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2화 (242/604)

타지로 온 어린 행정관을 무상으로 숙박시키는 것 정도는 내게 일도 아니었다.

예전이라면 테라리움의 사정을 걱정했을 테지만, 이젠 여기에도 다른 테라리움들처럼 아주 고급스러운 수준은 아니더라도 좋은 여관이 존재했다. 그중 과수원과 가장 가까운 여관에 미미르를 묵게 했다.

이대로 하루 이틀 뒤 미미르가 떠나면 공적인 일 외에 더 이상 그와 엮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수렴청정을 노답 수준으로 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들의 사정이니, 다른 테라리움의 내부 일에 제3자인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미르가 아무리 불쌍해 보여도 그의 뒷배엔 대단한 집안이 버티고 있었으니 테라리움 운영하다 말아먹어도 어떻게든 되겠지란 생각이 앞섰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생긴 변수는 미미르를 자꾸 내 곁에 맴돌게 만들었다.

38번째 테라리움에서 온 자문인들이 그대로 돌아가지 않고 며칠 여행을 떠날 거란 소식을, 미미르를 여관에 묵게 하자마자 듣게 되었다. 금방이라도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굴더니. 이리스가 덜 굴렸나?

“알력 다툼이네요.”

자문인들을 끌고 나갈 때보다 한껏 상쾌해진 표정으로 이리스가 돌아왔다. 미미르에게 들었던 38번째 테라리움의 사정을 전해 들은 이리스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녀의 말은 나도 동의한다.

“이미지를 걱정한 행정 관리원이 28번째 테라리움에 남은 것처럼, 그들도 행정 관리원보다 늦게 돌아갈 생각인가 봐요. 정말, 어린애 상대로 치졸하게 굴긴. 아무리 그래도 행정 관리원이니 자신들의 상관 아닌가요?”

자문인들은 우리의 눈치가 보이는지 미미르처럼 28번째 테라리움에 남진 않았다. 그들은 더 앞 번대 테라리움을 관광하겠다며 황급히 떠나 버렸다.

급조된 관광. 미미르를 아예 자신들의 아래에 두기 위한 기 싸움. 그들은 미미르가 제풀에 지쳐 38번째 테라리움으로 돌아갈 때까지 먼저 돌아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얼마나 고삐를 풀어 놨으면 테라리움의 최정상 자리와 맞먹으려 드는 걸까?

“아무리 상관없는 테라리움이라 하더라도 입맛이 쓰네요. 행정 관리원을 무시하는 관리들이라….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이건 그 어린 행정 관리원 잘못도 있다 보는디. 위엄을 보여 주지 못한 데다 자문인들에게 너무 권한을 허락했는디.”

“이름뿐인 행정 관리원이네. 완전 허수아비 아냐?”

“아무튼 우리 테라리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기만 해 봐. 제가 다 조져 놓을게요.”

든든하기도 하지. 하지만 감히 내 테라리움에서 그럴 배짱을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애초에 그럴 싹이 보이는 인재라면 쓰지도 않을 테지만.

“그런데 제이 님,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리스는 내게 미미르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물었다. 미미르에게 비아냥댄 헤르마, 제퍼와 달리 동정심이 가득 담긴 이리스의 말투는 은연중에 내가 그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담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대로,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쩌면 미미르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 줄 수도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일단 내버려 두겠다는 생각은 변함없어요. 다만 미미르가 먼저 도움을 요청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요.”

그런데 그의 심약한 성정으로는 벌벌 떨며 테라리움에 좀 더 묵게 해 달라는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미미르는 금방 자문인들의 행로에 대해 전해 들었고 예상과는 조금 다른 도움을 내게 요청했다.

“혹시 제가 행정 관리원 일을 곁에서 보고 배워도 될까요?”

늘어난 숙박에 대한 건 예상대로였지만 내게 일을 배우고 싶다는 요청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절 보고 배운다고요?”

“네, 전 아랫사람도 통제 못 하는 너무 못난 행정 관리원이니까… 이 기회에 대단하신 분께 배우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보는 눈은 있네요.”

이리스가 툭 끼어들었다. 미미르에게 동정심을 가졌던 만큼, 그녀는 미미르에게 꽤 호의적이었다.

“딱히 배울 건 없을 건데….”

