자. 지금 생활에 만끽하면서 충실하자.
거짓말처럼 잠이 쏟아진다. 한 달이나 잤어도 졸린 건 졸린 거였다.
아직 드라이어드들과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