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들어오세요.”
은색 자수가 새겨진 푸른 로브를 입은 노인이 들어왔다. 자수의 문양이 어쩐지 눈에 익었다.
“어… 그 문양!”
“아, 알아보았는가? 그 벽화일세.”
배를 타고 섬에 도달하는 사람들. 그리고 파도 속에 사라지는 섬.
공중 정원의 2, 3층 벽화에 그려져 있던 섬의 탄생과 몰락을 나타내는 내용이었다.
“과거를 되새기며 후대에 선조들의 죄를 전하고 과업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주시한다고 했지. 그 말을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옷에 새겼다네. 섬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집집마다 다들 가지고 있다네.”
“아하….”
“겉으로 내보이는 것에 옷만큼 좋은 것이 없지.”
노인은 로웰라가 재빠르게 집무 책상 앞에 끌어다 준 의자에 앉았다.
“바쁘신데 이렇게 불러서 죄송해요.”
“아닐세. 한가했을 뿐만 아니라 이곳의 대표자가 날 부른다고 하니 하던 일도 제쳐 두고 와야지.”
외부와 차단된 섬에 살던 노인은 아직 테라리움이라든가 행정 관리원이라는 단어들을 낯설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아직 성함을 몰랐네요. 전….”
“자네의 성함은 알고 있다네. 제이라고 했지. 이곳에 사는 모든 이들이 자네의 이름을 말하니 모를 수가 없더군. 난 ‘아세르’라고 한다네.”
“아, 아세르 님. 제가 본의 아니게 살피는 게 한 달이나 늦게 되었네요. 적응은 어떠세요?”
“좋은 터전을 제공해 주어 모두들 부족한 것 없이 잘 살고 있지. 또한 잃어버린 우리의 아이들을 되찾아 준 것에 섬 사람들을 대표해 감사 인사를 전한다네. 정말 평생을 걸쳐도 다 갚지 못할 은혜지.”
아세르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날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앗,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 걸요. 그리고 인사를 받을 건 제가 아니라 저쪽이에요.”
아세르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길드원들과는 이미 인사를 전했다고 말했다. 뒤에서 그날 로웰라가 테라리움 전체가 눈물바다였다고 알려 주었다. 그 자리에 나도 있었으면 좋았을걸.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을까.
“그것보다 제가 이렇게 오늘 아세르 님을 부른 건, 다름 아니라 제 보좌관이 되어 주실 수 있으신가 해서요. 테라리움엔 현재 은둔자의 정원 출신 사람들이 대다수고, 아세르 님께서 섬의 대표직을 겸하시고 계시니 보좌관이 되어 주신다면 테라리움 운영에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제안은 고맙지만 거절하겠네. 이 늙은이는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니 차라리 더 젊은 인재를 뽑는 것이 어떤가? 난 남은 시간 동안 선조의 과업을 전파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하다네.”
음, 거절할 것을 아예 예상 못 한 것은 아니긴 하지만…. 이렇게 여지도 주지 않고 거절해 버리다니. 난 테라리움에 없을 때가 더 많아서 보좌관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럼 대체 누구를 보좌관으로 뽑지?
섬 출신 사람으로 뽑는 게 좋을까? 아니면 외부에서 인원을 충당할까?
전자라면 섬 사람들의 사정을 알고 있으니 배려를 잘해 줄 테지만 외부 상황에 대처가 느릴 수도 있겠군. 너무 폐쇄적인 공간에서 오랫동안 지냈으니까.
“보좌관을 굳이 한 명만 뽑으란 법은 없으니 섬 출신 중에 하나, 외부에서 하나 뽑을까?”
“그중 한 명은 드루이드였으면 좋겠어요.”
데이지2가 툭 말을 거들었다. 하긴, 데이지2와 말이 통하려면 드루이드여야겠지.
“그래요, 제이 님은 일이 많으시니 둘을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보좌관 자리는 너도 꽤 욕심 내던 거 아녔어?”
“아냐, 난 사무적인 일과는 안 맞는 것 같아. 오늘 깨달았어. 그리고 난 길드 의뢰를 수행해야지.”
이리스가 아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역시 이리스가 아무리 좋은 인재라 해도 그녀를 테라리움에만 묶어둘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내부에서 인원을 한 번 찾아보겠네. 되돌아온 아이들 중엔 다시 만난 부모를 떠나고 싶지 않아 하는 아이들도 있으니 이곳에 남아 일을 하고 싶어 할걸세.”
“아, 그러고 보니 로웰라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다고 했지. 그럼 부탁드릴게요.”
일을 줄이려고 했지만 자꾸 새끼를 쳐서 늘어난다. 이러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찾아 떠나는 날이 더욱 미뤄질 것 같다. 꿈에서 봤던 고통받던 드라이어드들이 문득 떠오른다.