내가 행정 관리원으로서 제대로 일을 수행한 적이 얼마나 되지? 마지막으로 테라리움 관련 서류라도 훑어봤던 것이 16번째에 있을 때뿐 아닌가?

내가 곤란한 기색을 보이면 성정대로 금방 물러날 줄 알았던 미미르는 의외로 올곧게 눈을 빛내며 버텼다.

“진심인가 본데요?”

이리스가 내 귀에 속삭였다.

“배울 게 없다는 내 말도 진심인데….”

“뭐, 곁에 그냥 내버려 둬도 괜찮지 않을까요? 어차피 제이 님이 무얼 하든 저 어린 행정 관리원 눈에는 다 대단해 보일걸요? 기본적으로 제이 님은 사람을 부리는 입장이시잖아요. 저쪽은 끌려다니고.”

“누가 곁에서 날 따라다니며 나만 본다는 건 좀 부담스러운데….”

이리스가 엄지를 들어 제 뒤를 가리켰다. 그곳엔 시들링이 서 있었다.

“비슷한 애 하나 이미 데리고 있잖아요. 같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큼큼, 저… 절대 방해는 되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 외부에 기밀을 유출한다거나 그런 불법적인 일도 절대 하지 않을 거고….”

“그럴 배짱도 없어 보이는디.”

“시… 심부름도 잘할게요!”

“테라리움에 방문하신 귀빈인데 제가 어떻게 심부름을 시키겠어요.”

미미르는 생각보다 끈질겼다. 무엇이 저 심정 약한 소동물을 자극한 것일까? 같은 테라리움 행정 관리원 앞에서 대놓고 측근들에게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신호탄이 된 것일까?

결국 미미르의 제안을 승낙해 주었다. 날 지켜보는 이가 있으니 이 기회에 테라리움 업무를 제대로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역시 제이 님이라면 받아들일 것 같았어요. 제이 님은 보기보다 어린아이한테 약하신 것 같거든요. 로웰라도 그렇고. 저 그래서 말인데 그 아이 한 번만 만져 봐도 돼요? 진짜 드라이어드예요?”

이리스가 실새삼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썩 물러가라. 난 애완동물 따위가 아니다.”

실새삼이 손대기만 하면 물어 버릴 거라는 듯, 이리스의 손가락을 향해 아르릉거렸다.

“들은 대로 정말 말투가 싹수 없네요. 귀염성도 없는 녀석인데 갖다 버리죠? 이 녀석, 엄청 못된 드라이어드라면서요? 제이 님도 죽이려고 공격하고.”

“말은 똑바로 하거라. 다 죽어 가는 이 드루이드를 살린 것은 나이니라. 내 조언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못 서 있었어.”

“아주 지독한 짓을 벌인 놈이라더니.”

“그런 기억은 없다.”

은둔자의 정원을 아예 기억도 하지 못하는 실새삼을 상대로, 괴물 노릇 했던 그의 과거 이야기를 꺼내 봤자였다.

“그런데 내가 계속 안고 있기엔 무겁긴 해.”

나는 실새삼을 하루 종일 안은 채 돌아다닐 순 없으니 이때다 싶어서 이리스에게 후딱 넘겨주었다. 한번 안아 보실래요? 이리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팔을 벌렸다.

시들링은 주면 던질 거란 걸 선례를 봐서 알겠고, 이리스는 기가 강하니 실새삼을 적당히 눌러 줄 수 있을 것이다. 실새삼이 허튼짓을 하려 해도 옆에 고렙 드루이드가 셋은 더 있으니 못할 테고.

이리스가 장난감을 선물로 받은 아이처럼 실새삼에게 눈을 빛냈다. 반면 실새삼은 허망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러나 금세 앞을 가리고 선 제퍼에 의해 시선이 차단되었다.

“나도 안아 볼래. 이렇게 작은 드라이어드 처음 본단 말이야.”

“와, 진짜 가볍다. 사람 아이 무게로 생각했는데 드라이어드는 다르네.”

“이 예의 없는 녀석들! 날 내려놔!”

뻐근한 어깨를 풀고 있는데 미미르가 들뜬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제 무얼 하시나요? 바로 업무를 보시나요?”

“어… 일단 테라리움을 좀 둘러볼까요?”

분수대 구경이나 시켜 줄까?

***

미미르에게 테라리움 구경을 시켜 주는 겸, 나 역시도 바뀐 테라리움의 곳곳을 살폈다.

엘더를 찾으러 빠졌던 외곽과 달리 과수원을 중심으로 퍼진 상가들은 구경할 것들이 많았다.

세금이 없는 우리 테라리움은 뭐든 시작해 볼 수 있는 좋은 곳이었다. 아직 외부 유입이 일꾼들을 제외하고 거의 없다시피 해서 다이아 유통은 활발하게 일어나지 않지만, 대신 인력이 주요 화폐로 사용되고 있었다.

거래의 대가로 상대가 퀘스트처럼 부탁하는 일을 대신해 주는 것이다. 요컨대 청소나 빨래, 대필, 아이 돌보기, 물건 수리 등등 말이다.

섬에 갇혀 살던 사람들은 뭐든 시도해 보며 자신의 재능을 찾았고, 꽤 다양하게 세분화된 상점과 시설들이 자리하게 되었다.

보통 가구점이란 이름으로 한데 묶일 수 있는 탁자, 의자, 선반 제작이라든가 의류점이란 이름으로 한데 묶일 수 있는 셔츠, 바지, 모자 등이 전부 따로 나눠져 전문 상점으로 존재했다. 다만 동일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한 구역에 비슷한 상점끼리 몰려 있긴 했다.

공터나 다름없던 테라리움의 넓은 땅은 작은 가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도 자리가 남아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훗날 주거지가 부족해진다면 하나로 통합될 가능성이 컸지만 이대로 발전시킨다면 구역들을 한데 묶어 장인 거리를 형성해도 좋을 것 같았다.

“언니! 멘토링 한다며!”

반가운 얼굴이 멀리서 날 부르며 뛰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로웰라였다.

같이 은둔자의 정원을 갔던 시들링도 금세 만났는데 로웰라는 어디에 있나 했더니….

순식간에 곁으로 다가온 로웰라가 미미르를 보며 분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그녀 옆에 자연스럽게 자리하게 된 또 다른 익숙한 얼굴이 꾸벅 내게 인사를 했다. 레몬밤 드라이어드였다.

결국 로웰라의 드라이어드가 되었구나. 공격형만 있는 로웰라에겐 회복형이나 지원형으로 보이는 레몬밤의 존재는 팀에서 좋은 균형을 이뤄 줄 것이 분명했다.

“이리스 언니한테 들었어. 와, 나도 아직 제이 언니한테 가르침 받은 적 없는데!”

날 드루이드 멘토로 따르는 로웰라와 행정 관리원 멘토로 따르는 미미르라…

“둘이 동갑이야. 이쪽은 미미르, 3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고.”

“난 로웰라야.”

“어… 안녕?”

동갑이라는 말에 로웰라는 대뜸 말을 편하게 했다. 그녀에겐 이미 앞에선 이가 행정 관리원이란 것 따윈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드루이드야. 무려 28번째 테라리움의 ‘전속’ 길드원이고.”

“그… 그래. 대단하네.”

로웰라가 질 수 없다는 듯이 제 소개를 이었다. 무엇에 그리 지고 싶지 않은지 모르겠지만.

못 본 사이, 이리스를 언니라고 부를 정도로 친해지더니 그 호승심까지 옮아 온 건가?

“언니, 그….”

로웰라는 흠칫 미미르를 보다가 내게 딱 달라붙어 작은 목소리로 마저 물었다.

“몸은 좀 괜찮아? 언니가 너무 오래 쓰러져 있어서 걱정 많이 했어.”

“이젠 괜찮아. 걱정 끼쳐서 미안해.”

“아휴, 다행이다. 계속 못 일어나면 어쩌나 했어.”

로웰라는 몸을 떼고 다시 천연덕스럽게 행동했다.

“그런데 어디에 있었어?”

“아, 맡고 있던 일이 있었거든. 아직 못 들었구나. 나도 어엿한 전속 길드원인데 계속 테라리움에서 놀고먹을 순 없어서. 그리고 언니 없이 여행을 떠나고 싶지도 않았고.”

“일? 무슨 일?”

로웰라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양 허리에 손을 올렸다.

“은둔자의 정원에서 쫓겨난 아이들을 모두 찾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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