아세르가 돌아가고 그레이트 빈 연합의 매니저가 찾아왔다. 그에게 인력 충원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식으로 연합에 공고를 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과수원에서 일하는 건 많은 이들이 꿈꾸는 자리라 금방 지원자가 몰릴 겁니다. 더구나 제이 님께선 이주자에게 세금도 안 받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꿈의 직장이지요. 아마 당장 내일이라도 테라리움 입구를 서성이는 사람들이 생길 겁니다.”
꿈의 직장이라…. 과수원 직원은 공무원 같은 느낌이지.
“다만 양성소의 경우는 시일이 좀 걸릴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험 많고 실력 좋은 드루이드들은 은퇴 후 길드 자문으로 활동하거나 다른 테라리움들의 양성소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스카우트를 해야 할 텐데. 은퇴를 했다 하더라도 유사시 전력이 되기 때문에 테라리움들이 잘 놓아주려 하지 않을 겁니다.”
“스카우트의 가장 큰 무기는 연봉 상승이죠.”
그리고 전 핵무기를 보유 중입니다.
“제이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잘 활동하던 드루이드들도 자진해서 은퇴할 법하겠군요. 이 역시 연합에 공고를 내겠습니다.”
매니저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 당장 은퇴하고 양성소 교관이나 할까?”
“자라나는 드루이드들 망칠 일 있어? 네가? 히아신스에게 아직도 멸시당하고 도깨비바늘에 끌려다니는 네가? 애들이 퍽이나 좋은 걸 배우겠다.”
“우리 히아신스는 날 멸시하는 게 아냐. 우리 사이엔 아직 거리가 아주 조금 있을 뿐이야.”
뒤에서 제퍼와 이리스가 티격태격했다.
“양성소 교관들을 뽑는 거라면 건물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 그것도 부탁드려야 하죠. 거주지 건축에 바쁘시겠지만 인력이 된다면 양성소 건물도 부탁드려요.”
“원하시는 위치가 있으신 건가요?”
“드라이어드 교습소와 함께 쓰든가 근처가 좋겠어요. 분수 근처에 자리하고 있죠? 초보 드루이드들을 드라이어드들과 바로 연계해서 훈련하기에도 좋고 훈련하다 다쳐도 바로 회복할 수 있으니 그쪽이 좋겠어요.”
“새로 건물을 짓는 것보다 원래 있는 것을 증축하는 것이 시간이 덜 걸릴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필요 자재들을 제가 좀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떠올리는 것이 늦었네요.”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난 18번째 테라리움의 공방에서 잔뜩 뽑은, 포장도 뜯지 않은 아티팩트 가구들을 주머니에서 꺼내 와르르 쏟아 냈다.
원 없이 뽑기를 한만큼 책상 위를 가득 채울 정도로 수가 상당했다. 엘더가 좋다고 골라 갔는데도 아직도 많이 남았다. 집무 책상을 바라보는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28번째 테라리움이 내 아티팩트와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아티팩트 가구를 실체화시켜서 사용할 수 있는 특수성을 설명해 주었다. 시험 삼아 작은 우편함을 아티팩트에 넣고 데이지2를 시켜 가져오게 했다.
동전만 하던 아티팩트 가구가 데이지2의 품 안에 부피를 잔뜩 늘린 채 안겨 있었다.
“아티팩트 가구들이 이렇게 사용될 수 있다니…. 처음 듣는 사실입니다. 드라이어드에게 좋은 효능을 주는 가구들이니 교습소와 양성소에 더없이 걸맞은 자재들이네요.”
데이지2에게 쉴 곳으로 제공한 오두막을 포함해 가로등과 벤치들을 떠넘겼을 때 복구도가 낮아서 수용이 불가하다며 그가 징징거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이 많은 가구들을 전부 배치할 수 있을 만큼 테라리움이 복구되었다니 뿌듯하다.
“인력 충원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나누자면…. 혹시 원하시는 인재상이나 준비된 시험이 따로 있을까요? 미리 알려 주신다면 공고에 추가하겠습니다. 물론 문제가 될 법한 사람은 저희 연합에서 사전에 거를 테니 맡겨만 주세요.”
시험이라… 공무원 시험 같은 건가? 다른 테라리움들은 과수원 직원을 뽑을 때 시험을 보나 보지?
항상 시험을 봐 오기만 했던 입장에서 시험을 내는 입장이 될 줄이야.
나는 파필리온에게 보낼 편지 리스트에 과수원 채용 시험지 공유도 추가했다. 당장 무슨 문제를 만들어야 할지, 언제 다 만들지 막막하니 그냥 베껴 와야지.
“인재상은 역시 성실하고 일 잘하면 되죠. 시험은 아마 있을 예정이에요.”
“네, 지원자가 많을 텐데 그 많은 수를 전부 면접으로만 뽑을 수 없으니 시험이 제격이죠. 그럼 그렇게 알고 공고를 연합 본부에 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레이트 빈 연합의 매니저가 자리를 떠나자 이제 칼롱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일만 남았다.
16번째의 보좌관에게 전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